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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탄 두 발에 일본이 항복?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08-13 (목) 11:46:28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든 소위 대일본 제국이 한 여름 8 월에 원자탄 두 발을 얻어 맞고 머리가 약간 돌아서 항복했다고 지금까지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매년 8월이 오면, 1945815 일 일본 왕이 그의 신민들에게 연합국에 항복을 수락하는 방송을 한 것을 두고 우리 한국민들은 우선 해방이 되어 일제 35 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고 좋아 하지만, 그러나, 우리 손으로 얻은 해방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은 얻지 못하고 전승국의 분할 점령 상태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거의 영구 분단 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항복이 반드시 모든 한국민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해방 후의 일은 뒤로 미루고, 일본이 항복하게 된 경위는 늦은 감이 있지만 바로 알고 넘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뒤늦게 서구화하여,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드니 일본으로서 삼킬 수 있는 곳으로는 만만한 이웃인 조선을 먼저 집어 삼키고, 넘치는 힘을 뻗어서 만주도 삼켜서,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끌어 앉혀서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만들어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다. 식성이 다 차지 않은 일본은 허약한 중국을 찝적거려서 쳐들어 갔다.

 

그러나, 조선과 만주와는 달리 중국땅이 워낙 넓어서 아무리 쳐들어가도 도망만 치는 장개석(蔣介石) 군을 따라 잡을 수 없어서 그들이 차지한 곳은 소위 점 과 선일 따름이었다. , 철로선변과 도시는 점령했지만 그 사이에 넓게 펼쳐진 시골은 들어갈 엄두도 못내었다.

 

그 무렵, 1차 세계 대전에 패해서 전승국들로 부터 배상금 문제, 비무장 지대 설치와 룰르 지방 점령 등으로 경제적 혼란 상태에서 다시 독일을 부활시킨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주변을 강공으로 몰고나가 뮨헨 합의로 독일인이 많이 사는 첵코의 쥬데텐 지역을 합병하고, 계속적으로 영토를 뻗어나가려 하였고, 이태리 역시 전승국이었으나 전리품이 적은데 불만을 품고 해외로 뻗어나가려 안간힘을 하여서 독..일의 추축국간에 동맹을 맺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일본은 그당시 완전히 강경 군부가 정부를 장악한 상태였는데, 1938년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최정예 관동군은 조선, 만주, 쏘련 삼국의 접경 지역에 있는 장고봉(張鼓峰) 지역의 국경 경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을 구실 삼아 그 곳 쏘련 국경 수비대를 찝적거리다 쏘련의 기계화부대에 크게 혼쭐이 나서, 본전도 못찾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이 일(장고봉 사건)1938728일부터 811일 사이에 일어났다.

 

그런데, 그 다음해(1939), 만주와 외몽고 사이의 노모한이라는 조그만 도시 근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 외몽고 기병대가 말에 목초를 먹이려고 가는 것을 만주쪽의 관동군이 국경 침범이라고 사격을 하여 조그만 전투로 시작한 것이 양쪽에서 몇 개 사단씩을 동원하여 거의 전쟁 규모로 커졌다. 당시 외몽고는 쏘련의 보호국인 셈이어서, 쏘련측 사령관으로 후에 독일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켜 쏘련의 영웅으로 불리는 쥬코프가 임명되어 탱크를 위시한 기계화 부대를 잘 운용하여 관동군 1개 사단을 섬멸시켰다. 일본은 쏘련과 2년간 두차례나 큰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다시는 시베리아로 쳐들어가서 바이칼 호수 이동을 차지해보겠다는 망상(妄想)을 버리게 된다. 이 노모한 사건(몽고쪽 강 이름을 따서 할힌 골 사건으로도 부른다)으로 일본의 북진파는 힘을 잃게 되고 남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독일을 도와 쏘련을 양면에서 협공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쏘련과 중립 조약을 맺고 (19414) 남진책으로 매진하게 된다.

