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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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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망명’ 논란 해부

한미 양국의 공식 입장과 진실(Facts)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6-05-28 (토) 13:58:55



                                    

4월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화장에 칩거(蟄居)했던 이승만 박사가 하야후 약 한달만에 김포 공항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났다는 경향신문의 단독 보도로 온 국민이 또 한번 놀라게 되었다.

 

이 박사 부부가 1960 529일 새벽 이화장을 나와서 김포 공항에 도착해서 소위 하와이 교포들이 성금으로 마련한 “CAT 전세 비행기”(4발 포로펠러) 를 타고 떠나는 것을 경향신문의 윤 양중 기자가 독점 취재하여 동사는 호외(號外)로 먼저 폭발적인 특보를 전하고, 석간 본판의 대부분을 이 박사 출국과 관련한 기사로 가득채웠다. 그런데, 톱 기사의 제목을 李 博士 夫妻 突然 하와이로 亡命으로 뽑아서 이 박사의 출국이 망명으로 포장되어 56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 사실인양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박사의 출국이 적어도 망명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출국 자체를 망명으로 지칭한 경향 신문 보도는 오보라고 강력히 항의하는 인사들이 출현하고 있다.

 

우선, 이 박사 부처는 대한민국의 김포 비행장을 통해 출국하셨고, 미국의 하와이에 도착하셨으니까, 출발국인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도착국인 미합중국 (줄여서 미국)의 공식 입장을 발표한 그대로 살펴보고, 또한 타고가신 소위 전세기CAT 비행기가 정말 전세기인지, 전세기 대금을 누가 지불했는지를 살펴보면, 정답은 안 나오드라도, 적어도 망명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들어난다.

 

당시 한국 정부는 허 정씨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Care-taker Government) 체제로 이 박사 출국의 한국측 주역인 허 정 수반이 손수 김포 비행장에 나와서 이 박사 부처를 전송하면서 현장에 나온 경향신문 취재 기자(윤 양중씨)에게 공보실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겠다고 하고, 이 박사 부처를 태운 비행기가 일본을 지난 무렵에 공보실에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대한민국 관보에 실렸겠으나 찾을 수 없어서 공항에서 기자에게 말하고 회고록에 실린 허정 수반의 기록으로 대체함) 許 首席박사부처가 休養次 하와이로 떠났다는 것을 공보실을 통하여 발표할 것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 발표 (필자가 기억하는 바)로는 하와이 교포들이 성금을 모아 전세기를 보내서 이박사 부처를 모셔 갔다고 하여서 온 국민이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다. 이 문구는 허 정 과도 정부가 대국민 PR 용으로 만들어서 배포하여 선전 효과 만점으로 지금까지 내려왔으니 대국민 홍보의 시금석으로 길이길이 영원토록 보존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한미 공조에 의한 합작품인 것이 뒤에 나오는 설명을 읽으면 이해하게 된다.

 

허 정 수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 박사 출국 (망명 또는 디른 용어도 쓸 수 있으나 중립적인 용어를 먼저 사용코져 한다.) 문제는 허 정 수반이 당시 미 대사와 미 8군 사령관 (유엔군 사령관 겸임) 과 업무 연락차 자주 만나서 협의하는데, 그 해 (1960) 516일 미국 대사관에서 매카나기 대사 및 매그루더 장군과 협의 도중 매카나기 대사가 자신의 비서를 물리고 매그루더 대장도 잠간 자리를 비키게 한다음에 허 수석에게 후란체스카 여사가 자신의 부인과 전화 통화도 하고 찾아도 와서, 요즘 이 박사 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하와이로 휴양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작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허 정 수석은 이 박사가 국내에 있음으로 해서, 첫째로는, 구 자유당의 일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모르고, 둘째로는, 불가피하게 열리게 될 혁명 재판에서 이 박사의 형편이 무척 불편할 것을 염려하던 중인데, “그럼 참 잘 되었읍니다하고 곧 찬성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바로, 미 대사에게 군용기를 내줄 수 있을지 문의하니까, 미 대사는 그것은 어려우나, 하와이에 있는 한인 교포들이 이미 전세 비행기를 얻어 놓았으니 그점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 대사는 한국 정부가 여권을 내어주면 곧 바로 입국 비자를 내주겠다는 함축성 있는말을 하고는 자리를 떳다.

