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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불혹(不惑)에 평생의 꿈인 조종사가 되어 경비행기로 미대륙 횡단종단을 4차례나 했다. 비행경력 28년에 비행시간만 5천시간이 넘는다. 쌍발기부터 보잉747 등 모든 종류의 비행면허를 갖고 있으며 ‘조종의 예술’로 꼽히는 매뉴얼 비행의 일인자로 꼽힌다. 오늘도 '애기(愛機)' 파이퍼 워리어를 몰고 하늘을 나는 ‘60대 청년’ 신상철 기장의 파란만장한 항공인생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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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못할 테헤란 탈출기(上)..닥터 지바고의 심정으로

글쓴이 : 신상철 날짜 : 2011-02-05 (토) 01:53:17

1978년 2월 1일 밤이었다. 테헤란 시내에 한인이 경영하는 유스 호스텔 로비에 설치된 TV 에서는 호메이니가 불란서(佛蘭西)로부터 귀국, 공항에서 환영행사 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제는 무언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나와 아내 7살, 6살짜리 두 아들, 세 살백이 딸까지 우리 가족은 거의 한 달을 그곳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곳엔 알리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4년간 한국식당에서 일하며 배운 한국말이 제법 능숙했다. (동남아 친구들이 밥먹고 있으면 일부러 나에게 와서 ‘아저씨! 저녀석들 밥 잘쳐먹는다’하고 놀리기도 했다) 알리 말이 “내일 새벽에 테헤란 공항이 오픈 할 것 같다”고 한다.

 

▲ 이하 사진 www.wikipedia.com

한줄기 서광(瑞光)이 비치는듯 했다. “그러면 내일 택시를 불러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자 자기 친구에게 전화하겠다고 한다. 밤새 가방을 꾸렸다. 다음날 새벽 다섯시. 약속한 택시를 타고 테헤란 공항으로 출발했다.

30분여분 뒤 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어 해당 항공사 Desk 바로 앞에 이민 가방 다섯개를 쌓아 놓고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우리가족 항공권은 그날로부터 보름 뒤의 것이었다. 그나마 한달반 전에 간신히 구입한 티켓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7시 30분쯤 됐을까.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8시가 넘으니 빈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처음 넉넉히 차지하고 있던 우리 가족의 영역이 점점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압축되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을 세워 둘수가 없어 가방위에 올려 놓았다. 막내 딸이 괴로운 기색을 하여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마냥 기다리며 서 있었다.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이 공간을 가려 답답해지니까 가방 위에 앉아 있던 두 아들이 보채며 울기 시작했다. Counte에 있던 공항 직원이 보다 못해 아이들을 사무실 쪽으로 안아 옮겨 놓는다. 갑자기 답답함에서 풀린 두 녀석이 그곳에서 장난치며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며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천진함에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어깨위에 올려놓은 막내는 새벽 다섯시부터 그때까지 물 한모금도 얻어 먹지 못했는데도 보채거나 울지도 않고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눈으로 사방을 처다보며 너무나도 얌전히 있었다. 그 꼬마가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서른여섯살 아줌마가 되어 있다.

12년이란 세월. 젊음의 황금기였던 20대를 송두리째 대한민국 공군에서 보내고 지금의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기백불도 안되는 퇴직금을 받아 전역(轉役)했다. 이 직장 저 직장 전전(輾轉)하는 사이 어느새 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졌다. 워낙 돈 버는데는 재주가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외국에 나가 좀 더 많은 급료를 받는 방법밖에 없겠다 하는 판단을 했다.

해외개발공사에 외국취업을 신청하게 되었고 마침 이란 공군에서 외국인 기술인력을 모집하는 시험에 응시, 천행으로 합격하여 1976년 12월 31일 이란에 가게 되었다. 홍콩, 인도를 경유해 77년 1월 2일 테헤란에 도착했는데 인도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일주일을 체류하는 동안 지금도 그 이상야릇한 인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총 24명이 한국에서 떠났는데 한 호텔에 투숙하면서 날마다 오전이면 이란 공군 대위가 나타나 몇 명씩 데리고 떠나버렸다. 그때 동료들은 거의가 한국공군 출신으로 서로 선후배 관계였다. 그후로 만나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꼭, 독일에서 2차대전때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학살된 유태인들이 생각난다.

드디어 나를 포함해 6명이 호출돼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서북부에 위치한 이란 제2의 도시. 그런데 그쪽 지방이 눈이 많이 와서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으니 열차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헤란 기차역에 데려가더니 열차표만 주면서 우리끼리 알아서 가란다. 그러면서 테헤란역 천정을 가리키기에 올려봤더니 나치 독일의 하이켄 크로이츠 마크가 떡하니 새겨져 있지 않은가! 알고보니 유럽에서 테헤란까지 철도를 2차대전 이전에 독일이 건설했다고 한다.

드디어 야간 열차는 출발하고 밤은 깊어 가면서 점점 도시외곽 시골길로 달리는데 가끔 비치는 불빛으로 밖을 내다보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을만큼 눈으로 덮여 있었다.

 

중동 국가들 하면 보통 사막(沙漠)을 떠올리지만 이란은 평균 해발고도가 1500m 지대에 위치했고 서북부는 고원산간지대로 겨울에 눈도 많이 내린다. 야간 기차는 경유하는 곳마다 역사와 열차사이의 통로가 거의 터널 수준이었다.

 

‘Some where my love’. 이 음악만 흘러 나왔다면 영락없이 Dr. 지바고가 시베리아 유배(流配) 가는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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