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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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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조봉암 법살<下> 다울링 대사의 조봉암 구명운동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0-02 (금) 12:13:16

 

다울링 주한 미국 대사는 조봉암의 체포와 진보당 간부의 검거를 본국에 보고하고, 이 것은 그 해 52 일에 있을 민의원 선거에 앞선 야당탄압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무부 동북아 담당과에서 극동담당 부차관보에게 보낸 문서에, 대사관의 소견으로는 정부가 발표한 혐의내용은 설득력이 약하다 (flimsy)”고 전하면서 또한 자체적으로 실시한 일반 한국민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그들도 혐의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은 지난 1949(국회 프락치 사건)1952(부산 정치 파동) 으로의 회귀로 판단해 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한 종전의 수법을 다시 써먹으려는 전조(前兆)라고 하여 미 대사관측은 이박사의 정치 조작 술수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글을 읽으면 조봉암 선생이 강 목사에게 한 말의 진실성을 빈틈없이 증명한다.

 

“---만일 한국정부가 재판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어서, 미 국무부는 1958620일 서울 대사관에 발송한 전문 제799호에서 만일 (한국 정부가)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에게 억세게 재수좋은 선전꺼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 그것(조의 사형)은 비동맹국들뿐만 아니라, 자유 세계의 눈으로 봤을 때도 우리(미국 정부)가 한국에서 이뤄놓은 정치적 발전과 성숙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국무부는 다울링 대사에게 즉시 영향력있는 한국 정부 요인을 비공식적으로 만나서 미국 정부가 심각히 우려한다(serious concern)는 점을 전달해서 조봉암이 사형 판결또는 처형을 피하도록 강구하라는 훈령(訓令)을 보냈다.

 

이에 따라, 다울링 대사는 623일 국회의장 (당시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 씨를 만나 미 정부의 우려의 뜻을 전달하자, 이기붕 의장은 사형 판결은 피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72일 서울지법에서 5년형을 받았으나, 1025일 고등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자, 다시 국무부는 다울링 대사에게 한국 정부 요로와 접촉하여 조봉암 처형의 함축성을 경고하라는 훈령을 다시 내렸다. 이에 따라 대사는 다시 이기붕 의장을 만나서 본국 정부의 우려를 다시 한번 전함, 이 의장은 대법원에서 고법의 선고가 번복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59227일 고등법원 판결을 그대로 추인해서 사형 판결을 내리고 731일 처형했다.


 

국무부 본부의 지시에 따라 다울링 대사는 83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을 면대한 자리에서 조봉암 씨를 처형하는 갑작스럽고도 대단히 의심스러운결정을 한데 대한 미국 정부의 실망을 전달했다.

 

이상으로써 미 국무부 발간 미국 대외 관계, 1958- 1960” 에 실린 조봉암 검거에서 처형까지에 걸친 미국 정부의 입장과 구명운동의 단면을 보여서, 일부에서 제기하는 미국의 엄모설 또는 구명 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비난은 잘못됐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필리핀의 아퀴노가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본국에 돌아가서 비행기에서 내릴 때 마르코스 추종자가 저격해서 죽었는데 (1983821), 미국이 경호원까지 붙여서 그를 호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를 구할 방도는 없었고, 순리적인 우정어린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한 (않은) 이승만 박사는 전에 제맘대로 했듯이 이번에도 배짱으로 밀고 나가면 된다고 착각하였다.

 

그전에 통하든 것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을 조금 시간이 지나서 (실재로 일년도 채 되기도 전에) 그는 실감하고, 권좌에서 밀려나며 하와이로 귀양가게 된다. 이번에는 임자를 바로 만났기 때문이다.

 

보안법 파동에 대한 미국의 강도 높은 반응

 

미국 정부는 자신의 자제들의 피를 흘려서 공산 침략을 막아주고 엄청난 원조를 퍼붓는 대한민국이 이승만이라는 독재자가 연로한데도 불구하고 종신 집권을 하려고 획책하여 미국이 세계의 조롱꺼리가 되게 생겨서, 이번은 아니다라고, 나름대로의 마지노 선을 그어놓았다고 생각된다.

 

예상대로, 이년후로 닥아오는 대통령 선거에 다시 당선하고 그의 후계자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1958년초부터 야당 탄압과 정적의 체포는 첫번째 적신호였다. 위에 적시(摘示)한 것처럼 미국은 조봉암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시의적절하게 관심과 우려를 표명해왔다.