 

또한, 이로 인해 쏘련은 배후를 단단히 하여 독.쏘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에 따라 917일 약속된 폴랜드 동부를 진공하여 독일과 폴랜드 땅을 이등분하게 된다. 2년 후에 독일이 서구를 평정한 다음에 소위 생활권(Lebensraum) 확보라는 명목으로 쏘련을 침공하였는데 (1941622: Operation Barbarossa) 모스코바의 명운이 경각(頃刻)에 달렸을 때까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던 쏘련의 정예 극동군을 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유명한 독일 출신 쏘련 스파이인 조르게로부터 일본군의 북침(시베리아 침공) 위험이 없다는 정보를 확보한 다음에야, 극동군을 투입하여 모스코바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편, 동남아를 식민화한 유럽 국가들은 영국을 제외하고 모두 독일에 정복당하여 거의 무주공산격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석유 금수조치로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연합함대의 함재기가 1941128일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두 차례 공격, 거의 모든 전함과 각종 보조함, 비행장에 노출된 군용기를 파괴했고, 2,000명의 인명 피해까지 입혔다. 요행인지, 항공모함은 모두 군항내에 정박해 있지 않아서,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항공모함이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두고 음모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확인 되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믿을만하지만 아무도 확인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설로만 남아도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해군은 이미 일본의 암호 체계를 해독해서 진주만 공격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호놀루루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으로 가장한 일본 첩자(諜者)가 그 당시 진주만에 정박중인 함정의 위치 정보를 일본 해군에 보내는 것 조차도 파악하면서, 항만내에 많은 전함을 몰아 둔 것은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유도해서 미국이 제 2차 대전에 참전하는 구실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서 유럽은 영국만 빼고 불란서를 위시(爲始)한 모든 나라가 독일의 발굽 밑에서 신음하고 있어서 영국은 미국이 참전해서 도와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로즈벨트 대통령도 참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미국내 여론이 참전을 반대하기 때문에 대일 석유 금수와 프랑스령 인도지나에서 철군할 것 등 일본이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서, 진주만을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몰고 갔다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장기인 불의의 기습공격부터 했고, 로스벨트 대통령은 기다렸다는듯 의회에 나가서 (1941128/워싱턴 시간) 이른바 오욕의 날(day of Infamy)“ 연설을 통해 일본이 전날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또한 의도적으로 공격했음을 비난하고 선전 포고를 요청하고 그날 오후 의회에서 가결하여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자, 일본과 동맹 관계에 있는 독일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고, 그 대응으로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해서 정식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과 싸우고,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독일과 그 동맹국 (이태리 등)과 싸우게 되는데, 미국(로즈벨트 대통령)은 정서상, 대독 전쟁에 우선권을 주어서, 독일을 먼저 항복시키고 나서, 일본의 항복을 받도록 전쟁 구상과 집행을 해나갔다.

 

우리는 카이로 선언(194311) 만 알고 있는데, 그 회담이 끝나자 바로 로즈벨트 대통령과 쳐칠이 이란의 테헤란으로 가서 (Teheran Conference: 194311) 쏘련의 스탈린 수상을 만나, 대독 전쟁 수행 특히 제2전선 형성(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년에 실행하도록 합의하고, 쏘련의 대일 참전 확약을 받는데 시기는 대독 전쟁 종료 후로 잡았다. 로즈벨트는 스탈린의 협조에 크게 만족하였고, 곧바로 아이젠하워 장군을 서방 연합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란의 테헤란에서 만난 것은 스탈린이 자신이 대독 전쟁을 지휘 감독하기 때문에 본국과 너무 먼 곳에 갈 수 없다고 하여 영미 수뇌(首腦)가 부탁하러 가는 처지(대일 참전 권고)가 고려됐고, 특히 이란은 당시 독일 진영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쏘련과 영국이 분할 점령 중이었다.

