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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부터 원광대에서 주로 미국정치와 평화연구 북한사회와 통일문제 등을 강의해왔고 1999년부터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위한 통일운동>을 전개해왔다. 2014년 현재 원광대 사회대학장 및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쓰거나 번역한 책으로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요한 갈퉁 지음) <두눈으로 보는 북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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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21-07-02 (금) 10:50:00

  


629, 화순 김대중 기념공간에서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화순군 주최, 김대중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2021 김대중 민주평화 학술회의>에서였지요. 김대중을 깊이 연구하진 않았지만, 조금씩 공부할 때마다 그 분의 지식과 지혜, 양심과 용기, 행동과 실천, 그리고 화해와 용서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내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꼭 반세기 전의 선거를 공부해보는 게 재밌었습니다.

 

미국 국무부와 중앙정보국의 표현대로 그는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보다 나은 미래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전 야당후보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내세웠지만 그는 대안을 제시하며 박정희의 정책을 비판했고요. 언제든 가장 중요한 국가 정책과 목표는 경제와 안보일텐데, 그는 이 두 분야에서 어떤 학자나 전문가보다 더 깊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보좌관이나 참모의 머리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체화된 정책을 내놓은 거죠.

 

아래에 초고 연결하니, 덜 바쁘실 때 읽어보고 좋은 의견 많이 주시면 보완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하며 재봉 드림.

 

김대중과 1971년 대선”: https://blog.daum.net/pbpm21/562 아래 전문 참조

 

 

2. 6.15위원회 후원요청

 

한반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2000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열렸습니다. 그 결과의 하나로 남..해외 공동기구인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가 발족했고요. 이 단체는 각계각층의 남..해외 공동행사와 교류 그리고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실천을 꾸준히 펼쳐왔습니다. 사회단체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정부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회원단체들 회비와 회원들 후원으로 조직을 운영하면서요.

 

얼마 전 이 단체에서 강연하며 충격적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모든 남북교류와 민간접촉을 중단시킨 것에 불복해 남..해외간 접촉과 교류를 결행했는데, 이에 박근혜 정부가 5천만원 이상의 과태료(過怠料)를 부과했다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 <통일부 혁신위원회>가 박근혜 정부의 부당한 조치 시정을 요구하는 권고안을 채택했지만, 시행되지 않고 대표단에 대한 중과징금 부과와 압류를 위한 계좌동결 조치가 이어지고 있고요. 위원회 대표들이 과태료를 마련하기 위해 630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후원을 위한 <평화통일디딤돌 615인의 밤>을 갖기도 했는데 크게 부족하다는군요. 남북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팔기도 한답니다. 저를 통해 조금씩 후원해주시겠습니까? 농협 352-1309-1194-93. 감사하며 재봉 드림.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 | 평화 세상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 (초고)


이 글은 전남 화순군 주최, 김대중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021629일 화순 <김대중 기념공간>에서 열리는 <2021 김대중 민주평화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원고다. 미국 국무부가 닉슨 행정부 (1969-74)의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해 2010년 출판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XIX, Part 1 Korea, 1969-1972를 주 자료로 삼는다. 김대중 저 김대중 자서전(삼인, 2011), 정진백 편 김대중 어록: 역사의 길(사회문화원, 2010), 김경재 저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인물과 사상, 2009) 등은 보조 자료다.

1. 박정희의 3선개헌과 미국의 상황

19699-10월 제6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기습적이고 변칙적인 ‘3선개헌이었다. 박정희가 1961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고 1963년과 1967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대통령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친 것이다.

박정희의 정권 연장을 위한 헌법개정 추진에 야당의원들과 대학생들은 19696월부터 ‘3선개헌 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여당의원들은 914일 일요일 한밤중 국회별관에 몰래 모여 기명투표로 개헌안을 처리했고, 1017일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이에 미국 국가안보회의 (NSC)에서는 의회절차가 생략된 ‘3선개헌이 한국 민주주의를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할지, 이에 따라 야당이 더 강해질지 약해질지 가볍게 논의했다. 두 달 앞선 19697월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이 괌 (Guam)에서 미국은 앞으로 제2의 베트남을 만들지 않겠다며 아시아 국가들에 군사 및 정치 개입을 될수록 자제하겠다는 이른바 괌 원칙 (Guam Doctrine)’ 또는 닉슨 원칙 (Nixon Doctrine)’을 발표한 터였다. 남한 국내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수렁에 빠져든 베트남전쟁 처리 이외에 한반도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첫째, 주한미군 감축 문제였다. 1953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유지해온 미군 64,000명 가운데 19716월까지 20,000명을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베트남에 파병되어있는 한국군 50,000명 철수와 연계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19714월 실시될 대통령선거와 5월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를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그 무렵 북한군의 침투와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둘째, 19681월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된 뒤 승무원 80여명이 거의 1년만인 12월에 풀려났다. 닉슨은 1968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세하면서 푸에블로호 나포와 관련해 미국이 어떻게 3등 국도 못되는 북한에게 그런 창피를 당할 수 있느냐고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를 비웃으며 비난했다.