 

그러나, 이 박사 지지 세력인 자유당에서 소위 국가 보안법 개정안을 야당 의원들을 무술 경위를 동원하여 그들을 사실상 구금한 상태에서 여당의원들만으로 통과시켰는데, 이때가 바로 19581224일로 왜 하필 이날을 택했느냐는 의문이 드는데, 대체로 미국에서는 크리스 마스에서 설날까지 약 일 주간 휴가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당의 인사가운데 모사가 이 때 해치우면 미국에서 모르고 그냥 넘어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한국 사태 발전을 주시하던 미 국무부는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를 호출해서 12.24 보안법 파동시에 미 대사관원 참석을 제지한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까지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한국 국회에서 비민주적 방식으로 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킨데 대해 강력히 불쾌감을 표명하고, 이 박사에게 친서를 보내서 반민주적 작태(作態)를 통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앞서, 다울링 주한 미 대사는 본국에 보안법 파동을 재빨리 알려서 본국에서 신속하고 강한 톤의 반응이 나오도록 했다. 크리스마스 휴가인데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어서 미국회의원을 대표하여 이박사와 가깝게 지내는 월터 져드하원 의원의 항의편지까지 보내게 했다. 후에 외무부 장관이 되는 당시 외무부 정무 국장인 김동조 씨의 회고록에 의하면, 미국 국무부의 지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는 다울링 대사가 이 박사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한다.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미국은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송환했는데, 약 일주일 예정이었으나, 한달간 체류하면서 고위 관리들 (아마 아이크까지 만났을 가능성이 많음)과 한국 정세를 심도 있게 의논을 나누고 이승만 이후(PostSyngman Rhee) 문제까지 거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이 박사나 그의 추종자들은 아이크의 친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보안법 파동을 밀어 내친김에 경향 신문 폐간에, 조봉암 선생 사형 집행을 서슴없이 해 치웠다.

 

한편 다울링 대사는 본국 훈령에 따라, 이 박사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 상태를 보고하면서 그의 정신 상태가 나빠서 여러번 설명을 해야 겨우 알아들을 정도이며, 정사는 프란체스카 여사 가 30대 초반의 박찬일 비서와 의논해서 알아서 처리한다는 보고를 했다 (1959/8/15). 그런데 이에 앞서, 한국 현지 CIA 보고서 (1959/7/30)에는 이 박사가 그해 (1959) 5월 후반부터 노망이 들었고 (이는 틀림 없이 이 박사 주치의가 정보 쏘스로 보임) 이 박사가 사실상 유고 라는 보고를 한 것을 뒷받침하였다.

 

한국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우선 야당 의원들을 강압적으로 감금한 상태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독재적 행태와, 언론 탄압으로 경향 신문 발행을 정지시키고, 야당 당수를 법으로 옭아매어 죽이는 악행에 분개했는데, 이제 정신마저 몽롱한 이박사에게 대한민국을 더 이상 맡겨 놓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박사와 평소 친분이 있는 미네소타 출신 월터 저드 하원의원을 비밀 특사로 보내서 하야(下野)할 것을 권고했다. (1959년 여름) 이 사실은 비밀 특명이기 때문에 외교 문서에도 나오지 않아서 학자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져드 특사를 경무대로 안내한 미 대사관 서기관의 외교관 회고 회견기에서 필자가 최초로 발굴하였다.

 

다울링 대사는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그가 구상했던 포스트 이승만 시대는 보지 못한 채, 주 서독대사로 영전해갔다. 이승만 박사는 자신의 잘못을 본국에 보고하는 전직 주한 대사들을 음해(陰害)해서 욕을 보인 전례가 있어서 국무부는 그 문제까지 말끔히 뒷처리를 잘 해주어서 다울링 대사에 대한 있을지도 모르는 음해를 예방했다.
 

조봉암 선생 구명 운동

 

조봉암 선생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동안 여야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먼산 보듯 하였으나, 장택상 씨와 윤치영 씨는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를 적극 변호하였다. 장택상 씨와 윤치영 씨는 두 분 다 이승만 박사의 심복이었으며, 국회에서 부의장으로서 같이 조봉암 선생과 일하면서 그의 인간성과 정치 철학을 잘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앞장서서 구명운동에 정진했을 것이다.