 

이 박사 부처의 출국 발표 이후 주한 미대사관의 역활에 관해 묻는 질문에 대해 매카나기 대사는 잠정 사증을 발급했다고 만 말하고 그 이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필자는 하와이 교포가 성금을 모아 전세기를 미련해서 보냈다고 하는 발표가 허정 과도 정부가 지어낸 것으로 생각했으나, 허 수석의 회고담에 의하면, 메카나기 대사의 입을 통해 그도 처음 알게 된 것이므로, 전세기로 타이페이에서 와서 이 박사 부처(夫妻)를 태우고 하와이로 날아 간 CAT 항공사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 보면 어렴풋이 이 박사의 출국의 성격이 망명이 아니고, 추진 주체가 허 정권 (대한민국) 이 아니고 방조(幇助) 역할만 했다는 심증을 갖게 된다.

 

먼저, 경향신문사의 윤 기자가 전세기는 누가 주선했고, 비용이 얼마나 되느냐고, 이 박사 출국을 이화장에서부터 수행한 이 수영 외무 차관에게 비행장에서 문의하니까, 그는 비행기 대절은 당국 (한국/미국?) 에서 했으나, 요금은 본인들 (이 박사 부처/ 허와이 유지들?) 이 하와이 가서 내기로 해서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한국에서 아무리 따져봐도 망명이란 용어 선정이 잘못됐다고 보는 분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에도 전 월간 조선 기자로 일했던 이 동욱씨가 이문제를 철저히 파헤쳐 보니까, 이 승만 박사는 잠간 전지 휴양만하고 늦어도 2~3 개월안에 돌아갈 심산이었지, 돌아가실 때까지 고국에 못돌아 갈 것으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했고, 하와이 교포들이 성금을 모집해서 전세기를 보냈는지를 오 중정 당시 하와이 총영사에게 문의한 결과 (성금 모집 책임자로 알려진 최 백렬씨는 이미 작고했음) 전세기 성금을 모집하지 않은 것이 확인 되었다. 그러므로, 성금을 모으지 않았으니까 하와이 교포들이 전세기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그래도, 김포 공항에 전세기(?) 라는 414CAT 여객기가 날아와서, 노부부를 태우고 하와이로 날아 갔다.

 

그러면, 전세기 대금은 누가 물고, CAT 항공사의 정체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Google에 들어가서 CAT 를 입력하면 당장 그 정체를 알 수 있는데 이 동욱 씨는 왜 그 점을 간과했는지, 또는 알고도 그 점을 부각하지 못했는지 자못 궁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필자가 미국 외교관 회고 회견기에서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 부대사였던 마샬 그린(Marshall Green) 씨의 회고담에 서 찾아냈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이 박사를 CIA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고 기록했다. 구글에서 찾아 보면 그 당시 미국 CIACAT라는 위장 항공사를 만들어서 대만의 타이페이에 본사를 두고 동남아에서 각종 비밀 공작 활동을 하였고, 그의 연장선에서 이 박사 부처를 하와이로 모셔간 것이다.

