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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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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의 진짜 공로자 <下>

이승만에 관한 불편한 진실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1-21 (토) 07:05:01

 

불행하게도 조선 문제는 일본이라는 큰 문제거리를 다룰 때, 조그만 일부분으로 다뤄졌다. 공식적으로는 카이로 회담에서 처음 다뤄졌으나, 서구의 식민주의에 염증(炎症)을 내는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불란서 등 식민지 경영 위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온갖 단물만 빼먹고 현 주민들에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면서 전후에 영국을 위시한 해외 식민지를 해체할 생각이었고 이를 대체할 것으로 신탁통치를 구상하여, 주민들이 자치능력이 생기도록 여러가지 시혜(교육, 복지, 사회간접자본 투하 등)를 베푼 다음에 독립을 시켜야한다는 숭고한 착상을 하였다.

 

로즈벨트가 실 예로 생각하는 신탁통치의 전형은 미국이 미서 전쟁으로 스페인에게서 뺏은 필리핀을 상정하여서 자치 능력을 키우는데 약 50 년을 계상하였다. 그는 일본이 항복할 경우 조선에 독립을 주되 아직 자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약 20~30 년정도 식탁통치 기간을 경과해야 된다고 간주해서 다른 나라의 정상과 회의시나 문서로 의견 교환시에 항상 필리핀의 예를 들면서 장기간의 신탁 통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카이로 회담 이전에 행한 로즈벨트의 조선 독립 / 신탁 통치구상 논의

 

1. 로즈벨트 --- 장개석 서한 (1942/12/24)

카이로 회담 보다 근 11 개월 전에 이미 조선 독립구상을 표명함. 로즈벨트 대통령은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고문으로 일한 오원 래티모어(Owen Lattimore)를 통해 장 총통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식민지들 가운데 전후 종전의 식민국가에게 되돌려 주는 것보다 새로운 신탁 통치 방안을 적용할 수 있고,... 조선의 독립같은 문제를 쏘련의 참가 없이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쏘련을 고립시키려는 것은 긴장을 완화하기보다는 긴장을 조장하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피력해서, 조선 문제는 쏘련과 협의한다는 원칙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2. 로즈벨트 --- 이든(Anthony Eden) 영국외상 회의 (1943/3/27 백악관 회의실)

 

방미중인 앤소니 이든 영국 외상과의 회의에서, 일본의 식민지/점유지등의 종전후 처분에 관해서 로즈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인도지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신탁통치

만주, 대만: 중국 귀속

조선: 국제 신탁 위임 (중국, 미국, + 1, 2 국가)

일본의 위임통치 태평양 도서: 국제화 (평화 유지위해)

 

영국 외상은 그의 제의에 호의적인 인상을 표함 (동의를 의미함)

여기서 미국과 영국은 조선을 3 ~ 4 개국 신탁 통치에 합의함.

이 회의에 홉킨스도 동석했으므로, 카이로 선언 초안 작성시에 조선 조항을 메모 없이 삽입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이 부분을 읽지 못해서 (아니, 있는 줄도 몰라서) “초안이 만들어 진 순간은 그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운운하는데,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 같다. 정 교수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의 날로 칠 때는 카이로 회담 때보다 8개월 앞선 327일이었다.

 

카이로 회담중의 조선 문제 다룸

 

1943 11.23 하오 8시 만찬과 회의; 로즈벨트, 장개석, 합킨스, 마담 장, 왕 충후이 참석 강대국 정상간의 첫 번째 조선 문제 논의: 로즈벨트 대통령이 미국과 중국이 조선, 인도지나 및 태국의 장래에 대한 상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자, 장 총통은 조선에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조하였고, 중국과 미국이 전후에 인도지나의 독립 달성에 노력해야 하며, 태국의 독립 회복이 이루어져야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로즈벨트 대통령은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일본의 패전 후에 조선에 독립을 허용하기로 합의했으나, 삼거두 회담이어서 영국 측의 동의도 필요했다. 의외로 영국측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영국이 미중 합의안에 반대 의견을 제시함

 

1126일 하오 330분부터 열린 성명서 문안 조율 회의에서 (미국 홉킨스 특별 보좌관, 중국 왕 충후이 비서장, 영국 카도간 영국 외교부 사무 차관 참석) 영국측은 조선이 자유롭고 독립된다조선이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다로 수정하자고 제의하며, 그 수정안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영국 내각에서 아직 조선 문제를 다룬 적이 없고, 쏘련의 태도를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예, 조선 독립 문제 조항은 성명문안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왕 충후이는 영국의 카도간의 요구가 난센스라고 강력히 반발하며, 조선이 일본 침략의 첫번째 희생양이었음을 상기시켰다. 또한, 이 때 로즈벨트 대통령이 해리만 주쏘 미국 대사 (당시 카이로 회담에 참석 중)에게 쏘련의 태도를 묻자, 해리만은 쏘련의 의견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의제에 삽입하는 것은 미중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살아남게 되었다.

