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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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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대전 일으킬뻔한 맥아더 <上> 중국본토 확전주장

'동방의 시저' 맥아더의 착각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1-22 (일) 12:34:52

 

지난 19501015일에 태평양 상의 조그만 섬 웨이크 아일랜드(Wake Island) 에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만나서, 극동 문제 전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특히 당시 점령지인 일본의 강화 조약 문제와 진행중인 한국전 진전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트루만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이 과연 그들이 경고한 것과 같이 한국전(6.25 사변) 에 개입할 것이냐는 것이었고, 이 문제를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에 별 것 아닌 것 같이 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맥아더 장군에게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맥아더가 그들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참전한다면 우리 공군의 밥이 될뿐이다라고 응대하자, 저윽히 안도감을 느낀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다섯번째 공로 훈장을 수여하고 워싱턴을 돌아가면서, 이제 발을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트루만 미국대통령이 중공의 개입에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는 맥아더의 9.15 인천 상륙 성공으로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패주하게 되자, 38선에서 행군을 멈추고 휴전에 돌입할 것인가? 아니면, 진군을 계속하여 이참에 북진을 계속하여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느냐라는 중대한 기로(岐路)에 도달했기때문이다.

 

주은래 중공 외교부장은 103일 인도 대사 파니카를 통해,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올 경우에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발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국군만 월경하는 경우에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즉 이것은 중공이 6.25 사변을 내전(a Civil War)’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 이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 났으나, 대부분은 중공이 행동으로까지 나오지 못하고 말로만 협박하는 것으로 파악해서 트루만이 북진을 허용하여, 인천 상륙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호기롭게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면서, 1019일 평양을 점령하고, (미국) 추수감사절 경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까지는 (장병들이) 집에 돌아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당시에 북진을 반대한 사람은 딱 한 사람으로 대소 봉쇄 작전 주장으로 유명한 케난 (Kennan) 씨였다. 그는 38선에서 머무는 것은 전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 회복으로 유엔 결의를 달성하며, 봉쇄작전의 성공이지만, 38선을 넘어가면, 롤백(Roll Back) 작전이 되어 중공이나 쏘련의 개입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의 예상은 한달이 되지 않아 적중했다.

 

중국의 참전 결정과 북한 진입

 

투루만과 맥아더의 희망 상항과는 다르게 그들이 회의를 마치고 각자 임지로 떠난지 불과 4일 후(19501019)에 중공군은 인민 지원군이란 이름을 붙이고 의용군(Volunteers)으로 내세워서 북한의 산악지대로 소리 없이 들어와 포진하고 있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유럽의 여러 나라가, 공화파와 왕당파를 각각 지원하면서 의용군 명의로 참전하여 본국이 직접 전화에 휘말리는 것을 막았다는 전례를 활용하여, “중국 인민 지원군으로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외교부의 한 참모가 내놓은 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우리가 부르던 중공(중화 인민 공화국)은 그들이 국공 내란에서 이겨서 건국한지 (1949101) 불과 일년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맞서 장비도 빈약하고 공군도 없는 상황에서 개입을 망설이지 않고 감행(敢行)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1960년대 초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알렌 화이팅이 쓴 “China Crossed the Yalu” 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중국측 입장으로 본 개입 동기와 의사 결정 과정을 잘 설명하였다. 그 이후에도 같은 상황을 다룬 책이 많이 나왔으나, 그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화이팅에 의하면, 중공은 미국이 조만간 중국 혁명을 와해(瓦解)시키려고, 3갈래 길 가운데에서 하나를 택해서 침입할 것으로 보았는데, 1로는 육지로 연결된 월남 쪽에서 쳐들어 오던가, 2로는 바다로 대만 해협 건너서 국부군의 본토 수복을 도와서 들어오던지, 3로는 한국 반도를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통해 쳐들어 올 것으로 보았다.

 

모택동 중공 주석은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공세적 방어 전략이 훨씬 우세하다고 판단해서, 중국 공산당의 최고 간부 회의에서, 대북한 원조와 아울러 미국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소위 항미 원조에 관한 안건을 제출하였는데, 처음에는 본인 이외 전원이 반대 하였다, 모두 한결같이, 나라를 세운지 일천하고, 미국과는 장비에서도 열세인데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느냐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나, 그는 각개격파로 한 사람씩 설득했으며, 가장 재미있는 것은 파견군 총책임자로 예상되는 임표가 병을 핑계로 아예 당시 회의에 불참하여, 서북방면 군 사령관인 팽덕회에게 그 일을 맡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맥아더 장군은 몇 달 동안이나 임표가 사령관인줄 알았다 한다.)