 

그린 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박사가 권좌에서 쉽사리 물러 난 것은 이미 전 해 (1959) 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박사와 절친한 월터 져드 하원의원을 비밀 특사로 보내서 젊은이에게 자리를 물려줄 것을 종용했으나 그 당시엔 씩 웃고 넘겼지만, 3.15 부정 선거와 4.19학생 의거 때 발포 명령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게엄령(戒嚴令)으로 군대까지 동원했으나, 유엔군 사령관의 명에 의하여 발포를 못하고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상황에서 더 비빌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 권좌에서 물러 났으나, 이 박사가 이화장에 있으면서 자유당 세력과 손잡고 권토중래를 꾀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이 박사를 대한민국 땅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여 허 정 수반을 설득하여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전세기로 휴양차 떠났다는 대 국민용 PR을 하였고, 경향 신문이 망명이라 대서특필하여 온 국민이 다 그렇게 믿어 왔으나, 본인의 의사로 떠난 것이 아니므로 망명이라는 용어는 성립이 되지 않고, 타의로 나간 것이니까, 유폐(幽閉)라고 부를만 하지만,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행하지 않았으므로 적당치 않고, 어쩌면, 법률적으로 보면 위계에 의한 납치라 볼 수 있다.

 

그린씨가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화장에 계시든 이 박사가 피뢰침(Lightning Rod)<*** 각주 NO. 1>과 같아서 아직 이 박사 치하시와 같은 구 제도와 인사 (: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 박사가 원한다면 다시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다고 보았고, 사실 많은 구세력이 이화장으로 문안 인사를 내세워 찾아 드나드는 것이 목도(目睹) 되었기 때문에 이 박사를 국외로 내보내게 된 것이다.

      

끝으로, 미국 국무부는 이 박사 출국과 관련된 사항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525 일 프란체스카 이() 여사가 매카나기 대사 부인을 방문하여 이 박사와 자신을 하와이로 데려갈 군용기를 매카나기 대사가 주선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녀는 남편인 이 박사의 친우들과 종전의 수하 정치인들이 이 박사가 다시 정계로 나서라는 (재집권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이와 같은 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설명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다음날 (526) 허 정 과도 정부 수반과 만나서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허 수반은 이 박사가 조속히 한국 땅에서 출국하는 것이 절박한 요망 사항인데, 그의 국내 잔류는 한국의 정국에 불안 요소가 되며, 사태를 혼란시킨다고 부연했다. 이에 매카나기 대사는 미국 정부가 (한국민들 눈에) 이 박사가 한국 법이나 사법 절차를 기피하도록 협조해준다고 비치는 상황은 피하고져한다고 허 수반에게 설명했다. 허 수반은 이 박사 출국과 관련해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정부 (한국 정부) 가 모든 책임을 감당한다고 답했다. (그러므로 허 수석은 매카나기 대사에게 그점을 염려 마시고 신속히 추진하라는 언질을 준 것이다. : 필자 주석)

“(미국) 국무부는 매카나기 대사가 허 수반과의 협의에서 취한 입장을 526일 승인하였고, 이 박사가 하와이에 오도록 조처하고 사증을 발급할 용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적 교통 (항공) 편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이 박사 부처는 서울 교외의 김포 비행장에서 전세기 편으로 529일 일요일 출국하여 하와이의 호노룰루에 당일 현지시간 오후에 도착하였다. “ (날짜 변경선 때문에 20 여시간넘도록 비행했으나, 출발 날짜와 도착 날짜가 같다. : 필자 주석)

 

*** 출처: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8/d319

문서 번호319 편자 각주 ( Editorial Note)

 

허 수반의 회고록과 미 국무부의 기록을 비교하면 허 수반의 회견 날짜 기록이 10일 앞선다. , 국무부 기록은 그 당시에 바로 썼기 때문에 그쪽이 정확하다고 하겠으며, 허 수석은 사건이 있은 훨씬 뒤에 기록해서 날짜 기억이 희미했겠고, 또 달리 보면 허 수반이 26일 매카나기 대사의 통보를 받고 허둥지둥했다는 점을 감추려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국무부 기록은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자청해서 출국 편의를 요청한 것으로 나오고 미국 정부가 이 박사의 사법 면제 시키려하는 인상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워서, 군용기 (또는 다른 관용기) 제공을 거부하며 전세기로 위장했으나, 그것 (전세기 자체) 이 사실상 CIA 비행기였다는 것을 필자가 최초로 발굴해서 발표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이 박사의 재기 움직임의 싹을 자르려고 했고, 허정 수석은 이 박사가 행여 혁명 재판에 세워져 고초를 당할까 염려해서 양측의 이해가 맞떨어져 이 박사의 출국이 성사하게되었다. 애초에 허 수석은 각료들도 모르게 이 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발표하려고 일요일 새벽에 그의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획책했으나, 경향신문 윤 기자가 현장에 와서 이 박사와 대담도하고 사진 기자가 전송 장면을 일일히 찍었기 때문에 출발 당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향신문 호외로 처음 소식에 접하고 이어서 공보실에서 까지 발표하자, 이박사 부처가 출국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국민들은 그에 대한 친소 관계에 따라, 잘 나갔다는 분들과, 앞으로 있을 혁명 재판을 피해 야반도주 한 것으로 허 정 과도 정부를 맹 비난했는데, 그 다음날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 발언을 보면 갈라진 견해를 볼 수 있다.

