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의 마지막 도시 Shamrock에서 하루 저녁을 보내고 새벽에 나서는데 안개가 자욱히 내려앉았다. 안개가 새색시의 속치마처럼 봄 들녘의 속살을 품었다. 안개 속에 이제 막 수액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의 연푸름이 새색시의 속치마 속의 실루엣처럼 아련하다. 안개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아니다 그동안 며칠 무리를 해서 뛰었다. 잠자리와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을 맞추어 뛰느라 계획보다 늘 더 뛰게 된다. 피로가 몰려온다. 오클라호마로 들어서니 아직도 해발 2,000피트가 넘지만 완연히 사막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평원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텍사스에 사는 선배가 일요일에 맞추어 다섯 시간 이상을 운전을 해서 뛰는 나를 격려차 찾아오기로 했다. 쌀 5 파운드와 김치를 부탁했다. 오늘은 오클라호마의 Erick이라는 도시를 조금 지나 있는 휴게소에다 텐트를 치고 잘 예정이다. 거기서 선배를 만났다. 고맙고 감사했다. 오랜만에 쌀밥에 김치찌게 맛있게 먹었고, 밥보다 멀리 달려온 우정(友情)이 더 배불렀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었는데 그 밥은 우정의 밥이다. 사실 배고픈 건 참아도 외로운 건 못 참는 법이다. ‘오랜 친구가 있어 먼길을 찾아왔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것을 알아서 시간과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우정이 아니겠는가.
사실 지나칠 수도 있는 하찮은 인연이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할 뻔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0 년 가까이 친구처럼 형처럼 그리고 나의 늦은 결혼식에는 주례까지 봐주었다. 장수의 세 가지 비결이 운동과 좋은 음식의 섭취와 좋은 인간관계라고 한다. 광활한 미대륙을 가로질러 달리면서도 외롭지 않은 건 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품어져 나오는 따뜻한 자장(磁場) 안에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하다. 미대륙은 너무 커서 스마트폰이 안 터지는 지역이 많다. 사랑의 자장은 멀리 있어도 충분히 주파수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시그널의 영역이 넓고 광대하다. 온정의 눈길 안에 있을 때 삶은 풍요로워 진다.
마라톤에는 고독이 있다. 사람은 고독하다는 정설은 달릴 때에도 적용된다. 여럿이 같이 어울려 뛸 때에도 다도해(多島海)의 섬처럼 서로는 각각 독립적이다. 나는 뛰면서 홀로서기에 성공했고, 뛰면서 뜨거워진 심장으로 사람들과 통하는 터널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홀로 떨어져 외로이 달려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고, 무리지어 달려도 나는 내 몫의 거리를 나 스스로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론 홀로이고 때론 같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간관계이다. 사람 사이에 지지고 볶는 것을 피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지혜이다.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미대륙횡단 마라톤은 강물의 원류(源流)를 찾아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여 깊은 산 속 옹달샘까지 쫓아 올라가는 탐험여행이다. 마라톤을 통하여 우주를 호흡하여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나의 생각과 마음의 원류를 찾아나서는 자기성찰의 수도여행이다. 달리며 생성되는 맑고 깨끗한 생명에너지는 영혼도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달리면서 나는 누구인가 묻고 그 길 위에서 해답을 구한다.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지,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 지, 무엇을 못하였는지 해답을 구한다. 나는 길을 달리면서 용서(容恕)와 치유(治癒)의 힘을 얻는다.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며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진정 나의 한계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를 극복했을 때에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나를 알려준다. 대단한 일을 멋지게 해냈어도 항상 더 대단하고 멋진 일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