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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쏘련때문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08-14 (금) 21:53:52

 

프랭클린 로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1945412일 독일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아깝게 타계했기때문에 얄타 회담이 로즈벨트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 영수 회담이 되었다. 그의 유고로, 미조리주의 촌로(村老)로 대학을 다닌 적도 없는 잡화상 겸 남성복 상점 경영주 출신이었던 트루만(Harry S. Truman)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로즈벨트 당선후 불과 88일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처음으로 브리핑 받은 것이 원자탄 개발에 대한 만해턴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였다.

  


 

그는 로즈벨트 대통령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문자 그대로 안경을 쓴 멍청한 백수였다. 원자탄 개발 계획은 미국의 부통령도 모를 정도로 보안이 철저히 지켜젔다. 하루 아침에 세계 최강국의 대권을 쥐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그는 마치 제1기 부시 대통령이 딕 체이니 부통령과 공화당 부스러기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듯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참모들에게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간판이 바뀌었으니 무언가 전임자와 차별화 해야 된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알게 모르게 로즈벨트 대통령의 전후 구상과는 멀어지는 결정을 하게 되어 미..3대 연합국의 협조 관계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 비견하자면, 하루 아침에 대권을 잡은 전두환씨가 독재를 하지만 전임자와는 좀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 수도 베를린이 쥬코프 원수가 인솔하는 적군(Red Army) 손에 점령당하자,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59) 그의 첫번째 대외 정책시험대는 포츠담 회담에서였다. 이미 얄타 회담에서 독일이 항복하면 삼거두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독일 수도 베를린의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게 되었는데, 트루만은 얄타 회담에 관한한 일자 무식꾼이라 외교 가정 교사가 필요했다. 하여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같이 의정생활을 했고, 로즈벨트 최측근으로 얄타 회담에도 같이 참석한 기록의 대가인 번즈(Byrnes) 씨를 외교 고문으로 기용해서 얄타 회담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고, 포츠담으로 가기 전에 전격적으로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포츠담행에 동행시켰다.

 


 

포츠담 회담은 717일 시작되어 82일까지 계속되었는데, 독일의 전후 처리 특히 배상금 문제, 쏘련 점령하의 동구와 중구 지역 처리 문제 등을 다루며, 이미 독일이 항복하고 3개월 후면 대일 참전이 약속된 상황에서, 1차 핵실험이 미국의 뉴멕시코 사막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낭보를 받은 트루만은 이 사실을 어떻게 십분 활용할까 하는 문제를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표정 관리가 힘이 들었던지, 트루만은 드디어 724일 회담 도중의 휴게 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스탈린에게 다가가서 넌지시 우리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가졌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자, 스탈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놀라는 기색도 전혀 없이, 성공을 축하한다며 덤덤히 받아들였다. 트루만의 보좌관들은 스탈린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면밀히 관찰했으나 별다른 표현이 없자, 내일 쯤 스탈린이 그의 수하(手下)들을 데리고 와서 그 신무기에 관해 질문을 퍼부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다음날 그들은 예상이 빗나가서 오히려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후일 쥬코프 원수의 회고록에 의하면, “회담중의 어느날 저녁에 자신도 동석했을 때 스탈린이 외상 몰로토프에게 트루만이 신무기 얘기를 꺼내더라고 말하자, 몰로토프는 즉석에서 쿠르챠토프에게 연락해서 그의 계획을 신속히 추진하라고 하겠다고말했다. 나는 그들이 원자탄 연구에 대해 얘기하는 줄 금방 알아 차렸다. 이는 미국이 냉전에서 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자탄을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194586일과 9일 미국은 아무런 군사적 필요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인구가 조밀한 두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증명했다고 기록했다.

  


 

스탈린은 그들의 정보 계통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베를린 점령시에 벌써 베리아 수하의 비밀 경찰이 베를린 지구에 있든 독일의 원자탄 연구소의 각종 자료와 시설 그리고 관련 연구자들까지 몽땅 쏘련으로 데려간 사실이 1949년 쏘련의 핵실험 성공에 의아했든 미국 정보 관계자들이 뒤늦게 확인했다. (이것은 폰 브라운 등 독일의 V-2 로켓 전문가를 전후에 미국이 데려와서 대륙간탄도 미사일 개발에 활용한 것과 같다.)