중공에서 미국의 침입을 우려하게 만든 이유는 미국 정부의 행동(7함대 대만 해협 파견 (1950/6/27) ) 누가 중국을 잃었나?” 라는 미국내의 논쟁이 강하게 일어났으며 그 당시 미국에서는 소위 차이나 로비가 상당한 세력을 이루어 장개석이 빼앗긴 중국 본토를 수복해야한다고 법석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50년 여름에는 중공이 대만을 접수하기 위해 정예군을 대만 대안 지역에 집중시켜 놓은 상태인데, 625일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트루만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 것은 물론, 대만 해협에도 미국의 강력한 제7함대를 파송하기로 결정했고, 월남을 식민지로 계속 확보하기를 고집하는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해줬다. 이와 같은 행위는 중공의 입장에서 보면 내정 간섭일 뿐만 아니라, 중공에 대한 포위 작전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다.

 

일부에서 중국이 쏘련의 사주를 받아서 개입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것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막연히 당시 쏘련이 공산국가들의 우두머리였으니까, 어련히 형님 명령을 따랐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나, 전혀 엉뚱한 발상이다. 그 주장이 옳지 않다는 예는 아래와 같다.

 

첫째는, 쏘련의 공중 엄호(掩壕)가 없는 상황에서도 중공군의 북한 진입을 강행했고, 둘째는 쏘련에서 중공에 무기 지원은 하되 무상이 아니라, 유상이라고 못을 박았다. 즉 중공이 쏘련의 심부름을 하는데, 제 돈으로 무기까지 사서 대리 전쟁에 나설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후에 무기 대금 변상 관계로 중쏘 분쟁이 격화된다.



 

오합지졸에게 참패당한 맥아더 체면 살리려고 확전 획책

 

중공이 쏘련의 공중 엄호도 없이 전격 참전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미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북한군이 거의 궤멸(潰滅) 된 상황이라서 어물거리다가는 유엔군이 북한을 전부 점령하고 상황 종료 상태에 들어가면, 그 때는 개입할 명분조차 잃어버리는 판국이 되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처음엔 추수 감사절 때까지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고 큰 소리 쳤지만, 중국 지원군과의 일차 조우에서(19501025) 한국군 2군단과 미 제1기갑사단이 평북 온정과 초산에서 피해를 입고 청천강으로 밀려났다. (이것이 소위 중공군 제1차 전역) 그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까지 붙잡았으나, 중공군의 개입 사항을 무시 내지 과소평가하고, 계속 북진을 고집하여 크리스마스 때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다시 한번 장담했다.

 

10월 말에 나타나서 11월 초에 사라졌던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완전히 도주한 것이 아니라, 평안북도의 산골짜기에 숨어서 쳐놓은 그물망안에 미군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은 야간에만 행군하고 낮에는 산간 지역에 은닉(隱匿)하여 유엔군의 공중 정찰을 피했다. 그들은 군인 일인당 소총도 한자루씩 소지하지 못했고, 전위병은 막대 수류탄으로 무장하여 수류탄 투척병으로 불리울만 했다. 수송 능력이 모자라 초기엔 가장 큰 무기가 휴대해서 운반할 수 있는 박격포 정도였을 뿐이었다. 또한 통신수단이 미비해서 삼국지에서 읽었던 꽹과리, 피리, , 횃불 등으로 교신과 명령 하달에 활용했다. 이런 초라한 행색의 19세기 군대가 20세기 초현대식 군장비를 갖춘 미군을 상대로 해서 어떻게 초전에 대승을 거뒀을까?

 

잠시 중단되었던 북진이 드디어 1124일 재개되어 (소위 크리스마스 작전 Home by Christmas Offensive), 유엔군은 호기있게 압록강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1125) 저녁에, 이미 산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공군이 우리가 이미 쳐둔 그물로 들어오셔서 반갑습니다라며 그들을 맞이하였다.

 

인디안 태형(Gauntlet)으로 궤멸된 미 제2사단

 

청천강 이남은 대체로 낮은 평야여서 쉽게 유엔군이 진군할 수 있었으나, 청천강 넘어서부터는 산세가 험해져서 서쪽 해안가로는 신의주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이 있으나, 미 제8군 작전 지역(한반도 서부, 당시 평안북도)의 동부와 중부는 산골길을 따라 북상할 수 밖에 없었다. 1차 전역의 경험을 통해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 전개 방식을 파악한 중공군은 한국군이 상대적으로 화력이 미군보다 미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서부 전선의 가장 우측(동쪽)에서 진격하는 한국군 제 2군단 지역부터 먼저 타격, 2군단 휘하 7, 8 사단이 거의 궤멸되었고, 나중에 2군단 자체가 해체된다. 기가 막힐 노릇은 모 사단장은 연대장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부상병과 함께 후퇴(도주) 하였고, 두 사단장은 나중에 후방에서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군재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똥별들은 요령 좋게 모두 빠져나왔다. (백선엽 장군 증언)

 

그 누구도 10월 말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중공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거나, 걱정해 보지도 않았다. 워커 중장을 위시한 미 8군은 맥아더의 진군 명령만 따랐을 뿐이다. 미 제2사단은 구장동을 지나 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앞에 적이 있을지, 있다면 어떻게 공격해오고, 이를 어떻게 방비하겠다는 사전 준비없이 평양까지 무인 지경으로 달려 왔으니까 그대로 밀고 나가자는 식이었다.