 

장 전 총리는 홍진기 법무장관에게 그의 구명을 호소했는데, 홍 장관은 이 승만 생신 뒤에 특사가 될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얘기를 했다고하며, 형 집행을 3.15 선거 뒤로 미루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 선생 변호사들이 대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지만, 기각(棄却)을 당하고 바로 홍장관이 형 집행 명령서를 재가하여, 홍 장관이 이날까지 법살의 집행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홍 장관은 이 박사의 뜻을 따랐을 뿐, 그 당시 누가 법무장관이었다 해도 그대로 했을 것이다 모든 흉계는 그 한사람 (이 박사)에게만 돌리고 그 밑엣 분들은 용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 선생 사후에 장택상 씨는 그의 재판은 무고이며 모함이라고 평하고, 윤치영 씨는 그가 이 승만 박사에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복권 운동과 대법원 재심

 

조 봉암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하게 여기는 많은 인사들이 복권 운동을 여러 차례 하였고, 장택상 총리 시절에 그의 비서였던 김영삼씨가 대통령일 때 복권을 간청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1993).

 

200792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造作) 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 이어서, 201011월에 들어서 대법원은 군인 군속이 아닌 일반인 조봉암을 국군 정보기관인 육군 특무대에서 수사한 것은 위법이어서 재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면서 재심에 들어갔다.

 

20111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진보당의 당수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형된 죽산 조봉암(1899~1959·사진)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1959731일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2년 만이다. 대법원은 또 남북을 오가며 북한의 지령과 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사업가 양이섭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조봉암의 간첩 혐의도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날, 52년 전 자신들의 선배 대법관들이 유죄로 판단한 부분을 모두 뒤집었다. 1959년 판결 당시 대법원은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는 혁신정치 실현 생산·분배의 합리적 계획으로 민족자본 육성 평화통일 실현 등을 내세운 진보당 강령에 대해 국헌에 위배해 정부를 참칭(僭稱), 북한에 동조해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고 했을 뿐 사유재산제와 시장 경제 체제의 골간(骨幹), 대의제도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고 해서 헌법에 위반된다거나 국가변란을 주창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조봉암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원은 풀렸다 하겠다.

 

조봉암 선생의 무죄와 복권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모두 몸을 도사려서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고,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이 모시던 장택상 전 총리가 그토록 조 선생의 구명운동에 힘쓴 것을 알면서도 냉담했다는 것은 그분의 큰 과오로 남을 것이다. 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미국측 기록이 비밀해제되어 한국의 최대 후원국인 미국에서조차 그 분의 구명을 위해 애 썼으며, 한번도 그가 공산주의자이니까 죽여도 된다고 묵인(默認)한 적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이 그의 무죄 판결과 복권에 새로운 힘이 됐다고 필자는 믿으며, 그래서 조봉암 선생과 미국 관계를 소상히 밝혀서 다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매도되지 않고, 또한 미국이 죽음에의 공범이라거나, 구명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평의 목소리가 없어지기 바란다.

 

국가 보안법 파동의 숨은 의도는 조봉암 사형이 목적

 

조봉암 선생 무죄 판결을 설명하는 한 대법원 판사는 1959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소동 (소위 2*4 파동) 의 근본 의도는 조봉암 선생을 법률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범죄 행위는 당시 법으로 재판하는 것이 원칙이다. 형이 가볍게 바뀌면, 가벼운 것을 적용함이 원칙이지만, 그보다 무거운 죄는 적용하지 않는다. 나중에 사형이 들어간 것은 사형을 적용할 수 없는 죄였다. 1950년대 당시 법으로는 간첩 행위는 조봉암을 사형할 수 없지만, 1958122*4 파동 때 간첩 행위에 대한 사형이 추가됐다. 이와 같이 대법관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설명한 것을 들으면, 왜 여당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온통 커다란 소용돌이로 만들면서 무리수를 두었는지에 대한 확연한 답이 나온다.

 

이 박사가 국무회의등 여러 모임에서 조봉암을 제거하라는 어명이 떨어지니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연관 기관에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맞춰서 해치운 야만적 폭거(暴擧)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아퀴노를 저격한 것과 별로 다를것이 없다. 아퀴노는 일격에 암살 당했고, 조봉암 선생은 비겁하게 합법을 가장한 정치적 살인이었다.

  

 

*** 홍진기 씨는 조봉암 선생 처형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다. 그 후에, 그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사돈을 맺어 이건희 씨의 장인이 되는데, 이건희 씨의 후계 수업에 크게 공헌하며, 그를 이병철 회장의 후계자가 되게하는 데 일등 공헌을 하였다. 그의 사위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 보다 사세를 더 크게 확장하여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구었으며, 국내 최대 기업군을 이끌며 국력 신장에 공헌하고, 최대 고용주로서 한국의 많은 인재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으므로, 홍 장관은 그 것만으로도 자신의 업보에 대한 갚음을 다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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