 

포츠담 회담이 끝나고 (194582) 일본에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무조건 항복할 것을 강권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즉각적이고도 막심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가 있을 뿐이라는 경고를 한 다음 83일 트루만과 번즈 일행은 오그스타(USS Augusta: 중순양함으로 제 2차대전 중 미국의 상륙 작전시 작전 본부용으로 사용되고, 미국 대통령들이 해외 회담 참가시에 활용) 함정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두 양반은 그냥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들이 배를 타기 전에 이미 원자탄 투하를 결정하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에 원자탄(꼬마/ Little Boy) 투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86일 원자탄이 떨어져 수만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순식간에 살상되고, 그 여파로 십여만명이 더 방사능 오염(汚染)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그리고, 꼭 첨부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미국측 고위 장성들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 등) 은 거의 다 일본이 조만간 항복할 터이므로 원폭 투하가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쏘련은 일찍이 194311월 테헤란 회의때 이미 로즈벨트 대통령의 간청에 따라, 대일 참전에 언질을 하게 되고 다시 19452월의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독 전쟁이 끝나고 3개월 후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독일이 그 해 59(모스코바 시간) 정식 항복 선언을 했기 때문에, 원자탄 시험에 성공한 미국이 비록 바라지는 않았지만, 쏘련의 대일전쟁은 89(모스코바 시간)에 개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쏘련의 참전을 막고 싶었던 트루만 대통령과 번즈 장관은 원자탄을 투하하면 일본이 활짝 놀라 금방 항복할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은 원자탄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군기(B-29) 들은 일본의 주요 도시를 융단폭격(絨緞爆擊)을 하여 무수한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켜, 도시 주민들이 시골로 미군 폭격을 피해 피난가는 소위 소까이가 유행했다. 194539~10일간 동경에 대한 야간 화염 공격으로 하루 밤사이에 1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원자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일본 본토에서 약 100 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원자탄의 파괴력을 음미할 여가도 없이 그저 또 하나의 융단 폭격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항상 전쟁 개시 전에 선전포고 없이 적을 기습 공격하는 일본과 달리, 이틀뒤인 88일 저녁 늦게 모스코바에서는 몰로토프 외상이 사토 나오다케(Naotake Sato) 일본 대사를 호출하여,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았고, 연합국의 요청에 의해 대일 선전 포고를 한다고 통보하고 9일 자정 (0:00 ) 이 지나면 쏘련방과 일본은 전쟁 관계에 돌입한다고 알렸다.

 

그 다음날 (8/9) 자정을 1분 지나서, 쏘련은 대독 전쟁의 영웅인 말리노프스키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150만 대군을 서, , 3개 방면에서 동시에 만주 공격을 개시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서 전쟁 개시 약 1주만에 60만이 넘는 관동군을 포로로 잡아들이고, 관동군이 북조선 지역으로 후퇴해서 본국으로 도망가려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나진, 청진 등 3 곳에 육전대가 상륙했고 이어서 개성북방 38선까지 진격했다.


 

바라지도 않았던 쏘련군의 대일 참전이 이루어자, 미국은 또 한방의 원자탄(뚱보/ Fat Man)을 원래 고쿠라라는 도시에 투하할 예정이었으나, 마침 그 도시 상공에 짙은 구름이 끼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문의 한 결과, 나가사끼에 투하하라고 해서 엉뚱하게 나가사끼 시민들이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정설은 원자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다고 믿어 왔으나, 최근 영어, 일어뿐만 아니라, 노어까지 유창한 일본계 미국인인 하세가와 추요시(Prof. Tsuyoshi Hasegawa; UC Santa Barbara) 교수는 그의 저서 ‘Racing the Enemy’에서 원자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과 종전을 중재해 줄 것으로 믿었든 쏘련이 대일 선전포고하여 무서운 속도로 만주를 휩쓸고, 거의 모든 정예 관동군을 포로로 체포하며, 그 기세로 일본 본토(우선 북해도) 쪽으로 진군한다면, 막을 도리가 없어서 두 손을 들고 본토만이라도 미국의 보호를 받는 쪽이 낫다고 판단해서 항복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여기서 “Racing” 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위해 쏘련과 미국이 경주한다는 뜻으로, 쏘련의 참전과 원자탄 투하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타였는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백미다.)

