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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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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의 주역이 이승만? <上>

이승만 로비는 없었다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1-21 (토) 06:42:52

 

역사는 쉽게 얘기하자면 지난 사실의 기록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확대, 축소, 미화 또는 비하하기도 하는데, 최근에 우리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이 중국의 동북 공정이다. 우리 선조들이 일군 고구려의 역사를 그들 변방의 역사로 편입한 것을 볼 수 있다.

 

역사 조작과 왜곡이 다른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이땅에서도 엄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실을 밝히려한다.

 

우리가 소위 5천년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조선(Korea)이라는 땅은 신라 통일 이후로 중국을 종주국으로 모시고 살아온 반 식민지이다가, 1910 년 일본에 병탄된 식민지로 여겨 왔는데, 그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언급한 것이 우리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의 말미에 나오는 문구이다.

      

 

194311월 미국, 영국 그리고 중국의 정상 (미국 로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그리고 중국 장개석 총통) 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모여 대 일본 전쟁 수행과 종전후에 일본이 강탈한 땅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과정의 일부로 조선 인민들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대일 전쟁을 수행중인 3대강국-,,-)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조선을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수립할 것을 결의한다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어쩌면, 25자로 1945 8 15 일 해방 이후 우리 한민족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카이로 선언이 역사 학자들과 여론의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조선 독립문구가 선언에 들어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두고 일부에서는 중국 총통 장개석이 주도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측에서는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가 혼자 독창적으로 아무 기록이나 보조 자료 없이 타이피스트에게 구술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측이 주장하는 것은 누가 장개석이나, 홉킨스 (로즈벨트 대통령)을 움직였느냐, 다시 말해서, 김구 등 임시정부의 공이냐, 아니면, 이승만 박사의 대미 로비 덕이냐라는 것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으며, 덩달아 언론들이 각기 성향에 따라 양측을 따로 지지하고 있다.

 

김구 측 공적을 내세우는 편에서는 임시 정부 기록(장개석 총통과 김구 주석, 김원봉 등 임정 간부의 회동), 장개석의 일기장, 장의 비서장인 왕충후이의 회담 기록 등 자료를 증거로 제시한 반면, 이승만의 로비설을 주장하는 측은 아무런 물증도 없이 막연히 이 박사가 감리 교인이고, 또한 홉킨스도 감리 교인이었기 때문에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당치도 않는 추측 밖에는 내세운 것이 없다. 이것을 보면서 팔자는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내가 쓴 물이 하수구를 통해서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가니까 태평양 바닷물에 본인의 DNA가 미량이지만 들어가 있으니 온 태평양 바다를 나의 물(My Water)이라고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우선, 양측의 주장을 살펴보고, 필자가 원전(Primary Sources)과 대조해 봤을 때 나타나는 그들의 주장 가운데 있는 결정적 오류를 지적하고, 일제 패망후 즉시 완전 독립이 아니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in due course)” 라는 말 뜻은 일정 기간의 신탁 통치(Trusteeship) 기간을 거친 다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탁 통치가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또한, 정일화 교수가 추켜세우는 홉킨스가 어떤 분인지도 살펴보려한다.

 

김구의 공으로 돌리는 측은 1943년 여름 임시 정부 간부들은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조만간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 해 726일 김구 주석을 위시하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안원생(통역)이 장 총통을 찾아가서, 미국과 영국은 조선 문제에 대해 국제 공동 관리 방식을 채택하려하니, 중국은 전후 즉시 조선의 자주 독립성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합의를 얻어달라고 요청했고, 장 총통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둘로 갈라져 있는 조선 독립 단체가 하나로 합치도록 당부하며. 그래야 중국도 이 문제를 쟁취할 수 있고, 이일에 착수하기 쉬울 것이라고 답했다.

