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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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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영웅이 아니라 패장 <下> 트루만이 해임한 진짜이유

맥아더, 한국무력통일 이승만에 약속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1-22 (일) 12:47:06

 

중공군 개입과 미군의 참패에 우려하는 미국민들의 우려를 종식시키기 위해 트루만 대통령이 1130일 기자 회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미국의 모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럼, 원자탄 사용도 포함되냐'는 한 기자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전이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까봐 유럽이 발칵 뒤집어져서 애틀리 영국 수상이 유럽 국가의 대표격으로 워싱턴에 급히 날아가서 (1950124) 트루만과 닷새 동안 회담한 결과 다음과 같은 중요한 합의를 보았다 (128).

 

첫째 : 한국전을 국지전으로 제한한다.

둘째: 아시아보다 유럽의 방위를 우선한다. (Europe First).

셋째: 한국 무력 통일 방침을 포기한다.

넷째: 군사적 강세에서 무력 사용 정지(휴전)을 달성한다.

 

여기서 합의된 사항들이 그대로 지켜져서 한국전이 제 3차대전으로 확대 되는 것을 막았고, 여기에 반발한 맥아더가 파면당하며, 한국에서 휴전이 성립되어 전투가 중단되었지만 통일은 요원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찮게 생각한 중공의 개입으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어떻게 보면, 얄타회담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결정이라 하겠다.

 

리지웨이가 서울을 재탈환하자 트루만 휴전 제의 시도

 

다행히도 워커 중장의 사고사 후에 새로 취임한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이 거의 38도선까지 수복되었기 때문에 트루만 대통령은 그 선에서 휴전을 성립하고 싶어서 휴전제의를 공표할 의향으로 1951319일 각군 참모총장들과 애치슨 국무장관 및 마샬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국무부가 마련한 선언문 초안을 검토하게 했다. 합참은 이를 맥아더 장군에게 통보했다.

  

 

이 전문을 통해 맥아더 장군은 미국 정부가 휴전을 추구하며, 동맹국의 반향(反響)을 살피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이 방송을 통해 중공에 평화를 제의하며 일련의 화해 조치를 취한다고 판단했다. 자신에 의해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만 바라온 맥아더에게는 휴전이라는 것은 패배와 마찬가지요, 명예실추로 생각했기에,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맥아더 장군은 3일후(324, Tokyo Time)에 본국의 누구와도 상의함이 없이 그 자신의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은 최고위 상관의 권위와 자신이 복무하는 국가의 정립된 정책을 야전군 사령관 역사상 가장 뻔뻔스럽게 도전하는 예가 되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권위를 침해했을 뿐더러, 중공에 대해서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最後通牒)을 통고했다.

 

또한 맥아더는 자신의 통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 중국 해안과 내지의 군사기지까지 전선을 확대하겠다고 말해서 사실상 국부군의 본토 침공을 후원하고 만주 등 중공의 국내기지 공격에 나서겠다고 협박을 했다. 이로써, 트루만의 평화 제의 노력은 무위로 끝나게 돠었다. 맥아더의 성명을 듣고, 트루만 대통령은 책상을 치면서 이것은 명백한 배신행위(Treachery)라고 소리치면서, 맥아더 해임을 결심했다.

 

맥아더 장군이 트루만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휴전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중국에 최후 통첩을 내보내는 행위는 군 통수권자로서 맥아더 장군의 오만한 행태를 더 두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명목상 직속상관인 합참과 맥아더 사이에 오고간 서신들을 모아 파일을 만들어서, 애치슨 국무장관, 마샬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 해리만 특별고문을 백악관에 불러서 그들에게 파일을 주어 열람(閱覽)하게 하고 다음날 그들과 다시 회합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다시 모인 그들은 모두 맥아더 해임에 찬동했으며, 해리만 고문은 맥아더를 2년전에 벌써 해임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대일문제 상의를 위해 맥아더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구실을 붙여 거부했음) 그러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45일 공화당 하원 원내 총무 마틴 의원이 맥아더 장군이 보낸 편지를 의회에서 낭독했는데, 자신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었다. 그 편지에서 맥아더 장군은 국부군을 이용하여 제2전선을 펴야하고, 한국전에서 승리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했는데,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이 해임의 제일 중요한 사유로 꼽히지만, 그동안 트루만 대통령이 휴전 제의를 고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틴 의원에 보낸 편지가 주 원인처럼 알려졌을 뿐이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자진 사퇴의 명분을 주지 않겠다면서 그 개xx(SOB) 에게 사표를 낼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내가 그의 목을 짤라(파면시켜)야 한다고부관 조지 엘시에게 단호히 말했다. 혹시 회의내역이 미리 새어 나가서 맥아더가 먼저 사표를 낼까 염려 되어서, 기자 회견을 밤늦게 열어서 그의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1951411일 새벽 1 )

 

트루만 대통령이 내세운 파면 사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정한 대외정책과 한국전 수행지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고 (Insubordination), 둘째, 차제에 군의 통수권은 문민 우선인 전통을 제대로 살리며, 셋째, 한국전을 국지화하여 (맥아더가 저지를지 모르는) 3차 대전으로의 비화(飛火)를 막으려 했다.