 

8.15와 연결하여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38선은 두 명의 미군 대령이 30분만에 결정했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모든 나쁜 것은 쏘련이 한 것으로 치부하고 설령 미국이 잘못한 점을 안다고 해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지냈다. 참전 직후의 쏘련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냥두면 한반도를 모두 수중에 넣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로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에 근무하든 딘 러스크 대령은 19458월 상부로부터 쏘련이 수락할 수 있는 한반도 분할 선을 30분 안에 마련해서 올리라는 하명을 받고 벽에 걸린 내셔날 지오그래픽사 발행의 지도를 뚫어지게 보며 골똘히 생각한 끝에 서울을 포함하고 인천도 들어가는 38 선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올렸더니 그대로 채택되고 쏘련도 동의해서 운명의 38선이 그어졌다. 당시 정책과장 보스틸 대령은 후에 대장이 되어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에서 근무했으며, 과장보였던 러스크 대령은 전후 전역하여 국무부에 근무하다가 국무부 장관까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도 쏘련이 마음만 먹으면 다 차지할 수 있었으나 연합국 협조 관계를 고려해서 미국측 요청을 토를 하나 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결국 남북분단은 원인제공을 한 것도 38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었음에도 대부분의 한국민들이 쏘련의 진주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은 이승만박사의 흑색선전(黑色宣傳)과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 우스운 것은 해방후 모스코바 3상 회담에서 그전까지 비밀에 싸였던 신탁 통치안이 처음으로 대외적으로 발표되자, 쏘련 측에서 신탁안을 내놓은 것처럼 반탁 친탁 싸움이 벌어졌으나,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신탁통치발상은 다름아닌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의 브레인 차일드(Brain Child)라는 것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외교의 천재라는 국부 이승만은 그 사실을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감행했다. 그해(1945) 1226일 이 박사는 방송 연설을 통해 쏘련이 신탁 통치를 주창한다. 최후의 일인까지 죽엄으로 싸와 독립 방해를 각성케 하자고 호소했다. (한국대중매체사에서 인용)

 

그의 멍청한 추종자들이 치켜 올리듯이 이박사가 그렇게 외교의 달인이었다면 이미 2년여 전인 (194311) 카이로 회담 때부터 거론된 조선의 신탁통치론을 모르고 있었다는게 말이 되는가. 정말 몰랐다면 그 역시 여느 조선인들과 마찬 가지로 로즈벨트, 쳐칠, 장개석 간의 토의 내용에 깜깜 무소식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이박사 연구의 대가라는 Y모 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는 이 박사가 로비를 해서 카이로 선언에 조선 독립 조항을 넣었다는 해괴한 설을 주장하는데, 만일 그의 주장이 맞다면, 이승만 자신이 장기간(최대 50) 신탁 통치를 하자고 부축이고 딴소리를 하는 셈이다. 나치의 흑색 선전의 대가 괴벨스가 와서 선생님께 한 수 더 배워 가야겠습니다라고 할 판이다.

 

그리고, 냉전은 쏘련이 시작했다고들 하지만, 촌뜨기 트루만이 갑자기 대통령이 되고 너무 크고 무시무시한 장난감을 가지게 되자, (원자탄 성공 소식을 듣고 나서 트루만 대통령이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이 행동해 쳐칠 수상이 놀랐다고 할 정도로 -스팀슨 전쟁상 증언) 과잉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원자탄을 두발 투하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내고도, 촌뜨기 트루만은 한국 전쟁시에 중국 지원군 참전으로 평안도 산골에서 미군이 참패하자, 기자 회견을 열어 모든 무기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한 기자가 그럼 원자탄 사용도 고려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해서 온 세계를 경악에 빠지게 만들었다. 영국 수상 애틀리가 긴급히 날아와서 원자탄까지 사용하는 확전은 반대한다고 해서 겨우 한국 땅에 떨어질 원자탄 세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이후로 단 한 발의 원자탄도 실전에 사용한 적이 없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승만 박사와 그 추종 세력들이 역사의 진실을 가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흑색 역사 창조에 광분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올바른 역사 바로찾기 대열에 동참하여 일로 매진(邁進)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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