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국토종주 자전거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길을 해파랑길이라고 부른다. 해안선을 따라 철지난 바닷가를 쾌적하게 달린다. 솔밭 사이로 손수레도 신나게 달린다. 해송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눈부시게 찬란하다. 은빛으로 빛나는 물결이 은빛의 파도가 되어 은빛의 모래사장에서 은빛의 거품을 쏟아낼 때면 은종이 울리는 소리보다 청아한 울림이 들려온다. 가다가 힘들면 솔밭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하늘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은빛가루를 마구 쏟아낸다. 먼 바다로 나가는 고기잡이 뱃자국도 은빛으로 빛나고 아침 바다 갈매기 날개도 은빛으로 빛난다. 내 일상도 은빛으로 빛난다. 황금빛이 최고이지만 나는 은빛으로도 최고의 축복을 누릴 줄 알게 되었다.
설악산의 줄기가 잦아드는 끄트머리, 오봉산 품안에 자리 잡은 낙산사(洛山寺)로 들어갔다. 여유가 없는 일정이어서 꼼꼼하게 다 볼 수는 없지만 소망의 눈초리로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해수관음상과 원통보존과 홍련암만은 보고 나왔다. 화재로 소실되었던 문화재를 다시 복원한 손길들에 감사를 표한다. 대사찰을 30분 만에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 만하다.

남애항(南涯港)을 지날 때는 아직 이른 점심시간이었지만 나는 지금 또 때를 놓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을 할 수 없어 횟집으로 들어갔다. 30 년 전 맛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동해안 물회를 먹기 위해서다. 아삭아삭한 싱싱한 가지가지 야채와 강애항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한치와 주인아주머니 설명으로는 마리미 회와 약간의 멍게가 어울렸다. 거기에 초고추장 육수와 메밀국수의 조합은 환상이다. 가히 잘 어울리는 음식 맛의 오케스트라이다. 나는 음식 한 그릇을 먹으면서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의 조화처럼 매콤, 달콤, 새콤, 짭짤함과 아삭아삭하고 쫄깃쫄깃한 맛의 향연을 즐겼다.
해파랑길의 한적함을 만끽하고 달리다 주문진항에 도착하자 각종 수산물 건어물 시장이 우리 재래시장의 번잡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해의 유명한 오짐어 명태가 들어오는 곳이다. 항구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배는 떠나고 어떤 배는 들어온다. 건어물상 주인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내게 얼음물 한 병을 건네준다.
원래 동해시에서 울릉도 가는 배를 타려고 계획했는데 런클 회장님이 동해시에는 주중에는 울릉도가는 배가 없고 강릉에서 배를 타야 더 좋다고 연락이 왔다. 내일 아침 배를 타려면 오늘 강릉항 근처까지 가서 자야한다. 그러려면 오늘 50 km이상을 달려야 한다. 그간 태백산맥 준령을 넘어오느라고 지금 체력이 고갈(枯渴) 된 상황인데 오늘 그렇게 뛰어가기는 무리이다.
경포대는 휴가철도 지났고 주말이 아닌데도 관광객들이 많이 나와 있다. 강릉은 내가 군생활을 하던 젊음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서울에서만 자라던 나는 이곳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강릉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강릉은 내가 손꼽는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이다. 물 좋고 인심 좋고 경치가 좋은 곳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그 당시 못난이였던 내가 제대말년에 경포호수 한 바퀴를 도는 10km 완전군장구보에서 낙오(落伍)를 하고 차량을 타고 부대로 돌아왔던 뼈아픈 기억을 안고 있다. 그리고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더 당당한 모습으로 전국일주마라톤을 한다고 그 길을 달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주중 이만오천 원이라는 사인이 내걸린 앞으로는 바다가 바라보이고 뒤로는 경포호수가 보이는 뻘쭘하게 키가 큰 해송으로 둘러싸인 모텔을 발견하고 들어가 싼 방을 달라고 하니 이만 원만 내고 자란다. 경포호수에서 연인과 함깨 술을 마시면 달이 다섯 개가 뜬다고 한다. 하늘에 하나 뜨고 호수에 하나, 님의 눈동자에 하나 술잔에 하나, 내 마음에 하나. 베란다에 앉아 하늘을 보니 달은 반달이었지만 매일 달리기로 강건함을 얻은 내 마음엔 둥근달이 휘영청 떠서 마음의 달을 사랑스레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