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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자력갱생 북녘경제
가장 가까운 북을 철저한 차단속에서 살다보니 핵과 미사일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미지의 땅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같이 살아야할 사람들인데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녘 사람들도 일생생활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갑니다. 왜곡 없는 북의 과학기술경제와 일상생활을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북에 가서 현장을 관찰한다면 가장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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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충일에

글쓴이 : 김수복 날짜 : 2021-06-11 (금) 06:03:46


미국은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을 현충일(Memorial Day)로 지냅니다. 제가 속한 Veterans for Peace(평화재향군인회)에서는 보통 만하탄 남쪽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행사를 합니다. 전쟁에서 죽었거나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을 그날 기억합니다. 제게 발언 기회가 주어져서 제 가족에게 닥쳤던 전쟁비극과 우리나라의 전쟁 모순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1950625일 전쟁이 터지고 한달뒤에 두 삼촌과 사촌형이 죽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전쟁 전 두해전에 늑막염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래서 결혼한 남성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청상과부(靑孀寡婦)와 약 20명의 애들만 남았습니다.

 

그 때에 미군폭격이 심해졌습니다. 7월 말에 3살먹은 동생과 6살인 저, 9살 누나는 방안에 있다가 미군기총소사에 모두 쪼란이 맞았습니다. 초가지붕에 불이 붙어서 어머니는 바께쓰물로 불길을 잡고 아직 연기가 자욱한 방안으로 들어오니 방바닥에 핏물이 흥건하고 구석에 3명이 기절해 있었답니다. 약방도 병원도 문을 닫았었지요. 울타리 애호박을 짖이겨서 환부위에 붙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 사촌들은 햑교도 못가고 버스차장 방직공장 어디 든 일자리가 있으면 가서 일을 했습니다. 사촌누나는 동네 사거리에 가서 좌판을 펴고 담배 성냥 등을 팔았는데 어느날 과속으로 달리는 국군 차량에 치어서 즉사했습니다. 당시 군인이 세상을 호령하고 있어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요. 슬플 시간도 없이 장사(葬事)를 지냈습니다.

 

1967년도에 군에 입대해서 얼마 안있다가 1968년 겨울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 사건이 터졌습니다. 험악한 순간들이었습니다. 하루종일 훈련받고 군화를 신은채 잠도 잤습니다. 언제 출동할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인 우리 형제들과 죽기살기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이 영해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뒤에 196812월에 푸에블로 선원들이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694월 미군첩보기 EC121이 동해상에서 미그기의 공격으로 격추되며 31명의 탑승해군장병 모두가 수장(水葬) 되었습니다.

 

1970년 만기 제대하고 대학을 맞췄습니다. 1976년 일하던 종합상사의 뉴욕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미국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평화스런 생활을 처음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는 바다건너 코리아가 항상 마음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19484월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것으로 압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미군정 아래 제주도에서 발생한 학살현장에 남편을 찾은 아낙네의 모습입니다. 거적 밑에서 남편 주검을 확힌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저 처절한 여인의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뒤에 거만한 미군장교가 뒷짐지고 서 있습니다. 일본놈들한테 36년을 당하고 나서 이제 해방되었다고 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또다른 사진은 줄줄이 묶여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입니다. 애처로운 눈동자에서 나오는 강렬한 삶의 애착과 말할 수 없는 절망을 함께 봅니다. 어찌 재판도 없이 오직 좌익일 수 있다는 심증 하나로 저렇게 인명을 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1946년 남쪽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점령군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본 일이 있습니다. 약간 차이가 날 수 있지만 당시 70%가 사회주의를, 15%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10%가 소련식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여론을 뒤집어야만 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했습니다. 점령지 아시아인 한국인의 인권은 없습니다. 1948년도에 43일을 기점으로 제주도민 3만에서 4만이 주검을 당했습니다. 미국 구축함이 제주도를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남쪽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살육(殺戮)을 단행했습니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1950625일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3년전 43일에 제주도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3백만의 우리민족의 영혼이 원한을 풀지 못하고 스러졌습니다.

