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긴 세월 초연히 앉아
공허한 말 부끄럼 없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았겠구나
세상만사 어처구니없는 일들
어떤 연유로 그러한지
넌 말없이 지켜만 보는구나
한 떼의 새가 지나다 머물고
구름도 흐르다 쉬어가는 네 어깨는
어쩌면 그리도 조화로울 수 있는지
비바람 악다구니 하듯 몰아치고
세상은 갈팡질팡 흔들려도
넌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걸 알지만
말 좀 해 보렴
감자를 캐면서
호박이 넝쿨에 앉아 수자폰 부는 날
장마가 잠시 졸고 있는 틈에
호미 날이 감자를 베거나 찌를까
손목은 힘을 빼려 잔뜩 긴장하고
이랑을 좌우로 헤집으며 감자를 캡니다
한 포기 줄기에 달린 감자들도
저 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나서는
인간의 뱃 속을 채우는 형식마저
제 각기 다릅니다
우량아로 태어난 놈 강판에 갈리고는
뜨거운 팬에 데여 감자부침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아 튀지 못하는 놈
압력밥솥에 앉혀 숨 한 번 크게 못 쉬고
팍팍하게 쪄진 감자로,
어디에 쓸까 갈등하다 선택되어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 썰어져
마늘 고추가루와 섞여 볶인 감자로,
쬐끄맣게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시커먼 간장 뒤집어 쓰고 뜨거운 불 위에 끓고 끓면서 조려진 감자로,
감자로 산다는 게 뭔지
시커먼 뱃 속을 채워 줘야하는
기구한 운명이라
태어난다는 건 곧 운명을 달리하는 일
난 그 우울도 모른 채
감자 농사 풍년이라고 좋아 합니다
감자를 캐면서
내 어설픈 호미질에
세 알의 감자는 찔리고 베이는
참변을 당했습니다
세상 사는 일이 감자를 캐는 일과
같을까 우울한 요즘입니다
흔적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이
굽이굽이 선명한
저 방석 놓였던 자리 같다면
어디쯤엔가 붉은빛 남산타워가
어지럽게 서 있을 테고
또 어느 굽이엔가 신혼의 반지하 월세방이 눅눅하게 닫혀 있겠지
어느새 저만큼이나 지나갔나,
돌아 올 수도 없는 길
뭘 그리도 서둘렀을까
돌아보니 흔적은 바르게 남아
거칠던 바람
흔들리던 세월은 다 지워졌고
그늘 넓은 나무 한 그루
곁에 서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