 

장 총통과 임정 간부 간의 회동은 임정 기록에도 있고, 중국 정부측 기록에도 있기 때문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Event)이다. 그런데, 중국측에서 조선 독립을 약속한 것이 그 때가 처음이 아니고, 그 전해 12월에 새로 외교부장에 취임한 송자문 박사(Dr. T.V. Soong)가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일본 패망후에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따라서 , 임정 간부가 장 총통을 찾아간 것은 중국이 조선 독립 성취를 약속해 달라고 부탁하러 갔다기 보다는(이는 이미 송 장관이 천명해서 알고 있음) 미영 수뇌와의 회담에서 종전후에 조선 독립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장 총통이 힘써 주기를 요청하러 간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 박사 로비 덕으로 추켜세우는 측의 선봉장은 정일화 교수(백천대), 그는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 선언’(2010) 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박사가 로비를 통해 미국 정계를 움직여 조선 독립 조항을 삽입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일말의 학자적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주장이 완전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연구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사족을 달았다. (자신이 없었더라면,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터였는데) , 그의 이야기는 가설에 불과하다.

 

정 교수 스스로 자기의 주장이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술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집중적으로 더해보면, 카이로 회담에 이승만이나, 다른 어떤 친한국 인사들이 한국을 위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올지 모릅니다. (제가) 아직은 그런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또 한 분, 이승만 로비 덕분이라고 완강히 주창하는 유영익 교수(현 국사 편찬 위원장)의 설을 살펴보자. 유 박사는 그의 신간서인 건국 대통령 이승만’(일조각)을 통해서 카이로 선언에 들어간 조선 독립 조항은 이승만의 공이라고 확언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주장이 그의 연구 결과가 아니고, 정일화 교수의 연구를 인용했을 뿐이다. 그는 정 교수의 가설에서 한 술 더 떠서 단정적으로 이 박사 공이라고 아무 증빙 자료의 뒷받침 없이 주장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말이 마치 성경 말씀인 양 일부 언론이 떠 받들어서 정설인 것처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정일화 교수의 오류에 대한 반박(뉴데일리 2011/9/14 게재 기사에 의거함)

 

1. 성명 기초 위원회 조차 만들지 못할 만큼 회담은 난장판 계속:

기록을 봐서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음

 

2. 카이로 회담 당사국인 미국, 영국, 쏘련, 중국:

쏘련은 참가하지 않았음.

(정 교수가 아주 기초적인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음)

 

3. 홉킨스는 당시 처칠과 스탈린 등을 일일이 만나며...:

참석도 않은 스탈린을 어떻게 만나나

지금 같이 화상 통화도 안되는 당시에.

 

4. 조선 문제가 끼어들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이 회담은 대일 전쟁 수행과 전후 영토 처분을 논의하는 장소로, 당연히 일본이 병탄한 조선 문제 처리도 토의 대상이었다. 정 교수는 회담의 성격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음.

 

5. 홉킨스가 선언문을 단독 작성 하면서 조선 독립 조항을 삽입했다.:

물론, 홉킨스가 미국측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미국 대통령의 보좌관으로그의 지시에 따라, 회담 내용과 로즈벨트의 복안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초안을 작성한 것이다. 100 % 홉킨스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면, 정 교수는 잘못 짚은 것이다.

 

남북 적십자 회담에 참가한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회담후에 대변인이 회담 경과를 발표하는데, 그는 이미 회담에 참석했기 때문에 회담의 흐름을 알고 자신(과 보좌관의 의견을 참작후)이 초안을 만들어 수석 대표의 승인을 받고나서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측도 성명서 초안을 만들었고 (중국측은 미국 초안을 보고 잘못만 수정함) 3 대국 대표가 성명서 초안을 조율(調律)해서 최종안을 작성했다.

 

6. 초안이 만들어진 순간은 그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 아니었나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백악관 문서 기록관인 코넬리우스를 불러 선언문을 홀로 구술해서 만들어내면서 어떤 문서나 메모 없이 머리 속에서 떠오른 내용을 그대로 내뱉어 작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카이로 선언문 초안이라고 했다.:

 

이것은 미국 외교 문서집 카이로테헤란 회담 편’ 399 페이지에 나오는 그대로인데, 미국측 초안 이라고 지적해야 옳다. 그러나, 정일화 교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조선 독립과 신탁 통치 문제는 훨씬 이전에 이미 거론되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음. 그 관계는 후술함.

