추기경예방을 끝낸 안동일은 함세웅신부와 별도시간을 가졌다.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은 인권신부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들어 한국민주화의 선봉을 이끌고 있었다. 함세웅은 재야세력을 이끌고 김재규구명운둥을 벌리고 있었다.
“신부님, 김재규는 악인인가요?”
안동일은 김수환추기경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함세웅신부에게 던졌다.
함세웅은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입을 열었다.
“김재규는 직책상 독재자의 하수인역을 해야하는 악인이었지만 몰래 의인의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10.26은 제2의 안중근 사건이지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 살해했습니다. 70년후 1979년 같은 날 10월 26일에 김재규의사는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살해 했어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하늘의 뜻이지요. 김재규의사는 사실 우리 민주세력들과도 이심전심으로 가까웠지요. 드러내놓고 상대는 안했지만 음으로 양으로 민주세력들을 도와줘 왔어요”
함세웅은 조심스럽게 숨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재규는 특히 장준하를 존경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시절 3군단장 김재규중장을 만난다. 국정감사 야당소속으로 강원도 인제에 있는 3군단을 찾은 것이다. 김재규는 장준하의 서릿발 같은 감사를 받으면서도 존경심이 우러났다. 청렴결백하고 역사의식 민주의식이 뚜렷한 장준하의 인품에 반해버린 것이다.
국정감사를 끝내고 국회의원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김재규는 묘한 작업을 시작한다. 군단장접견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새로 만든 것이다. 통로가 묘하고 요상했다. 제갈량이 조조를 사로잡으려고 만든 팔진문(八陣門)처럼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총총히 박아놓았는데 들어가는 쪽으로 휘어지게 구부려놓았다. 꼬불꼬불 꽈배기를 이리저리 틀면서 들어간다. 들어가기는 쉽다. 쇠 고챙이에 찔려 나오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군단장님 제갈량의 팔진문 비슷하게 만든 이 입구는 어디에 쓰려고 만드셨습니까?”
부하들이 물으면 김재규는 웃었다.
“산 돼지를 잡으려고 만들었어. 산돼지가 날 찾아오면 나가지 못하게 가둬두고 잡아 버리려고 그래”
“산돼지가 들어올려 구요?”
“산돼지가 안 들어오면 사람돼지라도 들어오겠지?”
“하하하하 군단장님의 아이디어가 재미있습니다”
“허허허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야”
훗날 군사재판을 받는 법정에서 김재규는 팔진문의 비밀을 털어놨다.
“나는 3군단장 시절부터 민주화계획을 세웠습니다.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대통령을 어떻게 하지 않고는 한국의 민주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이 전방초도순시차 3군단을 방문하면 그를 접견실에 가두고 협박하여 유신포기를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어렵게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재판장님이 3군단에 가보면 확인 할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3군단을 방문하기 전에 김재규는 전역을 당한다. 그 바람에 김재규의 팔진문은 용도폐기를 당하고 만다.
그 후로 김재규와 장준하는 지나가다 우연히 스치는 바람처럼 만난다. 만나면 차를 나눴다. 차를 나누면서도 동문서답 같은 이야기로 의중을 전달하곤 했다.
“장선생님이 돌베개를 베고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 하신 애국정신을 잘 압니다. 사상계를 펴내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야당의원이 되어 민주화를 이끌어 오신 것도 잘 알지요. 그러나 한번 독재는 영구독재하게 마련이고 타락한 독재는 죽을 때까지 독재하기 마련입니다. 민주화운동으로 군사독재를 끝내기는 불가능하지요. 북한 쿠바 동독을 보세요. 독재자는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정권을 내놓지 않습니다”
“김장군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러나 난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주의에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군인이라고 모두 독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지와싱톤 미국대통령은 장군출신이지만 3선 추대를 거부한 민주주의자였어요. 한국의 장군들 중에 독재 좋아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개가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입니다. 군대가 있기에 한국 민주화는 소망이 있어요. 군대가 아니면 한국 민주화는 영영 불가 능 하다고 봅니다”
(?.....)
장준하의 군대소망론에 김재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마 그때 어렴프시 10.26의 씨앗이 싹 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장준하는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75년이 오면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하는 모의가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보건대 모종의 그 결사모임은 8월 20일경이 될듯 싶소”
그런데 8월 20일을 3일 앞둔 8월 17일 장준하는 약사봉에서 추락하여 죽는다. 3일을 앞두고 죽는다. 아! 약속한 8월 20일을 3일 앞두고 죽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독재정부는 얼른 추락사로 발표했다. 37년이 지난 2012년 민주정부는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발표했다.
“장준하는 누군가에 의해 머리 뒷부분을 둔기로 강하게 얻어맞고 바위 아래로 던져 저 죽었습니다.”
누가 죽였을까? 장준하는 유신철폐민주회복운동의 선봉장이었다. 장준하 뒤에는 정보부가 24시간 밀착감시를 하고 있었다. 당시 두 개의 정보부가 있었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와 차지철의 청와대경호실 정보팀이었다. 누가 장준하를 죽였을까? 정보부는 알 것이다. 정보부도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그건 정보부가 죽였을 것이다.
김재규의 정보부가 아닌 다른 정보부가.
장준하의 죽음이후 김재규는 박선호를 시켜 은밀히 가족들을 돌봐준다. 어느 때는 돈봉투가 어느 때는 쌀가마가 밤을 타고 날라 왔다. 경찰도 귀신도 모르게 벌리는 도깨비작전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유가족들은 어렴프시 짐작하고 있었다. 한해가 지난1976년 말 이었다. 김재규정보부장은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을 남산정보부로 불렀다.
“너무 서러워 말게나.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도 반드시 이뤄질 것이고”
10·26이 일어나기 3개월 전 김재규는 또 장호권을 불렀다.
“자네는 당분간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내가 여권과 수속을 마련해 주겠네. 이유는 묻지 말고 3개월 안으로 어서 한국을 떠나가게”
김재규의 목소리에는 자식을 아끼는 부성애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장호권은 출애급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이민길을 떠났다. 미국으로 간 장호권은 3개월 후에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10.26이 일어난 것이다.
(아하! 아버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은 김재규장군 이었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은 몰래 우리집을 도와주셨다. 10·26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민주의거인거 같다. 김재규장군은 아버지를 형제처럼 생각하는 분이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의거를 3개월 앞두고 나를 살리려고 미국으로 보내주셨구나!)
“신부님이 들려주신 감동적인 비하인드스토리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숨어있는 의인들이 뜻밖에도 많이 있군요”
<계속>
* '김재규 복권소설'의 소설같은 사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ks&wr_id=3
* 등촌이계선목사는 광야신인문학상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독자들은 등촌을 영혼의 샘물을 퍼 올리는 향토문학가라고 부른다. 저서로 ‘멀고먼 알라바마’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예수쟁이 김삿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