 

진격 첫날은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앞을 막고 반격을 하였다. 그냥 대수롭지 않은 상대로 생각했으나, 앞이 막혀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26)부터 중공측의 격렬한 야습이 시작됐다. 밤중에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해서 미군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변 산은 모두 중공군이 차지하여 미군이 자리잡은 협곡 아래로 기관총을 쏘아대었다. 앞이 막히고 양옆도 적군으로 둘러싸였으니 나갈 수 있는 것은 뒤로 빠지는 수 밖에 없었다. 뒤로 행군한다는 것은 후퇴를 의미한다. 2사단 사단장부터 졸병까지 아무도 후퇴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다들 도망가기에 바빴는데, 후퇴도 미리 준비된 순서에 따라 대오(隊伍)를 정돈해서 질서있게 실시하면 거의 피해가 없으련만, 깜깜한 한밤중에 사방에서 쏘아 대는 총격에 방향 감각을 잃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래서, 무질서하게 나아가는데 이미 퇴로가 막혔고, 앞서 물러가든 트럭에 포화(砲火)가 집중되어, 트럭이 멈췄다. 사격을 받아 멈춘 차량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미군들의 퇴로를 가로막게 되어 모두 차를 버리고 협곡에 뚫어 놓은 도로 양변으로 도보로 걸음아 나살려라 10km의 길을 달려 나가는데, 양옆 고지에 포진한 중공군의 집중 사격이 비오듯 쏟아지는 사이를 통과해야 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로 포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일부 기습조를 조직해 미군의 후방으로 스며들어 제2사단 각연대의 대대본부까지 공격하여 지휘부가 정신을 못차리게하였다.

 

서부개척시에 미군은 인디안들을 포로로 잡으면 2열로 늘어선 인디안 사이를 지나가면서 주먹이나 회초리,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한다. 이것을 인디안 태형(Gauntlet) 이라고 부르는데, 전투후에 미군들이 10km의 협곡에서 중공군에게 당한 수모가 인디안 태형(笞刑)을 받은 것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인 것이고, 혹은 죽음의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2사단이 나중에 서울에 집결된 패잔병들을 모아 집계한 결과 인명 피해만 4천명이나 되었다.

* 9 연대 손실: 50% *38 연대 손실: 50% *포병 대대 155mm18: 전량 손실

기타 장비: 40% 손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이번 전역에서 약 3,000 명의 미군포로를 잡았는데 대부분, 죽음의 계곡에서 붇잡혔다. 중공군 개입후 제1, 2차 전역에서 입은 미군 피해는 미국 남북 전쟁이후 최대의 참패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미 제2사단은 사단 명칭은 그대로 붙어 있었으나, 실제로 일개 전투연대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사실상 궤멸되었고, 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지휘 책임을 물어 직위 해제되었다.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는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에 생략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서부 전선인 평안북도 산골길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얼마나 무참한, 아니 참혹한 피해를 입었는지를 간단히 기술하여, 인천 상륙의 영웅이었든 맥아더 장군이 적을 업신여겨서 미군 이 최대의 참패를 당했는지를 알리려 한다.

 

현지 상황이 나빠진 것을 뒤늦게 안 맥아더 사령관은 1128일 현지 사령관인 8군의 워커 중장과 10군단 알몬드 소장을 자신이 있는 도쿄로 불러서 대응책을 협의한 후에 8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0군단은 함흥 흥남선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서부전선의 좌측에 배치된 미 제1군단(백선엽 장군의 한국군 1사단 포함)은 지형도 대체로 평탄하고 체계적으로 후퇴 작전을 실행하여 거의 피해가 없었다. 121일께 전 부대가 청천강 이남으로 집결하자, 워커 중장은 12338선까지 후퇴 명령을 내려서 사실상 북한 땅을 포기했다.

그로부터 20일간의 190km(120mile)의 후퇴는 미군 역사상 최장의 후퇴라고 불리운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판단 착오로 당한 미군의 참담한 패배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미국 정부가 자신의 작전에 제약을 두어서 (그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한 팔을 뒤로 묶어두었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당했다고 강변했다. 그는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만주 폭격, 중국해안 봉쇄, 국부군 한국전 참전허용 뿐만 아니라, 원자탄 사용까지 주장하여, 트루만 대통령이 막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킬 뿐더러 한반도가 핵폭탄 투하로 핵오염 지대가 되어버릴 뻔했다. 다시 말해서, 맥아더 장군은 잘된 것은 다 내 탓이요 못된 것은 모두 남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군인으로 그 당시 군재에 회부하든지 해임시켰어야 옳았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상부 허가도 없이, 그리고 상의조차 하지 않고, 대외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트루만 대통령은 대노하여 합참을 통해서 맥아더가 대외 관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외교 문제는 국무장관, 국방 문제는 국방장관의 사전 허가를 먼저 받은 다음에 발표하도록하고 사본을 반드시 백악관에 먼저 제출하도록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을 통해 지시했다.( 1950126: JCS 98134)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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