그러한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3개월 뒤 19694월 미국 해군정찰기 (EC-121)가 동해 북한 영공에서 미사일을 맞아 격추되어 승무원 30여명 모두 바다 속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닉슨 정부는 그 정찰기가 북한 연안에서 4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비행하고 있었다며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징벌 폭격을 검토했다.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USS Enterprise)가 북한 근해로 급파되고,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많은 구축함과 폭격기들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북한 군용비행장을 공습할지, 북한항구를 봉쇄하거나 지뢰를 부설할지, 북한영해 안팎에서 잠수함발사 어뢰로 북한군함을 공격할지, 핵대포로 비무장지대 (DMZ) 너머를 공격할지..... 북한에 어떻게 보복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온갖 궁리를 짜냈다.

셋째, 몇 달 동안 북한에 대한 보복 방법과 시기를 검토하기만 할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데, 8월 미군헬기가 비무장지대 북한 영공에서 격추되어 3명이 부상당한 채 북한에 억류되어 버렸다.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한 공개사과없이는 미군을 풀어줄 수 없다는 북한과 실수로 북한영공에 들어갔다는 미국 사이에 몇 달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넷째, 미군헬기 승무원 3명이 북한에 억류된 상태에서 10월엔 미군 4명이 비무장지대에 매복해있다 북한군에 살해되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와 국방부는 미군들이 비무장지대 근처의 불필요한 비행훈련을 금지하고, 비무장지대 안에 적절한 엄호 없이 들어가지 말도록 조치했을 뿐 역시 북한에 보복할 수 없었다.

북한은 8월 억류한 미군 3명을 12월 미국의 공식 사과를 받고 풀어주었다. 미국은 헬기 승무원 3명의 석방을 확보하기 위해헬기가 북한 통제의 영역 깊숙이 침투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에 서명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년 전 196812월 있었던 일과 똑같았다. 미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치욕적 사과문에 서명한 뒤 푸에블로호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거의 1년 만에 돌려받았다. “.....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고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미국 협상대표는 사과문에 서명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 내용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이러한 지속적 공격이나 도발은 베트남전쟁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53월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남한은 196510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병 18,000여명을 포함해 19677월까지 50,000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북한은 1966미국이 남한 괴뢰군대까지 투입해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조선은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북베트남에 공군병력을 보내는 한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무장침투 및 공격행위를 급격하게 늘렸다. 19537월 휴전 이후 1966년 이전까지 12-13년간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남한군과 미군 사망자 수는 10명 남짓이었지만, 1966년엔 70명 정도였고, 1967년엔 거의 300명이었다.

19681박정희의 목을 따러특수부대원 30여명을 보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고, 미국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11-12월엔 특수부대원 120명이 남조선 혁명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해 거의 두 달 동안 남한 토벌대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했듯, 19694월 미국 해군정찰기를 쏘아 떨어뜨리고, 8월엔 미군헬기를 격추했으며, 10월엔 비무장지대에 매복한 미군들을 죽였다.

북베트남을 돕기 위한 북한의 이러한 모든 가능한 노력때문에, 남한은 19683월까지 남베트남에 1개 사단병력을 추가로 보내려던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미국은 남한이 베트남의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심지어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하기만 해도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전이 확실해지고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군사 및 정치 개입을 줄이겠다고 표명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리며 골머리 썩이던 뒤숭숭한 상황에서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한 ‘3선개헌을 했던 것이다.

2.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평가

(1)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

박정희가 19699-10‘3선개헌을 단행한지 꼭 1년 뒤 1970929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선거 신민당후보로 선출되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43세 김영삼, 46세 김대중, 48세 이철승이 경쟁한 가운데 후보로 뽑힌 것이다. 참고로 1970년엔 박정희가 53, 윤보선이 73세였다. 65세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40대 후보들을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구상유취 (口尙乳臭)의 정치적 미성년자들이라는 말로 깎아내렸지만 이들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국정치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최다선 국회의원기록을 지닌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총재 유진산의 추천과 지원으로 1차 투표에서 421표를 얻어 382표의 김대중을 앞섰다. 그러나 2차 결선 투표에선 김대중이 458표를 얻어 410표의 김영삼을 이겼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박정희 정부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악명을 떨친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김영삼은 ..... 다음날 대회에서 낭독할 목적으로 준비해두었던 지명수락 연설문을 목청을 돋워 두어 번 낭독하고 난 뒤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다음날 ..... 후보지명 자축 파티를 위해 맥주 200상자를 준비하여 시간에 늦지 않도록 대령시킬 것까지도 잊지 않고 비서들에게 말해두고 침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운명의 928일 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이 있었다. 김대중과 그의 아내 이희호 그리고 김상현 등이었다.....” 김대중 일행은 전당대회 전날 지방에서 올라온 신민당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들을 찾아다니며 밤새 호소하고 설득한 것이다.