 

놀망디 상륙 작전(Operation Overload: 194466)의 성공으로 나치 독일을 동서 양면으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독일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일 무렵, 연합국 삼거두인 로즈벨트 미국 대통령, 쳐칠 영국 수상, 그리고, 쏘련의 스탈린 수상이 쏘련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휴양지 얄타에 모여 얼마 남지 않은 대독 전쟁 마무리와 전후 처리 문제 등을 협의하고, 쏘련의 대일 전쟁 참여와 그에대한 보상책등을 토의했다. (Yalta Conference: 1945/2/ 4-11).


 

먼저 독일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주요 나치 전범을 의법 처리하며, 독일을 4개로 나눠서 점령해서 통치하는데 합의했다. 또한 독일에 전쟁 피해 보상금을 받되 그 절반을 쏘련이 가지게 하며, 폴랜드의 동부 지역은 쏘련이 차지하고 폴랜드는 서쪽의 독일 땅으로 보상 받도록 하였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대일 참전을 확약했다. 또한, 그해 4월 샌 프란시코에서 열리는 유엔 창립총회 개최도 스탈린이 동의했다.

 

쏘련의 대일 참전에 대한 보상책의 일환으로 로즈벨트 대통령은 조선에서의 쏘련의 점령구역 (Occupation Zone)을 약속하고, 대일 전쟁 종전 후에 미, , 쏘가 조선을 20년 내지 30년간 신탁 통치를 하다가 자주 역량이 달성되었을 때 독립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다고 응수하며, 영국도 끼워서 4개국 신탁통치로 하며, 신탁통치 기간에 군대는 주둔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의해 로즈벨트의 동의를 얻었다. 이로써 한국 문제 토의를 끝냈다. (로즈벨트 대통령이 그렇게 장기간 신탁통치를 제의한 것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카이로 선언 때 이유를 설명했다. 카이로 선언에는 적당한 기간이 지나면 “In Due Course” 독립시켜준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간의 신탁통치 기간을 완곡하게 함축한 것이다.)

 

쏘련의 대일 참전 문제가 담겼기 때문에, 얄타회담 협정 문서는 회담 직후 즉시 발표되지 않아서 얄타 비밀협정으로 통칭(通稱) 되었고, 그 내용을 두고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했는데 1955년에와서야 미 국무부가 발표하였다. 그러나, 추측과는 달리, 한국관계 조항이 전혀 없으며, 참석자간의 비밀의정서에 정상간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이 트루만의 보좌관인 헤리 합킨스에게 한국의 4개국 신탁통치안을 준수하겠다고 말한 것이 이를 두고 하는 얘기로 이해할 수 있다.

 

얄타 회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 당시 전투 상보를 모르는 사람들이 국제 정치의 냉엄함을 모르고 지껄이는 것이다. 쏘련의 적군(Red Army)은 베를린에서 불과 50 마일 (80 km) 떨어진 오델 강변까지 진주한 상태이고, 발칸 반도를 휩쓸었으나, 영국과의 협정을 존중하여, 그리스는 비켜가서 영국이 점령하게 했다.

 

영국이 그리스를 나치로부터 지키기 위해 약 2만명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처칠이 모스코바에 가서 발칸 지역의 영향권 지분을 분배할 때, 스탈린이 영국의 희생을 인정해서,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굳혔다. 피의 댓가는 무서운 것이다. 미국이 아직까지 오끼나와에 미군을 주둔하고 있는 것은 전략적 위치도 한 가지 이유이겠지만, 오끼나와 상륙 작전에 미군의 피를 너무 흘린 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북한에 돌발 사태가 났을 경우에 한국군이 북한을 점령하면, 중국이 용인하리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공직의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들까지 있다고 하는데, 미군을 접경에 두지 않기 위해 수만, 아니 수십만 병력의 피를 흘리고, 더구나, 모 주석의 장남이 죽은 그 땅을 그냥 잡수시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임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4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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