  

 

독립 시기에 대한 표현의 변경

 

그러나, 독립 시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하고,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치게 되어 지금까지 천추의 한으로 남는데, 이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로즈벨트와 장개석의 첫 면담에서 대체적 합의에 이르자, 로즈벨트 대통령은 홉킨스에게 합의서 초안을 작성하게 했는데, 그 초안에는 조선 독립 관계 문구는 다음과 같으며 (자료 참조: 원본의 상태가 좋지 않음) 문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본다.

 

전기 삼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 ---(시기)-----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 시킬 것을 결한다.

 

1. 홉킨스 초안: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이 문구를 보면 전날 (11/23) 장 총통의 의견을 촤대한 반영한 것으로 조선에 가장 유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것만 봐도, 조선 독립 조항 삽입의 일등 공신은 장개석 총통임을 알 수 있고, 그러나, 로즈벨트가 그의 손을 들어 줬기 때문에 그 조항이 영국의 초기 반대에도 2:1로 우세가 유지됐다. 초안 작성 (1943/11/24 하오)

 

2. 로즈벨트 수정: 적절한 순간에 (at the proper moment)

로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신탁 통치 구상을 고려하여 한 발자국 뒤로 물러 선 표현을 사용했다. (수정: 초안을 읽고 나서)

 

3. 영국의 수정안: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in due course)

영국은 조선 독립 조항을 제외하려고 그들의 성명 초안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으나, 미국과 중국의 강력한 요구에 굴해서 그 조항을 삽입하는데는 동의하지만 시기문제에 물을 타서 언제가 될지 아주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여 미중의 합의를 얻어 최종안이 되었다. (채택: 선언문 채택시 1943/11/26 하오 )

*** 영국의 선언문 초안에는 조선 독립 조항이 없다. (카이로 테헤란 회담 자료 철 P404 )

 

이렇게 카이로 회담 결과물인 성명서가 합의되었으나, 다음에 있을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카이로에서 만날 때 선언문을 공표하기로 했다. (1945121일 공식 발표)

장 총통은 카이로 회담 후 바로 충칭을 향해 떠나고, 로즈벨트와 처칠은 다시 테헤란으로 가서 스탈린을 만나, 대독전 수행에 대한 협의를 하고 로즈벨트의 요청에 답하여 스탈린이 독일 항복 후에 대일전 참전을 약속했다.

그리고, 영 양 거두(巨頭)는 스탈린에게 카이로 선언을 보이고 그의 동의를 얻었다 (1943/11/30).

 

그 다음으로, 얄타 회담 (1945 2 ) 에서 조선 신탁 통치에 대한 협의가 있었는데, 로즈벨트가 조선의 신탁통치 구상을 논의하면서 다시 필리핀의 예를 들며, 조선의 신탁 통치 기간을 20 ~30 년은 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 했다. 얄타 회담에서 남북 분단이 약속되었다는 의견이 분분하나, 문서로 된 것은 없고 구두로 의견 교환한 것 밖에 없다.

 

이것은 로즈벨트 사후에 홉킨스가 쏘련에 갔을 때, 로즈벨트와 구두로 약속한 한국 신탁통치 합의를 지키겠다고 한 스탈린의 말로 증명이 된다. (또한 포츠담 회담 준비용으로 스팀슨 전쟁상(War Secretary Henry Stimson)이 포츠담 회담에 참가하는 트루만 대통령을 위해 만든 짤막한 메모랜덤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 다음에 1945 년 독일이 항복한 다음에 배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서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그대로 이행된다7 26 일 발표한 포츠담선언에 명기하여 국제 공약이 되었다.

 

장 총통의 조선 독립 조항 삽입 준비 과정

      

중국측에서 기록상 조선 독립 문제를 제일 처음 거론한 것은송자문 박사 (Dr. T. V. Soong ) 가 외교 부장에 취임하고 첫번째 기자 회견(194211) 에서 만주와 대만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이 전후에 독립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는데, 사전에 장 총통과 협의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장 총통은 7월 임정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조선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합의를 얻도록 힘 써 싸우겠다 (력쟁)고 약속했다.