그날 전당대회장 안팎엔 이색적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 전당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 이름의 피켓과 후보 얼굴의 포스터 그리고 현수막과 대형 풍선이 등장했다. 김대중 후보측이 전당대회를 축제 분위기로 만든 것이다. 1968년 미국에 머물며 축제하듯 치르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본 김대중과 이희호 부부의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이었다.

미처 후보수락 연설을 준비하지 못한 김대중이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즉석연설이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대중이 주인이 되어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이 잘사는 시대를 만들 때입니다.....”

나중에 선거유세를 펼치면서 정책과 관련해서도 대중을 끊임없이 내세웠다. 자유롭고 책임있는 국민대중이 참여하는 대중 정치’,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유경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경영과 생산과 분배에 대중이 주체로 참여하는 대중 경제’, 다수의 이익이 우선하며 정직하고 부지런한 자가 성공하는 대중 사회’, 대중이 지배하고 대중만이 행복을 향유하는 희망에 찬 대중 시대’, 소수집단이 농단해온 독재정권을 물리치는 위대한 대중 반정 (反正)’..... 그리고 1950년대를 암흑 전제시대,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시대로 규정하면서 1970년대는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가 되리라 선언했다.

김대중 이름과 관련해 포터 (William Porter) 주한미국대사는 197011월 국무부에 흥미로운 전문을 보냈다. ‘대중이 글자 그대로 대 군중 (large crowds)’ 또는 대중 (masses)’을 뜻하기 때문에,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짜증낸다는 내용이었다. 김대중이 군중에게 대중의 시대가 왔다 (day of masses has arrived)”고 외치는 등 자기 이름을 너무 자주 사용한다고 민주공화당 지도자들이 불평한다고도 했다.

(2) 김대중의 정책공약과 선거운동

김대중은 1015일 대통령후보로서 첫 기자회견을 갖고 5대 정책목표를 발표했다. 국민 융화, 대중 경제, 사회 개혁, 민족 외교, 국방 정예화였다. 민족 외교와 관련해 남북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남북 간의 서신 및 신문기자의 교환, 스포츠 교류 등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접촉을 실현시킬 생각이다고 밝혔다. 이 밖에 4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미국, 소련, 일본, 중공의 4개국에 대해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지를 공동으로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둘째,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의 3선을 인정하는 조항을 삭제한다.” 셋째, “국민에 부담이 되고 있는 향토예비군 제도를 전폐한다.” 넷째, “대중경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노사 공동위원회를 신설하고 공정한 분배를 법제화한다.”

1970년 들어 미국과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세와 도발이 누그러졌지만 북미관계든 남북관계는 살얼음판 같던 민감한 때 남북통일과 북한과의 교류를 외친 것이다. 그리고 1968130여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해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 사태또는 김신조 사건에 충격 받은 박정희가 4월 만든 향토예비군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민족 외교는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박정희와 공화당은 김대중을 용공이라고 비난했다. 향토예비군 폐지는 예비군 동원으로 생업에 바쁜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던 터라 민심이 출렁거렸지만 역시 대담하면서도 민감하고 위험한 공약이었다.

1970113, 포터 대사는 국무부에 한국의 대통령선거 운동이란 제목의 전문을 보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김대중 의원이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아 박 대통령을 포함해 공화당에 상당한 불안을 초래하는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다.....

2. 김대중이 주요도시들에서 대규모 군중을 끌어당겨 대내외 민감한 주제들에 관해 주저 없이 토론한다. ‘강력한 웅변가대중에겐 효과적으로 열변을 토하고 지식인들은 설득력 있게 다룰 수 있다고 보도된다.....

3.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함으로써 정부측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오고 있다.....

4. 김대중은 지방자치 문제에 관해서도 주도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 대통령과 공화당이 과거 지방선거를 공약했던 사실도 떠올린다. 지방선거는 당이 도지사, 시장, 군수, 면장 등을 지명해 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없앨 것이기에 공화당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난처하게 됐다.....

5. 김대중의 기본방침은 간단하다. 박정희의 성취를 부정하지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투표 연령 낮추기, 농촌지역 투자 늘리기, 누진 소득세, 여성 지위 향상 등을 선호한다고 주장한다.....

