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월드컵의 함성(喊聲)이 이 땅을 달구고 있다. 6월 13일, 오늘은 신효순·심미선 두 소녀가 경기도 양주 광적면 56번 도로에서 집채만 한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지 꼭 스물네 해가 되는 날이다.
2002년 그날도 월드컵의 열기에 파묻혀 있었다.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전을 하루 앞두고 붉은 물결로 넘실대던 그 날, 열네 살 두 소녀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수다를 떨며 갓길을 걷고 있었다. 다음 날은 효순이의 생일이기도 했다.
도로 폭 3.3미터. 차량 폭 3.65미터.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으려면 갓길을 밟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피할 수 없는 사고라는 미군의 해명은, 뒤집으면 피할 수 없도록 설계된 구조였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인도 하나 없는 산골 1차선 도로에 폭이 도로보다 넓은 군용 중장비를 보내는 일 자체가 이미 죽음을 예비한 것이었다.
그해 11월, 동두천 캠프 케이시 군사법정의 판결은 대한민국의 자존을 무너뜨렸다. 배심원도, 재판장도, 모두 현역 미군이었다. 마크 워커 하사는 "볼 수 없었으므로" 무죄,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알렸으나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무죄.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는, 기이한 법정 논리였다. 판결 직후 니노 하사는 부인과 포옹하며 웃었다. 워커 하사는 "내 능력 범위를 벗어난 사고였다"고 말하고 닷새 뒤 조용히 한국을 떠났다.
이것이 주권이란 이름 아래 우리가 받아든 정의의 내용이었다. 한미행정협정(SOFA)은 1966년 체결 이래, 미군의 공무 중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미국에 귀속시켜왔다. 공무 여부를 판단하는 공무증명서의 발급 권한은 미군 장성에게만 있고, 한국 법원은 그 판단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법무부가 SOFA 체결 이후 사상 최초로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전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 그것이 협정의 실체였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에서는 나토군지위협정(SOFA)에도 불구하고 독일 검찰의 독립적 수사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일본은 오키나와 미군 범죄가 반복되자 1995년 합의를 통해 살인·강간 등 중대범죄에 한해 기소 전 신병 인도를 가능하게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협상의 여지를 만들었다. 한국은 지금도 그 문턱에서 멈춰 서 있다.
촛불의 기원 — 한 네티즌의 제안
무죄 판결이 나오자 잠자던 민심이 깨어났다. 그리고 역사의 작은 물꼬가 하나 열렸다. 2002년 11월,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김기보 씨가 다음 카페 '주한미군 장갑차 고 심미선 신효순 양 살해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에 짧은 글 하나를 올렸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이자는 제안이었다. 누군가의 집회 공문도, 조직의 결정도 아닌, 이름 없는 시민 한 명의 온라인 호소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1월 30일,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촛불이 켜졌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광장 촛불시위의 효시(嚆矢)다.
광우병 촛불도, 박근혜 퇴진 촛불도, 그 거대한 민주주의의 불꽃은 두 소녀의 이름 위에서 처음 타올랐다. 12월 1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는 10만에 가까운 시민이 모였다. 해방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미 대사관 앞 저지선이 뚫렸다. 촛불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었다. 주권을 잃은 나라의 시민이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는 행위였다.
두 소녀 사건을 처음 보도했던 경인일보는 사설에서 "촛불시위는 가장 평화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수단인 '침묵'을 통해 우리 정부의 미국 의존적인 행태를 질타했고, 오만한 '팍스 아메리카나'에 경종을 울렸다"고 평가했다. 촛불시위는 한민족의 인권선언이자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였다.
스물네 해, 무엇이 바뀌었는가
효순이와 미선이가 살아 있다면 올해 서른여섯 살.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혹은 화가와 디자이너라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어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나이다.
그런데 스물네 해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56번 도로의 폭이 75센티미터 넓어졌고, 붉은 타일의 1.5미터짜리 인도가 생겼다. 그것이 전부다. SOFA는 개정되지 않았다. 지난해 한 해 동안만 미군 관련 범죄가 600건을 넘겼지만, 재판권 구조는 그대로다. 권정호 변호사의 말이 뼈아프다. “지금도 미군 당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 국민이 중상해(重傷害)를 입거나 사망해도 재판권을 넘겨받을 수 없다. 얼마나 억울한 상황인가." (경인일보 2025.11.2)
미군 범죄는 효순·미선 이전에도,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1992년 동두천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오발탄이 민간 차량에 박히는 사고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역사는 반복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얼마나 더 당해야 고치겠는가.
동맹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한미동맹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안보라는 단어를 앞세운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첫 번째 의무라면, 그것이 실수였다 한들 자국 영토에서 자국 국민이 외국 군대의 차량에 짓밟혀 죽었는데도 그 가해자를 제대로 재판할 수 없는 나라를 온전한 주권 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
동맹은 불평등 위에 지속될 수 없다. 진정한 동맹은 서로의 존엄을 인정할 때 단단해진다. 미국의 동맹국 중 가장 강고한 관계를 유지하는 독일과 영국도, 자국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미군을 규율한다. 한미관계가 이념의 대결 구도로 소비되는 사이, 정작 법과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에 세우는 논의는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문제는 반미도, 친미도 아닌 인권의 문제다. 한국인의 생명이 한국 땅에서 한국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은 진영 논리로 덮을 수 없는 헌법적, 인도적 질문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효순이·미선이의 평화공원이 양주에 들어섰고, 기록관이 세워졌다. 시민들이 스스로 나서 두 소녀를 기억하고자 한다. 국가가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을 시민이 대신하는 것이다.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현실이다.
이제는 국가가 해야 할 몫을 물어야 할 때다. 최소한, 우리 국민이 사망한 경우에 한해 재판권 이양을 요구할 수 있는 조항을 SOFA에 명문화해야 한다. 그것은 반미가 아니라 문명국가의 기본 요건이다. 한미동맹의 미래는 불평등을 묵인(默認)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파트너로서 법과 인권의 원칙 위에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달려 있다.
두 소녀의 죽음으로 타오른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효순이·미선이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두 소녀를 애도하는 일이 아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그 겨울 촛불을 들고 우리는 약속했다. 두 소녀의 이름을 잊지 않기로. 그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를 바꾸는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소곤이의 세상 뒷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