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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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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애틀리선언 65주년 <上>

“핵사용도 가능 세계 화들짝”…3차대전 비화 막아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2-12 (토) 10:50:10

 

착각은 자유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한국 전쟁에서만큼 그 말이 딱 들어 맞는 경우가 드물 것 같다.

착각 제1: 우리가 쳐들어가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착각 제2: 우리가 38 선을 넘어가도 중공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 든 예의 착각(錯覺)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는 필자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잘 아실 것이다. 그 착각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조국의 분단 상태는 70년이 훌딱 넘었다.

 

일본의 항복 후에 38 선으로 분단된 것은 그 단초가 얄타 밀약이라는 것은 다 잘 알고 있으나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 짓고 분단 상태가 70 년이 이미 넘었으나, 그 상황이 적어도 앞으로 100 여년은 더 지속될 것 같은데, 그러한 테두리를 잡게된 정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결론부터 내리면우리는 트루만 애틀리 공동 성명” (1950 12 8 )과 관련 어록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1950 9 15 일 에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928 일 서울을 탈환하여, 일격에 전세를 반전시킨 맥아더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곧장 우선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중공이 유엔군(한국군 제외)38선을 넘을 경우에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발하여서, 미국 정부내에서 잠간 주춤하며 내부 검토에 들어갔으나, 중공이 건국한지 채 일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한국전에 개입할 계제(階梯)가 못되고, 허풍스런 공갈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하며 10938선을 넘었고, 국군은 이에 앞서 101일 이미 38 선을 넘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다.

 

그 때 38선을 넘는 것에 반대한 사람은 전 국무부의 정책 기획 국장이었던 조지 케넌 딱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는 38 선에서 멈추면 전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 회복으로 유엔 결의안을 충족시켜서 미국의 당시 대소 봉쇄 정책에도 합치되어서 좋으나, 만일 38 선을 넘어가면 롤백 작전에 들어가는데 북한이 북서쪽으로 중국과 경계를 맞대고, 북동쪽 끝으로 쏘련과 접경하여 반드시, 중공이나 쏘련의 개입을 초래하므로, 자칫 한반도로 끝내야 할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불과 한달이 채 되기 전에 그 당시 외로운 반론객이었던 케넌의 충고가 현실로 등장하였다.

 

맥아더에게 북한 진군을 허락한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어딘가 찝찝한 감을 억제할 수 없어서, 극동 정세를 논하고 싶으니 본국에 들어오라고 했으나, 전선을 지휘하는 현지 사령관으로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하여 그의 편의를 도모하는 뜻에서 1015일 태평양상의 외딴 섬인 웨이크 아일랜드(Wake Island)까지 날아갔다. 한국전, 일본 강화 회담등 극동 정세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거의 마지막 쯤에, 중공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 보았더니, 맥아더 장군도 그들이 감히 개입할 가능성이 낮지만 만일 개입한다면 우리 공군의 밥이 될 따름이라고 별일 대답하자 그에게 다섯번째 공로 훈장을 달아주고 이제 다리 죽 뻗고 잠 잘 수 있겠다고 흡족한 마음으로 워싱턴으로 귀환하였다.

 

헛발짓만 해댄 맥아더

 

맥아더 장군은 마술사가 손짓으로 여러 가지 묘기를 보여 주는 것처럼, 몇 가지를 더 보여 주려다, 헛발짓만 하였다. 1019일 쉽게 적도 평양을 수중에 넣은 맥아더는 달아나는 북한 정권 지도부를 몽땅 사로잡겠다고 공정 부대(空挺部隊)를 투하하였으나, 헛탕을 쳤고, 더 웃기는 것은 인천 상륙을 동해안에서 재탕을 한답시고 10군단을 배에 태워 원산 상륙을 시도했는데, 그 때에는 한국군이 이미 원산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원산항은 온통 기뢰(機雷) 가 쫙 깔려서 기뢰제거 작업에 일본의 해상 자위대 병력을 활용하였고, 기뢰 폭발로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제거 기간 동안 장병들을 태운 함정들이 동해안을 오르락 내리락해서 본의아니게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되었고, 기뢰가 제거되어 입항했기 때문에 이를 적진 상륙이라 부를 수 없어서 아주 큰 우스개거리가 되었다. 이상은 희극류 단막극을 본 셈이라 괜찮다 하겠으나, 그 뒤에도 맥아더의 비극의 연출이 계속된다.

 

트루만 대통령에게 중공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안심시킨지 불과 나흘째 되는 날 (19501019) 중공은 그들의 군대를 인민 지원군이란 명칭을 붙여서 압록강을 넘어 왔다. 중공군은 야간에만 행군하고 낮에는 산간 지역에 야영(野營)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개입한 것을 몰랐다고 맥아더 사령부가 둘러대는데, 이는 맥아더가 실제론 중공과 일전을 계획한 것을 숨기려한 것이다. (자료를 보면, 야간에 이동하는 트럭 숫자도 나오고, 만주에 쌍발 폭격기가 200 대 있다는 등의 전세를 파악하고 있는데 미군이 중공군 개입전에는 모두 휴가 갔다는 말인가?)

