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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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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과 반작용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07-01 (수) 23:46:27

 

우리 모두 중고교 시절 물리 시간에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는 뉴턴의 법칙을 배웠다.

 

이러한 작용/반작용은 물리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1953618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약 27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국내에서는 소위 영웅적 쾌거라는 칭송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즉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 엄청나게 일어났으나 이 박사와 그의 머슴들이 발표를 하지 않아서 60 여년이 지나도록 거의 모두가 모르고 있었다.

  

 

우선 왜 그분이 반공포로를 석방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분은 열렬한 통일주의자였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력으로 북진통일하자고 주장해왔다. 이미 68일 휴전 회담의 최대 쟁점이었든 포로 송환문제는 자유 송환 원칙으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휴전 조인이 오늘 내일로 예정되어 그분은 초조해졌으며, 또 한 가지 큰 이유는, 휴전 직전에 6월 공세를 펼친 중공군의 공세에 패해서 땅도 뺐기고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어 북진 통일을 되뇌던 자신의 체면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노회한 그는 반공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핵폭탄급 뉴스를 제공하여, 첫째 자신의 체면을 구길 중공군의 승전보를 깔아뭉개고, 둘째로는 휴전 회담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려고 양수겸장(兩手兼將)을 두었다. 는 평소에 언론 플레이를 잘 해왔기 때문에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여기까지는 작용 부분인데,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파장 (반작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미처 예상도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세계는 휴전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이 더 격화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미국과 중국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먼저, 미국측 반응을 살펴보자. 석방 소식을 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새로운 적(이승만 지칭)”이 나타났다고 대노하여, 이 박사 제거를 지시했다.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이 박사를 그 후로 곱게 보지 않게 되었다한국전을 빨리 종결짓겠다는 구호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어 휴전 교섭에 박차(拍車)를 가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 중공측의 반응을 살펴보자. 그들은 처음에는 한국과 유엔측이 야합해서 소위 '짜고 치는 고스톱'인줄 알고 유엔측을 맹비난했으나, 유엔군이 관할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탈출이 없었고, 이 박사 단독 행위였다고 해명하여 휴전 회담을 결렬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애써서 얻은 휴전 직전의 대승보가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큰 뉴스에 깔려서 햇빛을 못보게 되자, (중공군의 6월 공세 승리를 묻혀버린 승리라고도 표현한다.) 새로운 대공세를 계획해서 713 일 한국군 전담 지역인 중부 전선의 금성천 돌출부(Kumsung River Salient)에 대해 참전 후 최대의 포사격을 퍼부운 다음, 진격해 내려와 한국군에 전쟁 발발 이후 최대의 참패를 입혔다. 그 결과 아군은 돌출부를 상실했을 뿐만아니라, 일주일의 전투에서 약 3만 명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미국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서 인용, 별표 참조. 중국측에서는 61천명이라 주장)

 

7.13 공세에 대한 당시 유엔군 사령관 Clark 대장의 촌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내 생각으로는 중공군이 ( 7.13 최종) 공세를 벌인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군에게 한방 쥐어 박아서 코피가 터지게 만들어 북진이 말하듯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국과 전 세계에 알려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중공군의 6월 공세에 패한 사실을 숨기려다가 그보다 더 큰 7월 공세로 참패를 당한 이 대통령은 혹을 떼려다 하나 더 얻어 붙인 꼴이 됐다. 금성천 전투의 참패를 맛 본 이 박사는 미국의 후원 없는 독자 북진이 불가능한 점을 비싼 댓가를 치루고 깨달았기 때문에 휴전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마침내 727일 판문점에서 쌍방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조인식이 있었고 그날 밤 10시에 드디어 포성이 멈추고 31개월의 기나긴 전쟁이 형식상 끝을 맺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용단 덕분에, 이 땅에 평화가 오고,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비극만 있은 것이 아니라 온갖 희극도 벌어졌는데, 한 사단에 사단장이 2명씩이나 있게된 것도 그 하나이다. 그 이유는 공세가 시작되기 며칠전에 사단장 교체가 있어서, 새로온 사단장이 부대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받자, 구관이 명관이라고, 전임자들을 도로 불러서 다시 사단장으로 앉혔기 때문이다. 이승만만 물리학의 법칙을 몰랐는게 아니고, 그당시 우리 육군 수뇌부도 중공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못하고 사단장 교체를 했다니 조소(嘲笑)가 저절로 나온다.

 

또한, 소대장들의 손실이 하도 많아서, 교육도 채 끝나기전에 임관부터 시켜서 일선으로 보냈는데 많은 신임 소위들이 열차에서 없어져서 탈영 보고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들이 철로변쪽에 가까운 곳에 살던 소위들이 기차에서 뛰어 내려 고향집과 선산을 찾아가서 이제 가면 다시 못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고별 인사를 한 것이다. 이들은 다시 춘천으로 집결해서 다행히도 도중 탈락자는 없었다고 한다.

 

천안함 희생자가 50여명, 세월호 희생자가 300여명인데, 3만명이라면 얼마나 엄청난 숫자인가.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이 승만을 국부요,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인사들이 진실을 뭉개고 엉터리 소문만 과대 포장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자유 송환에 이미 열흘 전에 합의했기 때문에 미리 석방을 안했어도 휴전 조인 후에 절차에 따라 모두 석방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유엔군 관할 수용소 있었던 7,604명의 반공 포로들이 휴전 후에 남쪽으로 귀환, 석방되었다. 618일 석방 때 미군 통제하의 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61명이 사살 당하고 116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들만 억울하다 하겠다.

 

휴전 조인이 반공 포로 석방으로 약 5주간 지연(遲延)되는 바람에 미군도 약 5천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게 되어 이것은 이 박사가 쓸데없이 반공 포로를 석방해서 우리 (미국) 자제들을 희생시켰다고 발을 동동 굴렸다. 아이크는 이승만 박사의 통치 행태를 면밀히 살폈다. 야당 당수를 법살하고, 야당 탄압과 경향신문 폐간, 그리고, 국회에서 무술 경위를 동원하는 등 비민주적 행위가 빈번하고, 정사는 부인과 박찬일 비서에게 맡긴다는 정보를 받고, 마침내 1959년 여름에 비밀 특사로 이 박사와도 가까운 월터 저드 하원의원을 보냈다. ‘연만하시니 후계자를 양성해서 현직에서 물러나라고 권고하였지만 웃고 넘어 갔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으나, 외교 문서에 나오지 않아서 학자들도 모르고 있었는데, 필자가 외교관 회고담을 통해서 특사를 경무대로 안내한 미대사관 위리암 와츠의 증언에서 발굴했다.

 

결론적으로, 이박사는 반공 포로 석방으로 자충수(自充手)를 두어서 우리 장병 3만명을 도살장으로 몰았고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권좌에서 퇴출되어 하와이로 유배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반공포로 석방과 이 박사 실각을 연결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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