 

7. 이 초안은 로즈벨트의 승인을 얻은 후 처칠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당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라는 문제의 구절을 삽입했다. in due course라는 구절은 처칠이 평소에 말버릇처럼 애용하던 문구였다.:

 

승인은 그의 초안을 있는 그대로다 받아들인 것 같아 보이는데, 사실상 로즈벨트 대통령의 가필과 수정을 거친 다음에 승인함.

 

유영익 교수의 오류에 대한 반박(중앙일보 2013/5/13 배영대 기자 작성 기사 근거)

 

1. 2차 세계 대전 때 한국만 약소 식민국이 아니었다. 수많은 식민지 중 유독 한국을 지목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는 표현까지 보태며 독립을 보장한 배경이 무엇일까?

 

유 교수는 카이로 회담의 성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카이로 회담은 로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처칠 영국 수상과 함께, 스탈린 쏘련 수상을 만나러 테헤란에 가는 중간 기착지인 카이로에서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함께 만나서 대일 전쟁 수행과 전후 영토 처리 문제를 다루는 장소였다. 만주, 대만, 팽호도는 중국에, 일본의 태평양에 있는 위임 통치지는 국제화하고, 전전 유럽측 식민지는 종전의 소유주에게 일단 돌려주고, 그리고, 남는 곳이 바로 조선이었기 때문에 조선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이다. 뭐 조선이 특별히 예뻐서 더 잘 봐 준 것도 없다. 기사 위 제목에 한국만 콕 찍어서는 신문사가 편집 시에 넣은 것으로 보여 유교수에게 귀책하지는 않는다.

 

2. 장제스는 4311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 도중 한국 문제를 공식 거론한 일이 없다. 그런데 1123일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거론하자 이에 장제스는 수동적·소극적으로 찬성했다구?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말이다. 회의록을 읽지 않은 것 같다. 후술하는 카이로 회담중의 조선 문제 다룸을 참조하시라.

 

3.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에 미친 이승만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했다. 우선 편지 외교. 유 교수가 가장 주목한 것은 43515일자 편지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해 1905년과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운 일을 상기시키면서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불행한 사태가 확산된 것은 서양의 정치가들이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堡壘)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1943515일자 편지를 보냈다고 해도, 로즈벨트 대통령이 이든 영국 외상에게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고 동의를 받은 것은 한달 반이나 앞선 327일이다. 그러므로, 그 편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4. (지난 20135) 11일 만난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 탄생의 가장 큰 한국인 공로자는 이승만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비록 상하이 임시정부와 하와이 교민사회를 원만히 이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 행정부를 향한 전방위적인 외교 노력으로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내는 숨은 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으니까, “숨은 공을 거뒀다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 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의문은 이 박사가 자신이 노력해서 조선 독립 조항을 삽입시켰다면, 당신이 생전에 왜 그렇게 중대한 일()에 대해 함구하고 계셨느냐는 것이다. 그 분이 자신의 생색을 내는 것에 수줍어해서 일까? 중국에 있든 김구 주석을 위시한 임정측은 중국의 정상까지 회동하여 조선 독립을 촉구했으나, 가엽게도 전방위 외교에 몰두하신 이 박사는 누구를 만났을까. 국무부 관리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한국 동란 이후에 문명자라는 여기자가 계셨는데, 그녀는 미국 국무부 뿐아니라, 백악관까지도 제집 드나들듯해서, 러스크 국무 장관도 그의 집무실에서 마주 얘기를 나누고, 백악관의 안주인들과 아주 가까웠으며, 심지어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방미중 그녀의 활약에 놀라서, 중국으로 미국 여기자단을 데리고 방문하도록 조처했다. 그녀의 활동상과 비교하자면, 이 박사의 워싱턴 전방위 외교는 내세울 것을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인다.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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