6. 공화당은 대통령선거 운동기간을 40일로 제한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김대중의 선거운동을 막으려한다. 지난주 김대중의 요청으로 만나면서 내가 중앙선관위 통제의 효과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무시하겠다고 말했으며 오늘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7. 내가 김대중을 만난 뒤 국무총리가 그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나는 김대중이 신중하게 말하며 분명하고 단호하게 보이는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선거가 될 것 같다고도 말했다..... 총리는 내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보도를 그가 퍼뜨리고 내가 그의 미국 방문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보도가 근거 없기도 하고 훙미롭게도 공화당 쪽에서 나온 얘기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8. 국방부장관은 나에게 접근해 김대중의 향토예비군 폐지에 대해 말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9. 박정희는 김대중이 1030일 서울 특파원클럽에서 “1970년대의 한국 외교에 관해 발표한 연설문을 읽으며 몹시 격렬해졌다고 한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국가안보와 반공의 이름으로 이렇게 긴장과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그 말에 뚜껑이 열렸을 것 (Park had to be peeled off the ceiling after that)”이라고 보도되었다.....

10.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지명에서 경쟁했던 김영삼과 이철승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11. 대사관은 어느 쪽도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전개과정을 지켜보며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김대중은 어제 광주에서 20만 청중을 모았고, 며칠 전 부산에선 10만 가까운 청중을 끌었다. 그가 지속적으로 군중을 끌어들인다면 매우 흥미로운 과정을 보게될 것 같다.....

다음날 114, 포터 대사는 김대중에 대한 한국정부와 공화당의 반응을 국무부에 보고하면서 박정희가 국무총리에게 김대중에 대해 무언가 하라 (to do something)”고 요구했다고 강조했다.

116일 국무부장관 특보가 키신저 (Henry Kissinger)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에게 한국의 대통령선거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야당후보 김대중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심각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박정희는 한국의 주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성취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언론과 크고 활동적인 당기구, 그리고 거대하고 광범위한 안보기구 및 병력 등을 통제할 수 있다..... 김대중은 45세로 지금까지 박정희에게 맞서온 가장 정력적 반대자다. 유능하고 지적이며 뛰어난 웅변가다. 대규모 군중에겐 열변을 토하고 소규모 지식인 모임과는 쉽게 친분관계를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할 수 있었던 이전 후보들과 달리 대안을 제시한다..... 대외관계에서는 대통령이 정권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북한 위협을 과장한다고 비난하며 김일성과 통일 대담을 요구한다. 그리고 4대강국이 보장하는 한국 안보를 제안한다.....

박 대통령은 정일권 총리에게 김대중에 대해 무엇인가 하라고 요구해왔으며, 공화당 지도자들은 김대중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해왔다. 한국정부는 김대중을 순교자로 만들기 꺼려하며 그의 연설에 대한 홍보를 차단하고 그를 반대하는 방송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국방부장관이 합참의장을 포함한 30명의 국방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생방송 기자회견을 통해 김대중의 향토예비군 폐지 요구를 이적으로 비난한다.....”

119일 휴덕 (Robert Houdek) 국가안보보좌관 특보가 키신저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메모를 보냈다. “박정희가 진짜 적수를 만나 접전을 벌이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선거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고, 중앙정보국 (CIA)으로부터 김대중에 대한 더 완전한 인적사항과 당선가능성 평가서를 받아야 한다.”

이 메모 밑에 헤이그 (Alexander Haig) 대통령 국가안보군사참모가 흥미로운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좋아요, 우리는 덜 믿을만한 대리인 (less reliable substitute)’을 위해 박정희의 패배를 돕고 있군요.” 이와 동시에 백악관과 국무부 그리고 중앙정보국 모두 김대중의 생애와 당선 가능성 등에 관해 집중 분석하게 된다.

바로 다음날 1110일엔 로저스 (William Rogers) 국무부장관이 닉슨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김대중에 대한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군 현대화에 관한 규모와 방법 등을 놓고 미국과 실랑이를 벌여왔는데, 이에 대해 김대중은 박정희가 한미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정권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북한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미국으로부터의 버림받음 대한 두려움 등 긴장과 공포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7012월로 접어들자 중앙정보국은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국가안보국 등의 정보기구들과 공동으로 한국의 변화 상황에 관한 장문의 국가정보 평가서를 만들었다. 맨 먼저 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군사적으로 북한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고, 국제적 지위는 북한보다 훨씬 강하며,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자체는 이 균형을 크게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선과 관련해 대략 다음과 같이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한국엔 유효한 야당이 없다. 신민당은 약하고 분열돼있다..... 박정희는 가혹한 선거부정으로 확실히 이길 것이다..... 젊고 공세적인 김대중 신민당 대선후보는 박정희를 비판하면서 놀랍게도 활기찬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정권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국가안보와 반공의 이름으로 긴장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라는 등. 그러나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아직 심각한 위험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가 김대중에게 강압적 조치를 취한다면 그의 권위주의에 대한 국민의 초기 불만을 더 부채질하게 될 것이다.”