왜 맥아더는 중국으로의 확전에 그토록 안간힘을 썼을까?

 

대부분의 맥아더 연구가들은 맥아더가 중공과 중공군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과소평가), 중공군 포로가 잡혔는데도,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아니고, 중국에 있든 조선족을 북한에 들려보낸 정도로 오판했다고 지금까지 믿어 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손자 병볍 101” 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지피지기를 안해서 당한 것이다.

 

오랫 동안, 필리핀 생활을 하고 또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왕을 자기 밑에 두고 필요할 때 마다 오라고 부르든 습성 탓으로 자신을 '동양의 시저'로 자처하여서 한국전이 나자, 이제가 제 때라고 생각해서 명실상부한 동양의 시저로 발돋움하려 했다. 한국 대통령인 이승만도 자기가 밀어서 된 터이고, 본토에서 쫒겨나 대만에 와서 칩거한 외로운 장개석을 도와서 본토 수복을 성공시키면 그의 위세가 적어도 동양에서는 그 옛날 시저가 부러워할 정도가 되리라는 환상에 잡혔다.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맥아더 장군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 수복이었다. 즉 그는 19507월 말에 대만 방문시에, 장개석에게 약속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렇게 애달프게 힘썼다 하겠다.

 

또한 맥아더는 이 박사에게 약속한 한국 통일을 위해 정부의 거듭된 훈령도 무시하고 무력 통일을 꾀했다. 심지어 1951315일 휴 베일리 UP 통신사의 사장이 요청한 서면 질의서에 답하면서, “우리의 목표는 한국의 통일이다라고 답한 것이 NYT를 위시해 미국내 거의 모든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그가 중공군 개입을 위한 중국내 군사 이동 등 정보가 없었다, 또는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국 CIA도 정보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국부군의 본토내 정보 조직이 상당히 활발했고, 중공군의 이동 상황은 쉽게 감청(監聽)해 그 내역을 맥아더 사령부에 수시로 보고 되었는데, 오직 모른척 했을 뿐이었다 (별첨 감청보고서 배포처 참조)

 

또 한가지 중요한 증거는 전직 3군 총사령관으로 이 박사와 가까왔던 정일권 장군 (후에 총리로도 재직함)이 자신의 회고록에 이 박사와 맥아더가 서신으로 웨이크 섬에서 트루만과 회담시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낮추자고 이 박사가 제의하고 맥아더가 그에 동의했다는 친필 서한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정 총리가 근거 없는 얘기를 남겼다고 볼 수 없고, 이는 맥아더가 한국의 무력 통일을 이 박사에 약속하고 장 총통에게 본토 수복을 약속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미국 (합참)이 한국의 무력 통일 포기사실을 맥아더에게 통보(19501229)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점을 상기시켰는데도, 그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언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 장군이 마치 한 나라의 원수(a head of a state)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미 합참의 세계정세 판단과 충돌

 

미국 정부와 군부는 전통적으로 유럽 우선 정책을 견지해왔는데,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 보내는 1229일 자 지침서에서, “우리들은 한국이 주요 전쟁을 치룰 장소가 아니라고 믿는다라고 지적하면서, 확전을 바라지 않고, 필요하면, 일본으로의 철군까지 예상한다고 적었다.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의 지시를 어겨서 파면당해 본국에 소환되었으나,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뉴욕 맨하탄에서 5백여만명이 마중한 티커 테입 환영 등).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전쟁에서 승리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자기 주장을 폈으나, 바로 그에게 갈채를 보낸 의회에서 증언하러 나온, 합찹 의장 브래들리 장군은, 지금 치루고 있는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즉 미국은 유럽 (장소) 에서, 더 적절한 시기에, 쏘련을 상대로 (주적) 해서 큰 싸움을 치뤄야지 현재처럼, 한반도에서 중국과 싸움을 치루는 것은 시기, 장소, 주적이 다 잘못 선택된 전쟁이므로 제한전으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로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의 결정이 올았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서 맥아더는 입을 다물었고, 세간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져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본국 미국에서조차 이미 오만방자하고, 자신의 판단착오로 만여명이 넘는 부하들의 인명 피해를 낸 패장이요,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을 어기며, 자신의 위신을 새우려고, 중국과 대결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진격하다가 소총도 한자루씩 가지지 못한 중공군의 반격에 일대 참패를 당하고, 자신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구겨진 체면을 살리기 위해 확전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자탄을 사용하여 제 3차대전을 일으킬 뻔한 용렬한 퇴물로 치부되었으며, 우리들의 삼천리 강토를 핵(코발트탄) 방사능 오염지대로 만들려고 획책한 장본인(張本人)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를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420 여년전 조선을 구하러 온 명장 이여송 이상으로 아직도 받들고 있다.