 

오늘 현충일에 한국전쟁에서 스러진 3백만의 영혼과 저의 삼촌과 사촌누나들을 기억합니다. 이제 이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은 분단(分斷)을 철폐(撤廢)하고 다시 남과 북이 하나되어 오손도손 살아가는 나라 만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On Memorial Day

 

 

Before I start my story, I want to apology for what Korean military-the US machinery did in Vietnam. I am sorry for Terresa Mei Chuc. I served Korean Army at Camp Humphrey from 1967 to 1970.

 

Today I want to remember my families and other naïve fellow Koreans who perished in the Korean War. I was born in 1944 in One Korea even though under Japanese occupation.

 

Our family lived in a small farming town in the middle of what is currently South

Korea. Two uncles and a cousin were arrested a month after the War broke and killed. An uncle was an official in a town, another one was a policeman, and the cousin was mechanic. My father passed away of pneumonia 2 years prior to the war.

 

All married men in my family were gone and left behind young widowers and their 2 dozen siblings. My mother inherited a small plot of land barely enough to feed 6 children. There was no hope when all male adults were gone. The sky had fallen down.

 

With no time to sorrow the loss, the US air planes bombed my town and destroyed everything at random. I was 6 years old. I was hit by machine gun on my foot with my 3 and 9 years old two sisters. Our thatched roof caught fire. My mother found her 3 kids with blood all over in a still smoky room when putting down the fire with buckets of water.

 

My 9 year-old sister died of lead poisoning much later from the wound. A bullet was never removed from her thigh. Still I have to massage the broken tendon of my foot.

 

Another cousin, the 4th victim of my family were ran over by a speeding military truck while she was selling daily items in a corner of a narrow street. She was 12 years old.

 

Life was not our choice. We didn’t know what would happen the next day.

 

We survived.

 

While I was in Korean Army, USS Pueblo was captured in January 1968 by North Korean Navy at Wonsan Harbor. A couple of US aircraft carrier moved close to North Korea to revenge any minute for the capture.

 

My unit was in full alert. Long and hard physical training and political class continued to increase adrenalin and hatred of North Koreans. We slept with combat boots on. Any minute we might have to move to the war front at the drop of order to kill our Korean brothers.

 

The captives of 82 sailors were released after the US apologized for the infiltration into North Korean water territory. Peace stayed not too long. On April 1969, a North Korean MIG shot down a US reconnaissance EC 121 with 31 crewmembers on board over North Korean water. All of them were killed. I was discharged from military in 1970.

 

In August 1945, Koreans were indulged in happiness of liberation from Japan thanks to the US. However the US divided Korea by 38th parallel and started injection of American democracy and capitalism into South Koreans. Opinion polls in 1946 shows South Koreans supported Socialism 70 %, American democracy 15% and Communism 10%.

 

The US Army imported McCarthyism over South Koreans to change their belief along with brutal capital punishment if they resisted.

 

I want to share 3 photos with you. These photos were found at the US National Archive.

 

As you see the US Army stood behind the Jeju massacre in 1948. They hired US citizen Syngman Rhee as chief. 40,000 naïve civilians including children, babies and women killed regardless. A quarter of the residence of Jeju killed as simply suspicious communists. The US Navy destroyer blockaded Jeju island and supplied ammunition to police and right wing gangsters during the massacre.

 

Koreans realized much later they were deceived and there were no liberation but the master changed from Japanese to the US. The US already had started the Korean War in Jeju 3 years earlier than the official record of the Korean War broke on June 25, 1950.

 

Today, I want to pay my deep homage to all the killed innocent people including my 2 uncles and 2 cousins. The US is responsible for the tragedy of the killings in Korea. Still tens of thousands of Koreans are anxious to meet their separated families in the other side of DMZ but the US is not permitting the meeting.

 

The US should close military bases in Korea and get out of Korea. This will bring peace and better life for all Koreans and all humanity beyond. It will save billions of dollars of our tax money. Let Koreans decide their fate by themselves.

 

Thank you for all.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수복의 자력갱생 북녘경제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kim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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