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땅에서 이륙하는 순간은 언제라도 야릇하고 기묘한 감정에 빠진다.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는 순간 내가 살던 현실에서 멀어져가는 쾌감은 대단하다. 현실에 불만족하고 우울증에 걸려 살던 것도 아니지만 현실을 하늘에서 아득하게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이완(弛緩)이 생긴다. 여행은 언제나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그대로 즐겨도 좋다. 그것이 사업여행이든지 봉사여행이든지 그야말로 여행 그 자체이든지 상관없다. “렛쌈삐리리 렛쌈삐리리, 바람결에 휘날리는 비단처럼 내 마음 두근두근 흔들린다오. 날아가는 게 좋은지 언덕 위에 앉는 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네팔 민요 렛쌈삐리리의 한 가락이다.
네팔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곳으로 2015년 4월 26일 오전 11시 진도 7.8의 지진참사를 겪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의 어려움이 있어 구호에 손길을 보태기 위하여 우리는 출발하였다.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고향 가족이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을 갖도록 네팔을 직접 찾아감으로써 한국과 네팔의 우정을 돈독하게 다지는데 기여를 하고자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존중하며 이웃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함께 아픔을 나누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미덕이다.
진오스님과 최종한, 강주형, 강복원, 강명구 다섯 명의 마라톤 팀은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를 출발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까지 300km를 달리며 이곳 주민들과 살갗을 비비며 네팔의 가장 깊숙한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동안 진오스님이 탁발 마라톤으로 모금한 기금을 지진피해 학교 복원 자금으로 전달하는 시간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이 사람들과 함께하며 행복한 그 마음을 얻어 갈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나라의 자연경관을 마음껏 담아 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은 풍요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룸비니는 2640년 전 고타마 싣달타가 어머니 마야 왕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당시의 풍속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왕비는 룸비니 언덕을 지나다 산통(産痛)을 느낀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는 길에서 태어나 80 생애를 사시면서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대승불교는 4월 초파일이 석가탄신일이지만 남방 불교는 달력이 조금 달라 우리와 날자가 약간 다르다. 우리가 룸비니에 도팍할 때면 여기 석가탄신일과 맞아 성지순례를 하러 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석가탄신일에 성지순례를 하는 기쁨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비행기 요금을 아끼려고 광저우 공항에서 다섯 시간 반이나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저녁 늦게 한국인 이구대장이 운영하는 자이안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구대장은 세심하게 일정을 조율하였고 우리를 위하여 통역과 한국요리를 할 줄 아는 조리사까지 알선(斡旋)하여 주었다. 길을 떠나면 언제나 먹고 자고 싸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로 다가온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주 좋은 징조이다. 평생을 산을 오른 그는 산이 좋아서 5년 전에 네팔에 와서 네팔에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그가 산을 오르다 오지에서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선행까지 베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아침 7시에 도르바르 왕궁 앞에서 출발하였다. 가장 화려하고 압도적이어야 할 왕궁의 담장이 군데군데 무너진 채로 보수되어 있지 않았다. 카투만두의 아침은 분주했다. 분주한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먼지와 매연이 카투만두의 아침을 압도하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 길을 달린다는 것은 성지순례도 자선마라톤도 아니고 지옥의 나락(那落)으로 뛰어드는 것이 될 것만 같았다. 좋은 징조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낯선 방랑자에게 불어 닥치는 먼지는 그것만이 아니다. 문화적 환경적인 것들이 먼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도심의 길 위에는 차와 사람과 많지는 않지만 소와 개와 염소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먼지와 매연을 들이마시며 낫둥가 고개를 넘어가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카투만두는 해발 1,300m에 있는 도시이고 낫둥가 고개는 1,600 고지이다. 우리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전거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이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카투만두에서 룸비니까지 달려간다고 한다. 우리일행과 그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응원하며 기면촬영도 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전톤 빨간색 목도리를 내 목에 걸어준다. 우리의 안전과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학교를 끝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에게 ‘나마스테’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건네자 아이들이 신나서 모여든다. 커다란 눈동자의 해맑은 웃음을 가진 아이들의 따스한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그중 짓궂은 녀석은 뒤에서 꼬집고 달아나기도 하지만 개구쟁이라도 괜찮다. 잘 자라서 네팔이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축복처럼 누리고 살아가거라! 가난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너무 가난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43km를 달리고 심례에서 숙소를 정했다. 모텔의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아서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곳 같았다. 에어콘은 설치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찜통 같은 방에서 나의 피곤한 육신은 깊은 숙면(熟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