 

그는 카이로 회의출발전에 그의 휘하의 두 기관에 의제를 준비토록 했던 바,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는,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조선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조선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 총통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11/17)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여기에 조선 독립 항목도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은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여기에는 조선 독립 조항을 달성하기 위한 교섭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중국, 미국, 영국, 쏘련이 즉시 조선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조선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

 

회담중 전략

 

중국측은 조선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방침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상기 영국이 --- 반대 의견 제시 참조)

 

중국이 합의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들의 정세 판단 때문이었다. 첫째, 쏘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고,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되는 영국이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영국 태도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독단적으로 조선 독립을 승인하게 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다.

 

성과, 그리고 장 총통의 자평

 

회담 후에 장 총통이 조선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 (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자신의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을 뿐만 아니라, 11월말 회고 부분에서도, 카이로 선언문과 관계된 다음 글을 실었다.

 

--- 보충해야 할 것은 영국은 조선 독립 문제를 성명문에 넣어서는 안된다며 완강히 주장했고, 만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만주를 포기하는데는 찬동하지만,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는데는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중국) 대표가 미국의 협조를 얻은 덕분에 이런 내용이 선언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부분이 조선 독립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이다. 필자는 야구를 좋아하는데, 이야말로 적시 안타(Timely Hit)’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정일화 교수가 카이로 선언 한국 독립 조항이 등어가게 된데는 이승만 또는 다른 어떤 친한인사가 한국을 위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올지 모른다는 가설을 적시했을 뿐인데, 유영익 교수는 자신이 더 연구한 것도 없이 다만 정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확정적으로 이 승만의 공이라고 단정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 조작은 확대 재생산되어서, 다른 말로 쉽게 풀이하자면, A가 다리를 삐었다고 B에게 말하니까 그 말을 듣고 BC에게 A의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며, 그 말을 들은 CD에게 A의 다리를 잘라냈다고 하는 꼴이다.

 

해방후 정국에 대해서 다루고 싶지 않지만, 194512월 모스코바 삼상 회담에서 조선의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자, 이승만은 쏘련이 신탁 통치를 내세운다고 반탁 운동을 거세게 밀고 나갔다. 자신이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 정계에 로비를 했다는 분이 신탁 통치안이 원래부터 미국측 (로즈벨트 대통령) 구상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미국 정부와는 전혀 교감이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고, 반탁을 주장했다는 것은 조선 민족의 자치능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셈인데, 그가 나중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을 끌고나갈 때의 행태를 보면, 우리 국민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꾼의 나라로 제멋대로 쥐락펴락했다. 다시 말하면 해방될 때는 자치 능력이 있었는데, 자신이 집권하고 나서 갑자기 일자무식이 된 셈이다. 때에 따라 자기 주장이 왔다갔다 했다.

 



 

유영익 위원장은 자퇴하시든지, 임명권자께서 해직하십시요!!!

 

억지춘향은 통하지 않는 법이다. 저의 명명백백한 증거에 기초하여 유영익교수의 엉터리 주장의 오류에 대해 반박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으시다면, 억측이 아니라,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가지고 반론을 제기하십시요. 아니면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시고, 온 국민께 백배사죄 하시며, 국사편찬위원장 직을 조용히 사퇴하시기를 정중히 권고합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까지 해내면서 이 박사를 띄우려는 진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러우며, 국론 분열을 일어켜서 오히려 국부 이승만 박사에게 누를 끼쳤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유언비어식 역사 조작자들을 철저히 배격해야 하며 현재 유영익 교수는 역사 편찬 위원장을 스스로 물러 나시든지 아니면 임명권자이신 박근혜 대통령께서 국부 이승만을 뜬금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진실인 것처럼 퍼뜨리는 국사편찬위원장은 오히려 국부의 낯에 먹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직에서 해임하시기 바랍니다.

 

공로 다툼 분쟁의 결론

 

이상으로 조선 독립 조항이 카이로 회담에 들어가게된 경위를 중국측의 노력과 로즈벨트의 구상을 살펴보았으므로, 결론은 자명해진다.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은 조선에 전후 즉시 독립이 아니라, 필리핀 식으로 위임 통치를 통한 단계적 기간을 거쳐서 독립을 부여하는 구상을 최초로 장개석 총통에게 194212월 서신을 통해 피력하고, 다시 19433월 이든 수상 방문시에도 제기하여 그의 동의를 얻었다.