북한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69년 초부터 비무장지대에서의 사건이 80% 이상 떨어졌다..... 북한은 이산가족들의 편지교환과 방문에서부터 불가침조약, 상호 군축, 서로 다른 정치 및 사회제도를 지키는 남북 연합까지 이전 제안들을 다시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정희와 공화당은 김대중을 용공이라고 비난하며, “김일성이 피리를 불면 김대중이 춤을 추고, 김대중이 북을 치면 김일성이 맞장구친다고도 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위와 같은 한국 국가정보 평가서가 나온 122일 김종필이 백악관을 방문해 키신저를 만났다.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 발표 시점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불만을 표출한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며, 내년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미국의 발표는 한국정부를 당황스러운 처지로 빠뜨렸다고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을 본따 한국 중앙정보부를 1961년 만들고 공화당을 세우기도 한 김종필에게 키신저가 공화당은 선거를 관리해본 경험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종필은 자신과 공화당이 선거 경험을 좀 갖고 있다고 인정하며 선거관리를 다시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19701223일 국가안보회의 참모가 한국 대선 관련 국가정보국 메모를 요약해 키신저에게 보고한 내용엔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대목이 들어 있다. “김대중은 매력적이고 활동적인 45세 정치인으로 천주교 신자이며 영어를 못 한다. 그를 접해본 미국 관리들은 그가 대다수 한국 정치인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직설적이며 설득력 있는 태도와 달변의 연설조로 유권자 지지를 얻는 게 증명된 후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케네디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개방된 선거유세에 호의적 반응이 확산되지만, 당선 가능성은 현재 미미하다. 박정희의 공화당에 비해 대부분 보수적인 신민당의원들은 잘 조직되어 있지 않고 돈도 부족하다. 게다가 김대중은 신민당 전체 의원들의 확고한 지지조차 기대할 수 없다.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선거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다..... 김대중은 625,000명 군사조직을 공격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더 부각시킬 수 없다.” 국가정보국은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다양한 이유로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했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국가안보와 대외정책에 관한 두 정당의 인식이 밀접하기보다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3) 박정희의 더러운 선거운동

1228일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만든 박이 선거전에 대처하다는 제목의 정보 보고는 박정희가 한국 중앙정보부의 핵심 역할을 기대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국은 더러운 선거운동 (dirty campaign)’을 전망한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으로 불러들였다. 김종필도 정치일선에 복귀시킬 것 같다. 올해 초 살인-섹스 스캔들에 연루된 정일권 총리와 청와대 관리들을 교체함으로써 행정부 이미지를 개선하려 한다.....

이후락은 아주 유능하지만 추문에 연루되고 파렴치한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주일대사를 11개월 지내고 돌아와 박정희의 눈밖에 난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을 대체할 것이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가 올해 선거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해주리라 기대했는데 김계원에 실망했다. 그는 박정희가 상대하기 원했던 야당 후보가 지명되도록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명자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이후락이 청와대에 있을 때 광범위하고 문서로 입증된 부패혐의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일본 대사로 갔지만,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작전을 향상시켜 이익을 보는 게 지불해야 할 정치적 대가보다 크다고 믿는 것 같다.

김종필은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부총재직을 제안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박정희는 1298명의 새 특보를 임명했는데 절반 이상이 50대 이하이며 정부 경험이 없다..... 그들의 인상적인 자질과 새로운 청와대는 박정희 선거에 우호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박정희는 이후락과 중앙정보부가 그의 선거전략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리라 분명히 기대한다...... 그의 임명을 보고 판단하건대 박정희는 장기적이고 더러운 선거운동을 기대한다.”

위 문서에 박정희가 눈밖에 난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에 실망한 이유가 드러난다. 신민당 대선후보로 박정희가 꺼려온 김대중이 아니라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지명되도록 중앙정보부가 조작했어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김대중이 후보가 되리라고 예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박정희 정부 때 중앙정보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못할 일 없는 무자비한 권력을 휘둘렀다. 장관이든 여당 국회의원이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당하고 수염이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리라는 것을 중앙정보부인들 예측할 수 있었을까?