 

530일 국회에서 허 정 수석에게 이 박사출국에 대한 책임추궁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양 일동 의원이 허 수석에게 출국 경위를 따지자, 허 수석은 어쩔 수 없었다면서, 이 박사가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차 나간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주었으며, 일면 이 박사의 이한 (한국에서 떠나감) 은 오히려 시국 수습에 도움이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가 설명을 마치고 하단하자 곽 상훈 의장등 몇몇 간부들이 영감 잘 보냈오라며 허정을 두둔해 줬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허정 과도 정부에 대해 이 박사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혀 내도록 촉구하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대한 인책 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성명을 발표하여 허 정부를 비난했다.

 

한편 이 박사의 최측근이었든 윤 치영, 장택상등은 허 정 수석이 매카나기 미 대사와 음모를 꾸며 이 승만을 해외로 출국시켰다고 성토했다. 이를 보면, 상당히 식견 높고, 고급 정보에 정통한 분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박사 출국이 한미 공조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끝으로, 이 박사 당신은 출국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가 궁금한데, 그는 경호 담당자인 우 석근 씨에게, (그 당시 한국을 방문키로 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다음에 (하와이에서) 돌아 오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이 박사가 아이젠하워를 피하려했을까? 누구보다도 이 박사 자신이 아이크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 전 해 (1959)에 이미 비밀 특사 (월터 져드 하원의원) 를 보내서 하야를 종용했고, 4.19가 나자 미 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을 보내서 퇴임할 것을 강권하였으며, 퇴임후 아이크가 보낸 친서에 침을 뱉어서 땅에다 내동댕이 친 것을 편지를 가져다 준 와츠 서기관이 보아서 이미 본국에 보고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와 대면하기가 민망스러울 것이므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자신을 한국에서 몰아 내려는계획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진되어 한번 나가면 영영 못 돌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박사의 출국 케이스는 후에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 축출과 거의 궤를 같이한다. 미국은 피원조국 또는 동맹국일지라도, 비민주적 독재와 부패, 축재등으로 당사국 국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지탄을 받게 되면, 미국 국가 위신이 손상되므로 비난 받는 위정자들을 실각시키거나 체포, 유배 시키는데, 불행하게도 이 박사도 이런 꼴을 당했다. 꼭 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임오군란 진압차 출병한 청군은 조선조의 말썽꾼으로 여긴 흥선 대원군 이 하응을 군함(위원호) 편으로 청 나라에 압송하고(1882년) 약 4 년 후에 풀어준 일이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참고 자료:

http://cfe.org/aFiles/2016/mn201411051_1458114389.pdf 오보와 역사 - 이승만 맘명 기사의 허구

http://wildkim.tistory.com/496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한 적이 없다

*** 문서3191960 525일부터 29일 사이 미 대사관과 국무부간의 통신문 요약정리

*** 각주 NO. 1: 마치 피뢰침이 하늘에 떠도는 구름에서 나오는 전기 기운 (벼락 등) 을 빨아들이듯이 이화장의 이박사에게 자신의 추종 세력들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몰려 들어온다는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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