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은 성가스런 일이지만 그 마저도 즐기려고 한다. 빗방울이 살갗을 때리는 촉감이 좋다. 하늘과 바다가 다 어둠침침한 채로 맞닿아 있었지만 마음만은 빗방울이 가져다주는 아련함을 즐겼다. 그러나 비에 젖은 옷을 입고 하루 종일 달리니 사타구니가 쓸려서 아프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자전거 한 대가 다가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본다. 저는 이렇게 달려서 전국일주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답하니 입이 딱 벌어진다. 어디까지 가세요하고 물어보니 자기는 포항에 사는데 주변을 달린다고 한다. 목에는 커다란 카메라가 달려있다. 그렇게 헤어지고 한참을 달리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났다.
바다와 해송을 열심히 카메라 렌즈에 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다. 한국의 소나무는 참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소나무는 한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가보다. 요즘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놓았는데 보기가 좋다. 내가 지나가는 모습을 그도 다시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포즈를 취해보라고 한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작가세요하고 물어봤더니 그렇단다. 나도 전문 모델처럼 다양한 포즈를 연출해보았다.
바다 한가운데 왕릉(王凌)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왕암이라는 바위가 하나 있다. 그것도 삼국을 통일시킨 대왕의 능으로는 격에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다. 그러나 그 바위에는 죽어서라도 용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대왕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숭고한 정신이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문무대왕릉이다. 화려한 왕궁이나 무덤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있어서 용솟음 칠 것 같은 정신을 이어받고 싶었다. 왜구로부터의 침략을 막겠다는 의지와 함께 우리 역사상 최초로 삼국의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지만 외세에 의한 통일이어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서글픈 한 같은 것도 서려 있으리라!
울산으로 들어서자 홍영환씨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직원 한 사람과 응원을 나왔다.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달리다가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방을 찾으려니 민박이나 모텔은 없고 펜션만 있다. 다른 곳에서는 펜션도 비수기라 가격흥정을 하면 되었는데 이 근방에는 영 흥정이 안 된다. 호텔비보다도 더 비싸게 부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팔각정이 운치 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 비는 그쳐서 달빛이 바다에 어리는데 천하절경이고 이곳에서 하룻밤 유하면 바로 내가 신선(神仙)이겠다. 조금 전에 사온 불고기를 버너에 볶아서 요기도 끝나고 나니 이미 내 마음은 세상사 모든 짐을 덜어버린 신선이 되었다. 바람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바라보니 이 드넓은 동해바다가 마치 내 집 안의 연못인양 끌어안고 바라본다. 달빛이 어리는 바다의 물결을 바라볼 때 한 점 거친 바람이 물결을 때린다.
달빛을 머금은 신비로운 물결의 파문에 넋을 잃고 있는데 모기들이 훼방을 놓는다. 조물주(造物主)만이 구사하는 밤바다의 절경을 감상하는 시간은 결코 오래주어지지 않았다. 모기 때문에 텐트를 치고 들어앉아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자장가 삼으며 곤한 잠에 빠져든다. 비단금침에서의 첫날밤처럼 달콤하고, 파도소리처럼 격렬한 밤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팔각정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