김대중은 훗날 나를 후보 안 시킬라고 중앙정보부가 온갖 공작을 하고 한 것은 다 사실이여라고 했다. 그가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뉴스와 함께 박정희에게 불려간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박정희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였고 몹시 기분이 언짢았는지 한두 번 빨다가 비벼 끈 꽁초들이 잔인한 모습들을 하고 재떨이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몸서리치도록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김대중은 1967년부터 신민당 대변인을 맡아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676월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선시켜야 한다. 여당 후보 10명이나 20명 떨어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김대중만은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직접 목표로 내려가 자신이 추천한 여당 후보를 밀어달라고 호소하며 그게 목포 개발과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연설했다.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목포 개발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막걸리로 홍수를 이루고 국수로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천문학적 돈을 뿌렸다. 투표 후 개표장에서는 세 번이나 전기가 나갔다. 투표에서 개표까지 이토록 온갖 부정과 횡포와 협박을 동원한 목포의 전쟁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지 못했는데, 대선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4) 김대중의 미국 방문

김대중은 1971125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한 달 전부터 박정희 정부는 극도로 경계하고 방해하면서 긴장했다. 19701228일 김동조 주미한국대사는 국무부차관을 만나 만약 김대중이 대통령이나 부통령 또는 국무부장관을 만나게 되면 한국정부가 매우 당황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1971127일 포터 대사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백두진 국무총리는 나와 점심을 들며 김대중이 미국에서 중요인사들을 만날까봐 두려워하기만 했다. 총리는 미국인들이 김대중의 방미 경비를 지급해주고 김대중 지지를 약속한다는 소문이 많다고 했다. ‘미국이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미국은 한국 대선에 절대 중립적이라는 공개성명을 발표해달라고까지 독촉했다..... 그는 김대중이 평범한 국회의원일 뿐이라며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도록 미국이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김대중의 여행에 대해 한국정부가 왜 그토록 격렬하게 걱정하는지 물었다..... 한국 관리들이 미국인들을 만나 김대중에 대한 미국 지지에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우리를 방어적 태세에 놓으려는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정부의 경계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국무부관리들을 두루 만났다. 129일 그린 (Marshall Green) 동아태차관보를 만나 박정희가 거친 정치투사들로 알려진 이후락과 백두진을 최근 임명한 것을 보면 한국정부가 부정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징조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제관계에 관해 토론했다.

21일엔 로저스 (William Rogers) 국무부장관을 만났다. “김대중은 그의 대내외 정책강령 제안을 요약해 설명했다. 로저스는 미국이 자유롭고 공정하며 공평한 선거를 선호하며 내정불간섭 원칙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김대중은 그가 이기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 미국이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 물었다. 로저스는 너무 강한 추측이기에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23일 국무부장관이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전문에도 김대중이 군사쿠데타를 걱정하는 정황이 드러난다. 김대중은 그린 차관보를 두 번째 만나 자신의 한국에 대한 4대강국 안전보장협정 구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며칠 전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하버드대학 교수와 토론했는데 그가 4대강국 안전보장협정에 중국의 개입 의지에 회의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중국의 유엔 가입에 대한 미국의 입장 등 국제관계에 대해 깊은 토론을 벌였다.

국제관계에 관한 토론 이후 김대중은 자신에 대한 한국군부의 반대와 군사쿠데타 가능성과 관련해 공화당이 부추기는 소문을 언급했다. 국무부장관과의 만남에서처럼 그의 질문은 미국이 무엇을 할 것이냐였다. 그린은 미국정부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정부에 깊이 관심 있다고 지적하며 직접 대답을 피했다.

김대중은 풀브라이트 (James Fulbright) 상원외교위원장과 케네디 (Edward Kennedy) 상원의원 그리고 여야 원내대표 등 의회 지도자들도 만났다.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며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닉슨 대통령도 만나려 했지만 주미한국대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부인 이희호가 백악관을 방문해 닉슨 부인을 만났다. 귀국 후 경찰은 이희호와 닉슨 부인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과 필름을 빼돌렸다. 공화당 의장과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후보 부인은 닉슨 대통령 부인과 결코 만난 일이 없다. 그런 거짓말을 꾸며서 선거 국면을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필름이 있어서 다음날 모든 신문에 두 부인이 악수하는 장면의 사진이 실렸다. 여당은 어떤 변명이나 논평도 내지 못했다.

(5) 김대중에 대한 위협과 선거결과

19713월 초 홀드리지 (John Holdridge) 국가안보회의 참모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만든 보고서엔 박대통령의 상황과 선거전망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 부분만 그대로 옮긴다.

포터 대사는 나에게 박대통령이 몹시 나빠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창백하고 지쳐보였으며 신체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참모가 나를 백악관에서 온 관찰자라고 소개하는데도 그는 포터 대사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와 대사의 관계에 무슨 긴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박정희 마음에 가장 큰 것은 다가오는 선거운동일 것이다.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김대중은 이미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으며 박정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문제에 관해 언론의 주목을 크게 끌고 있었다. 북한과의 접촉을 개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박정희 코앞의 이슈를 선점하기도 한다. 김대중은 박정희보다 한국민들에게 더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았다. 박정희가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차이가 훨씬 줄어들고 있다. 박정희가 지난 선거에서 100만 표밖에 앞서지 않았는데 이번엔 더 큰 표차로 이기기 원하지만 그렇게 많이 이길 것 같지 않다. 이 자체가 박정희에겐 체면 손상일 것이다.