 

그들이 압록강을 넘은지 불과 엿새가 되는 10 25일중공군은 화력이 미군에 비해 약한 한국군을 포위해서 큰 타격을 입히고(온정 전투), 11 1 일엔 미제8 기병 연대를 북, 북서, 그리고 서쪽 등 세 갈래 공격을 퍼부어 물러나게 했다. (운산 전투: 이날이 미군과 중공군이 최초로 조우한 날) 그래서 일단 유엔군은 청천강 남방으로 물러나 숨을 고루었다. 이를 제 일차 전역이라 부르는데 승세에도 불구하고 더 추격하지 않고, 홀연히 잠적해버려서 유엔군의 정세 파악에 더 큰 혼동을 가져왔다.

 

유엔군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 포로를 노획하고 심문한 결과를 보고 했으나, 소규모의 부대가 압록강 남안에 있는 수풍 발전소 방위를 위해 파병된 줄로 규모와 목적을 오판하여서, 11 월 중에 보급을 받고 (미국) 추수감사절에 특식으로 명절치레를 한다음 크리스마스엔 귀향한다며 연내에 한국전을 끝낼 계획으로 맥아더는 진군 명령을 내렸다. (Home-by Christmas Offensive: 19501124) 첫날엔 아무런 접촉이 없었으나, 다음날 저녁에 서부 전선 우측면으로 진군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혀서 심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기록이 다 소실(燒失)되어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선엽 장군 증언에 따르면, 군단 자체가 해체되었다고 하니 대충 감이 잡힌다 하겠다.

 

미군 보병 제 2사단도 중공군의 반격에 후퇴하는데, 군우리에서 순천 사이 약 10Km 산골 길로 후퇴하는 동안 양쪽 산 중턱에 포진한 중공군의 기관포와 박격포 공격에 트럭 등 중장비가 움직이지 못해 모두 도보로 뛰어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죽은 병사가 4 천명이고 포로가 3 천명에 달했다 한다. 미군은 그 계곡을 죽음의 계곡 (Death Valley) 또는 인디안 태형 길 (Gauntlet)”이라 부른다. 2 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후에 지휘 책임을 물어 직위 해제 되었다.

 

애치슨 국무 장관은 이 패배를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이 남군에 패한 불 런(bull Run) 전투 이후 최대의 참패라고 지적했다. 최초에 들어온 중공군은 군인 일인당 소총도 한 자루씩 가지지 못하고 전위병은 막대기 수류탄을 던지는 수류탄 투척병들이었고, 화기도 고작 들고 움직일 수 있는 기관총과 박격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형을 잘 활용하여. 기습, 우회 침투, 야습, 후방 교란, V (八字) 큰 자루 포위 작전을 사용하였고, 특히 척후병(斥候兵)들의 우수한 지경선 (부대 단위 경계선) 파악 능력으로 적 주공과 맞 부닥치지 않고 지경선 쪽으로 파고 들어 왔다.

 

최신 장비를 갖춘 미군이 19 세기식 중공군에게 어이없게 당한 것은 맥아더가 적을 너무 깔본 까닭이라 하겠다. 그 이유로는 아주 쉬운 3단론법을 적용하여, 중국군(국부군)이 일본군보다 약했고, 일본군이 미군보다 약했으니까, 응당 중공군이 미군보다 약하다고 미리 단정하고 어떤 대비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다 당한 것이다.

 

맥아더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8군 사령관 워커 중장과 10 군단장 아몬드소장을 동경으로 불러 그들로부터 전선 상황을 직접 브리핑을 받은 다음 일단 8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하도록 결정했다. (1950 1129)

 

 

 

트루만 대통령의 핵공갈

 

한국전의 비극적 소식이 미 본국의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한국전에 유엔 경찰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되자 트루만 대통령은 국면을 전환 시킬 목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19501130) 앞으로의 한국전 수행 계획을 설명하는 가운데, 중공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 무기고에 있는 모든 병기를 모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하자 기자 한명이 그러면, 원자탄도 포함되느냐고 묻자, 트루만은 다시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고 되풀이 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핵사용 고려라는 가히 핵폭탄급 발언이 나오자 핵사용은 당장은 고려 않는다는 국무부 해명에도 불구하고 전선 사령관이 결정한다는 내용이 대서특필(大書特筆)됐다. 아세아인들 (일본인) 들에게 핵을 두번이나 사용한 장본인인 트루만이 또 다시 아시안 (중국인 및 북한인들)에게 핵 폭탄을 사용하려는 것은 미국의 인종 차별 관념의 표시라고 비난속에 핵사용은 현재 국지전에 멈추고 있는 한국전이 전면 세계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서구 국가들의 우려가 일었다. 프랑스의 르네 플레빙 수상이 영국으로 날아와 서구에 세계대전이 번지면, 유럽 국가들이 단숨에 쏘련 T-34 탱크의 트랙에 짓밟히고, 영국도 재래무기의 포격과 폭격권에 들어가서 안전 할 수 없으니 애틀리 수상이 유럽을 대표해서 미국에 항의할 것을 권고 받았다. 여당인 노동당 하원의원 100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받고, 맥아더가 원자탄 사용권을 휘두른다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므로 이를 트루만 대통령과 따져서 원자탄 사용을 막겠다고 의회에서 선언하고 워싱턴을 향해 날아가 1950124일 도착하여 당일 제 1차 회담을 시작하고 닷새 동안 6 차례 회담을 통해 합의 사항을 공동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공동 성명에 문자로 옮긴 것도 중요하지만, 명문화하지 않은 것도 역시 중요한 사항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의 장래에 미치고 있는 사항을 설명하려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회담 준비상황에 관한 기록과 6차에 걸친 회담 회의록, 공동 성명 전문, 본 회담외에 정상을 제외한 대표간 회동 내역, 그리고, 이 회담 평가 저술서까지 샅샅이 두루 살펴 보았다.)