 

중국측의 공헌을 살펴보면, 먼저, 송자문 외교 부장이 그의 취임후 (194211)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조선이 전후에 독립 될 것으로 천명했는데, 이는 장 총통과의 조율 후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943727일 장 총통이 조선 임정 간부들을 만나서 조선 독립을 강대국과의 정상 회담에 제의해서 동의를 얻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회담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중국측은 조선 독립 조항을 의제에 설정하였고, 1123 일 로즈벨트 대통령과의 첫 번째 실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강력히 추진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냈다. 합킨스의 초안에 장 총통의 복안이 바로 나오고,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강력히 밀어서 영국측 자구 수정을 받아들여 조선 독립 조항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독립 조항은 미국 과 중국의 의견이 합치해서 삽입되었으나, 시발점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 총통이 즉시 독립에 더 적극적이었고, 로즈벨트는 궁극적인 독립에 동의하지만, 단계를 지나는 신탁 통치를 거쳐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홉킨스가 자신의 영감으로 초안을 작성했다는 것은 국제회의의 메카니즘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그의 역할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회담 후에 장 총통이 조선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 (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 이라고 자신의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조선 독립 조항이 들어 가도록 일심 전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 총통의 손을 들어 줄 수 밖에 없다.

 

해리 홉킨스(Harry L. Hopkins)는 누구인가?

  


 

그는 미국의 벽촌 (아이오아 주의 수 시티)에서 태어나서, 시골 대학(Grinnel College)에서 공부하고 (전공: 미국 정치와 영국 의회 제도) 뉴욕에 가서 사회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활동상에 감동을 받은 당시 뉴욕 주지사인 로즈벨트의 눈에 들어서 뉴욕 주의 단기 실업자 구제국장에 임명되었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다시 워싱턴으로 불러 연방 실업자 구제 활동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후에 상무 장관으로도 잠시 일했다.

 

그는 일을 매우 합리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처리해서 생산성을 높였고, 이해 당사자간의 분쟁을 부드럽게 융합점을 찾아내서 쉽고 빨리 해결해 냈다. 이러한 장점을 높이 산 로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신체적 장애 (폴리오/ 소아마비)로 장거리 여행이 어려울 때 자신의 대리인으로 처칠과 그리고 독일이 쏘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을 만나서 그곳 현황을 파악하고 얼마나 독자적으로 대독 전쟁에 버틸 수 있는지, 그들이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고, 미국이 그들에게 뭘 할 수 있는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영국 방문후 영국에 대한 원조가 급증했고, 마찬가지로 스탈린을 만난 다음에 대쏘 원조가 시작됐다. 미국이 진주만 사태로 정식으로 전쟁 당사국이 되기 전에 파시스트에 대항해 싸우는 국가에 원조를 담당하는 렌드 리스 프로그램(Lend-Lease Program) 총괄자로 일했다.

 

그는 로즈벨트가 참석한 거의 모든 강대국간의 회의에 참석했고, 로즈벨트 서거(1945/4/12) 후에도 신임 트루만 대통령의 특사로 쏘련에 파견되어 로즈벨트의 정책을 그대로 따를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원자탄 실험 성공할 때까지만).

 

홉킨스는 로즈벨트 대통령의 배려로, 3 년 반(40/5/10 부터 1943/12/21 까지) 동안 백악관에서 기거하며, 그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참모(Special Assistant to President) 역할을 하였다. 카이로 회담 전후에도 그는 백악관에 기거해서, 조선 독립 조항도 로즈벨트 대통령과 늘 상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지, 정 교수가 얘기하듯이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입에서 튀어 나온 것은 아니었다.

 

홉킨스는 가난한자의 동맹자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또는 뉴딜의 선두 사도라고도 블렸고, 부통령보다 더 큰 일을 하는 대리 대통령“(Deputy President)이라고도 불렸다.

 

홉킨스는 로즈벨트 대통령의 의사를 충실히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심부름꾼이었지, 정 교수가 생각하는 것 같은 우리 겨레의 선지자는 아니었다. 시골 출신에 명문대 출신이 아니지만, 우리 속담에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그는 뉴욕시의 빈민 구역 활동으로 발돋음을 했고, 그 뒤 약 60 여년 이후에 시카고의 빈민 지역을 누빈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게 된다. 아주 좋은 시사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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