김대중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박정희 쪽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사기와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김대중의 조카는 매우 모호한 혐의로 서울 경찰에 잔뜩 시달려왔다. 김대중이 선거운동을 일찍 시작했다고 선거법 위반으로 추적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책략은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앞에서 김대중의 조카가 경찰에 시달렸다는 대목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김대중이 125일 미국으로 떠난 이틀 뒤 설날 밤 그의 집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졌다. 수사당국은 수십 명 측근을 연행해 조사한 뒤 그의 조카 15세 소년을 범인으로 몰아 구속했다. 22일엔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 집에 불이 나 선거 관련 서류가 전부 불타버렸다. 수사당국은 그 집 고양이를 방화범으로 지목했다.

4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는 김대중의 표현대로 세계 선거 운동사에 남을 유세가 벌어졌다.” 무려 100만 청중이 모였다. 박정희 정부와 공화당은 이 유세를 방해하려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공무원과 공공단체 직원들에게 가족 동반으로 전원 야유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불참자는 결근으로 처리했다. 고궁은 무료로 개방했다. 창경원에서는 인기 가수와 코미디언들이 총출연해 벚꽃놀이쇼를 벌였다. 경찰 집계로 36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일요일인데도 향토예비군을 비상소집했다. 서울시내 모든 극장은 무료 입장시켰다. 제발 김대중 유세장엔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토록 다양하고 노골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포함해 유세장에 빽빽이 들어찬 건국 이래 최대의 인파 앞에서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550만 서울시민 여러분! 7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김형욱의 표현대로 “(신민당의) 어려운 여건에 빠져있던 김대중은 그의 천부적인 선거술을 발휘하여 선거운동을 끌어나갔다. 그는 한국 정치사에서 청중을 울리고 웃기고, 격렬히 감동케 하고, 용기백배케 하는 한 사람의 입, 즉 웅변술이 얼마나 엄청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김대중의 웅변이야말로 공화당의 정치자금 몇백억 원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상황에서 419일 포터 대사가 국무부에 김대중에 대한 위협 의혹이란 제목의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이 지난 금요일 나를 긴급하게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나는 지금 만나는 건 오해를 부를 것이라고 양해를 구하며 특별한 메시지가 있으면 그의 측근이 정치참사를 만나게 하라고 답했다. 신민당 원로 정일형 박사가 오늘 참사의 거처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정일형은 그와 김대중이 정부 지시 같은 협박 전화와 편지를 몇 번 받았다고 했다. 국민 정서가 김대중 승리 쪽으로 계속 흔들리자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정보부 음모가 있는 것 같다며, 김대중은 나에게 정부가 그런 음모를 저지르지 않도록 단념시킬 방안을 찾을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일형은 대규모 선거부정에 대한 신민당의 우려, 친위 쿠데타 가능성과 주요 투표소에서 투표를 무효화하기 위한 공화당의 혼란 조성 가능성까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

정일형은 신민당이 선거운동 진행에 기운을 얻고 있다고도 말했다.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진다면 김대중이 현재 50만표 정도 이기리라 기대하는데, 선거운동 막바지에 김대중 쪽으로 더 쏠리면 차이가 훨씬 커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민당 대선 관리자로서 매우 당파적이지만, 차분하고 진지한 사람이다.”

419일 이후 427일 투표일까지 대통령선거에 관한 미국의 비밀 전문은 찾을 수 없다. 외교문서집 편집자가 서문에서 표현한 대로 “20세기 말 한국정치의 두 거인 (two titans)’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직을 놓고 경쟁한선거운동의 결정적 기간에 미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가 세 번째 임기를 위해 재선됐다며, 박정희가 6,342,828표를 얻어 5,395,000표를 기록한 김대중을 물리쳤지만, 서울에서는 김대중보다 적은 표를 얻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있다.

박정희는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돈을 얼마나 썼는데 표차가 이것 밖에 안 되느냐며 충격을 받아 1972년 소위 ‘10월유신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유신체제를 통해 철권통치를 강화했다. 19714월 선거유세를 통해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김대중의 주장 그대로였다. 그렇게 총통으로 군림하다 197910월 심복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죽었다.

김대중은 197210월 치료차 일본에 건너가 있다가 ‘10월유신소식을 듣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투쟁을 벌였다. 19738월 일본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바닷속에 던져질 뻔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도움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연금, 체포, 투옥, 망명 등 온갖 고초와 수난을 겪다가 결국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주의와 경제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키는 데 헌신했다.