 

1. 한국전을 국지화함. 공동 성명에 없으나, 회담록 전체 분위기가 이점을 중심으로 논의 하였고, 실제로 중국 본토나 쏘련으로 전쟁이 비화하지 않았다.

 

2. 유럽 우선주의 확인함. 역시 명문은 없으나, NATO 군 총사령관을 조속히 임명하겠다고 성명에 삽입시키고, 아이젠하워 원수를 1219일에 임명하였다.

 

3. 한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방침 포기함. 역시 명문화하지 않았으나, 평화적 또는 교섭을 통한다고 명문화해서, 무력 통일 방침을 포기함.

 

4. 중국으로 전선 확대 하지 않음. 애틀리 방미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 중의 하나로 이미 중공을 승인한 영국으로서 만일 전선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면 당장 홍콩을 잃게 될 위험이 있고 말레이등 영국의 이해 당사지역에 불똥이 튈까 염려했다.

 

 

Secret Momo on ABomb  by Jessup   usukconsult-1_001.jpg

 


5. 핵사용 필요시에 영국과 상의한다. 성명 문안에는 미국이 핵사용 필요 상황이 발생하면 영국에 항상 통보해 주겠다 (Keep at all times informed) 라고 적시되어 있으나, 트루만 대통령이 애틀리 수상과 개별 대담시 미국과 영국은 핵문제에 관해서 동반자이고 영국과 사전 상의 없이 (Without Consultation) 원자탄 사용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었고, 이를 명문화 하자는 애틀리의 요구에 대해서 명문화는 할 수 없고, 만일 제 말이 의미가 없다고 보신다면 문서화 한다고 더 나으라는 법이 없지 않냐고 답해서 애틀리 수상이 트루만의 언질에대해서 감사를 표했다는 내용이 제섭 (Jessup) 특임 대사 (Ambassador at Large)가 기록한 두분의 대화록에 있다. (Memorandum for the Record by Ambassador at Large (Jessup) Washington December 7, 1950)

또한, 애틀리 수상이 본국에 귀환해서 하원에서 트루만이 언급한 이 부분을 낭독하면서 트루만과의 회담 결과에 흡족하다고 말했다. 처칠 전 수상도 회담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6. 유엔군의 파병 목표는 침략자의 격퇴이지 한국의 통일이 아님을 확인함. 이점은 당시 회담에 참석한 맥그래스(McGrath) 미국 법무 장관이 성명 초안을 다루면서 제기한 것을 트루만 대통령과 애틀리 수상이 동의하고, 또한 다른 문건에서 미국의 유엔 대사인 오스틴(Austin) 도 이와 똑 같은 문안을 사용하여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무력 통일 소리가 그 때부터 싹 들어갔다. 이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무력 통일이라는 부담으로부터 무거운 짐을 놓게 되어 그 부분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감을 확인했다.

 

7. 한국 전쟁을 유엔군의 힘의 강세에서 휴전 교섭(交涉)을 시작한다. 이 양자 회담에서 결정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 조항으로서, 그 당시 유엔 회원국들 간에 당장 휴전을 추진하자는 움직이 많았으나, 그 때 휴전 논의를 하게 되면, 그 당시 유엔군 (미군)이 군사적으로 퇴패해서 약체이므로 중공 측에 휴전을 요구하면 중공측에서 믾은 것을 요구하게 되므로 후에 유엔군쪽의 전세가 유리할 때 휴전 교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미국 측에서 내다 보았다. 그 당시 주미 대사관에 근무 했든 한표욱씨는 그해 1025일 중공군이 첫 전투를 치룬지 채 두 달도 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참전 우방의 압력과 확전 및 장기전에 대한 국내의 우려등으로 휴전을 논의하게 된 것이라 평했다.

 

그리고 당시 주미대사 장면 박사가 국무부로 찾아가서 38 선으로 휴전을 할까봐 염려하는 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38선을 휴전 경계선으로 하는데 반대 입장을 표했는데 그를 맞은 극동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씨는 38선으로 휴전하는 것이 싫다면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전원 철수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그점에 대해서 훈령(訓令)이 없어서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만 보아도 약소국의 입장은 비참하다는 감을 느꼈다.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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