맥아더의 파면과 본국 호출을 당한 것을 보고, 국부 이승만 박사는 그 분 (맥아더 장군)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줬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큰 빽이 나둥그러졌기 때문이다.

 

맥아더 인품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보태자면, 그는 필리핀 정부 (케손 대통령)가 주는 돈 50만 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챙겼다. (이것은 일종의 뇌물이다. 1942년 초: 묻혀있든 사실을 역사가 캐롤 페티요가 1979년에 발표함). 그 후에 아이젠하워 장군에게도 동종의 제의가 있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통령이 될 사람과 아닌 사람은 여기서 확연히 판가름이 난다.

 

중공군의 승리 요인과 맥아더 장군의 참패 원인

 

중공의 참전 초기 작전 승리 요인을 꼽으면, 기습, 침투, 야습, 우세한 척후 능력(적의 지경선을 귀신같이 파악해서 그리로 침투케 함). 우수한 전술로는 8()자형 포진(V자형) : 적이 앞이 뚫린 큰 자루 속으로 들어오게 그물망을 치고 있다가 완전히 그물(함정) 속에 들어오면 벌려진 입구를 막아서 적군을 전후 좌우로 완전히 포위하여 퇴로도 막아서 꼼짝 못하게 하여 전멸시키는 전술로 겁 없이 산골길로 북진하든 미군과 국군이 많은 참화(慘禍)를 당했다.

 

그리고, 야간 행군과 주간 은폐로, 중공군의 개입을 감췄다고하나, 대낮에 행군하는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미 공군이나, 정보기관에서 몰랐다는 것은 허구이고, 맥아더와 그의 정보 참모가 중공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또는 묵살했음이 틀림없다.

 

맥아더의 실책은 첫째, 중국과 한국(남북 포함)의 역사적 관계를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그가 순치지간이란 어려운 문자를 알 도리가 없겠지만, 중국은 두 번이나 한국 문제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다. 명조 때 왜적을 맞아 싸웠고, 청 말에 일본국과 제1차 중일전쟁을 치뤘다. 미국이 일본 방어를 위해 한국전에 참전했듯이 중공도 미군이 한만 국경에 진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마디로, 중공도, 자신의 안보를 위해 북한이라는 완충지대(緩衝地帶)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공이 미국을 향해 38선 월경에 대한 경고를 발했건만, 그냥 한번 해보는 위협적 공갈로 무시했다. 그리고, 중공이 1차 전역 후에 사라지자, 미군의 화력에 겁을 먹고 도망을 쳐서, 수풍 발전소 경비를 위한 소규모 공세에 불과하며, 자신을 상대로 전투를 계속할 의지도 없고 전력도 없다고 단정했다. 아주 간단한 3단논리는, 2차세계대전(태평양 전쟁) 시에 미군이 일본군보다 강했고, 일본군이 중국군에 강했으니까, 당연히 미군이 중국군보다 훨씬 강하다고 무시했다. 인천 상륙의 영웅이 7개월만에 졸장으로 낙마하는 최대 원인이 되었다.

 

중국 본토에서의 교전에 광분한 맥아더 7함대 구축함 중국 본토에 3 마일까지 접근시킴

 

맥아더는 말로만 중국으로의 확전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미국 군함을 중국 코앞에까지 다가가서 적의 사격을 유도하려 했다. 195147일 동해에 있던 7함대 소속 77기동대 (Task Force 77) 의 두 항공모함을 대만 해협 중국 측 해안 근처로 파견하고, 411일 오전 11시경에 함재기들이 중국 연안에서 공중 퍼레이드를 하며 무력시위를 했다. 구축함 존 보울호(USS John A. Bole)를 샨토우(중국 광동성 동부 해안) 3마일까지 근접시켜서 (분명한 영해 침입) 중공측 무장 장크 47 척이 둘러싸고 두시간 가까이 대치했으며 함재기들이 중공측 정크선 위와 항구(샨토우) 근처까지 위협적 시위 비행을 감행했다.

 

다행히 쌍방에서 화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전쟁광 맥아더는 파면 통보를 받았다. * 작가 제임스 에드윈 알렉산더에 따르면, 맥아더가 중공측의 발포를 유도하려고 보일호와 승무원250여명을 생포 또는 생명을 잃을 위험속으로 파견한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트루만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으나 맥아더를 파면해서 큰 전쟁을 막았다. * 이 가공할 사실은 거의 최근에 에드워드 마롤다 박사가 미 제7함대 역사” (Ready Seapower: a History of the U.S. Seventh Fleet, 2012 미해군성 발행)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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