3. 김대중과 1971년 대선에 대한 요약 및 소감

1970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이 19714월 대통령선거 신민당후보로 뽑혔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우고 경쟁하던 김영삼에게 1차투표에서 졌지만 2차투표에서 뒤집었다. 박정희의 미움과 견제를 받고 있던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의 온갖 공작을 극복하고, 당총재 유진산의 지원까지 받던 원내총무 김영삼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엔 진지하고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도 포함될 것이다.

첫째, 김대중은 전당대회 전날 지방에서 올라온 신민당 대의원들이 묵고 있던 여관들을 부인과 함께 찾아다니며 밤새 호소하고 설득했다. 경쟁자 김영삼은 다음날의 승리를 낙관하고 후보수락 연설 연습과 자축 파티 준비를 점검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둘째, 한국 전당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 이름의 피켓과 후보 얼굴의 포스터 그리고 현수막과 대형 풍선 등을 동원해 엄숙한 전당대회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부부가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하고 도입한 것이었다. 지금은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모습이지만 50여년 전 한국에선 이색적 광경이었다.

김대중의 선거운동 기본방침은 미국 국무부와 중앙정보국의 표현대로 간단했다. 첫째,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박정희의 경제적 성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이전 야당후보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내세웠지만 그는 대안을 제시하며 박정희의 정책을 비판했다.

김대중은 창의적이고 과감하며 획기적인 정책공약을 제시했다. 어느 나라든 국력의 두 가지 기본이 경제력과 군사력이듯, 국정의 두 기둥 역시 경제와 안보다. 한국은 분단국이기에 안보는 통일과 연계되어 있다. 김대중은 경제 및 안보.통일 분야에서 전공학자 못지않거나 전문가를 능가하는 이론가였다.

첫째, 그의 대중경제론1971김대중 씨의 대중 경제 100100라는 선거홍보 책자로 출판되었다. 이는 계속 보완 수정되어 1980년대에 국내에서는 대중경제론이라는 책으로, 하버드대학에서는 Mass Participatory Economy (대중참여경제)라는 영문책으로 출판되었다. 반세기 50년이 흐른 지금도 공정 분배를 얘기하면 공산주의자로 공격당하기 쉬운데, 그는 1970-71년에 이미 노사 공동위원회신설과 공정한 분배 법제화 그리고 누진 소득세 도입 등을 공약하기도 했다.

둘째, ‘4대국 안전보장론은 미국.소련.일본.중국이 남북한을 인정하며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서로 견제하며 한국 안보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19711-2월 미국을 방문해 국무부 관리들과 하버드대학 교수 등 전문가들과 직접 토론을 벌였다. 훗날 소위 북핵문제를 풀기 위한 2000년대 ‘6자회담이나 요즘도 시민운동으로 전개되는 한반도 중립화와 직결된다.

셋째, ‘3단계 통일론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교류를 확대하고 완전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갖고 있으니 충돌과 혼란을 막기 위해 통일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1989년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94년 김영삼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공식 통일정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선거운동을 펼치던 1970-71년은 국가안보가 위험하고 반공 분위기가 극심하던 무렵이었다. 한반도 밖에서는 1965년부터 미국과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며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반도 안에서는 1968-69년 북한의 공격과 침투에 미국과 남한이 극도로 시달렸다. 이러한 때에 북한을 인정하자는 ‘4대국 안전보장론‘3단계 통일론을 내놓았다. 그 일환으로 나온 게 남북한 사이의 편지교환을 포함한 접촉을 시작하며 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더욱 획기적인 게 향토예비군 폐지 주장이었다. 분단과 적대적 대치 상황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남한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968‘1.21사태를 겪고 나서 박정희가 만든 향토예비군을 폐지하겠다는 것이었으니까.

이 밖에 투표연령을 낮추고 지방자치를 실시하며 여성지위를 향상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참고로, 한국의 투표연령은 194821, 196020세에서 200519, 202018세로 낮아졌다. 지방자치는 1952년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19604월혁명으로 본격적으로 실시되다 19615.16쿠데타로 중단된 이후 1990년대 들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남녀평등을 위한 사회운동은 1990년대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성지위 향상은 1998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정부 안에 여성특별위원회를 거쳐 여성부를 탄생시키며 법적으로 정책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미국 국무부와 중앙정보국도 밝히듯 온갖 부정을 저지르며 목숨까지 위협하는 박정희의 더러운 선거운동 (dirty campaign)’에도 불구하고 94만표 차이로 졌다. 그 후 폭넓은 독서로 풍부한 지식을 쌓고 뛰어난 두뇌로 획기적 이론을 세우며, ‘행동하는 양심이란 별명처럼 목숨 걸고 실천했던 김대중은 납치, 연금, 체포, 투옥, 망명 등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인동초처럼 살아나 결국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민주주의와 경제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키는 데 헌신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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