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중 술은 유일하게 나 혼자 많이 마신다. 이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친구들이 놀려대는 것에 따르면 주.병.진이라는 나의 이름은 술 ‘주’, 술병 ‘병’, 진로 ‘진’ 으로 지어졌다 한다.
나는 술을 일찍 배웠다. 처음 술을 마시고 주정한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이다. 제사 지내려고 주전자에 받아놓은 약주를 물인줄 알고 마셨다.
첫모금에서는 물인 줄 알았고, 두번째는 물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세번째는 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만 마셔야 겠구나 생각할 때는 네모금째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취기가 몸에 오르자 세상이 좀 우습게 보였고, 꽤 주정도 했던 것 같다. 그날의 실수이후엔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는 .
언젠가 술에 취해 거리를 걷고 있을때는 길거리 쓰레기통이 두눈을 부릅뜨고 날 째려보길래 힘껏 걷어차서 부러뜨린 적도 있다. 물론 내 발도 함께 부러졌지만....
술좌석에서 함께 어울려 마시다가 슬쩍 말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은 싫다. 안마시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도 싫고, 어떤 안주건 큰것만 골라먹는 사람도 싫다. 먹은 것을 다시 꺼내 확인해 보는 사람도 싫다... 자기 몸을 못가누는 사람도 싫다. 그러나 내가 계산하기로 했는데, 슬쩍 나가서 미리 계산하는 사람은 너무 좋다.
술을 끊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상식이하의 행동이다. 매일 마시고 건강을 해치는 것도 문제지만 술을 끊는 것도 문제라 생각한다. 술은 인생이요, 세월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약이다. 나는 술 때문에 건강을 해치지도 않고 술때문에 내가 꿈꾸는 세계에 지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셔야겠다... -주병진의 스타스토리에서>
주병진(朱炳進). 개그맨이라고 하기엔 활동폭과 존재감이 너무나 큰 방송인이다. 주병진이 지난 1일 12년만의 방송복귀식을 치렀다. MBC의 ‘주병진 토크 콘서트’이다,
개인적으로 주병진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79년을 전후한 무렵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라디오의 공개 방송이었다.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젊은 친구가 (라디오니까 보이지 않지만 본인이 광운공고를 언제 졸업했다 했으므로^^) 재담(才談)을 하는데 아주 재치있었다. 당시는 개그맨이라는 용어도 낯설때였고 그가 정식 코미디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입심좋은 젊은 사람이 라디오에 나온 모양이다 했었다.
주병진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상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78년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 명동에 있는 <쉘부르>에서 열린 아마추어가수를 선발하는 작은 콘서트에 나간 것이 연예계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DJ 이종환이 심사하고 가수 권태수가 사회를 본 이 콘서트에서 그는 노래는 안하고 엉뚱한 개그로 관객들을 포복절도케 하여 사회자로 픽업되는 행운을 안았다. 이후 소문이 나서 그는 TBC 라디오의 공개방송(내가 들었던 그 방송이었다)에 고정출연하게 되었다.
그가 TV에 출연하게 된 것이 당시 TBC-TV의 코미디 프로를 연출하던 김웅래 PD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입문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주병진은 김웅래 PD 앞에서 즉석에서 개그를 하며 자신의 진가를 확인시켰다고 한다. 방송 데뷔는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사도 늘고 역할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방송통폐합으로 TBC가 KBS-2TV가 되면서 그의 일터도 사라졌다. 와신상담하던 그는 또다시 PD를 찾아가 읍소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서세원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MBC <영일레븐>의 김명수 PD를 찾아가 가진 재주를 다 펼쳐보였지만 “잘하긴 하는데 우리는 서세원씨 하나면 충분해”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던중 KBS <젊음의 행진>의 윤인섭 PD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프로에 출연하지 않겠냐는 제안에 무일푼이었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차비를 꿔서 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경쟁프로인 MBC의 <영일레븐>을 누르기 위해 PD와 출연진 전체가 혼신의 힘을 다했고 주병진은 ‘갈증나’ ‘애들 데리고 일못하겠네’ 등의 유행어를 낳으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라디오 프로도 진행하고 이미숙과 함께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그는 소위 스타덤에 올랐다.(그의 영화는 솔직히 나도 기억이 안난다. ‘가슴깊게 화끈하게’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고아로 자란 한 청년이 겪는 에피소드들을 모은 것이었다.)
70년대까지 한국의 코미디는 요즘 말로 몸개그인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를 이뤘고 개그의 원조라면 고영수나 송영길 같은 이가 있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주병진은 동시대에 활약한 이홍렬이나 서세원과 함께 개그맨 시대를 연 주역임에 틀림없지만 본인은 정작 개그맨이라는 호칭에 불편함을 가졌던것 같다.
주병진이 훗날 시작된 방송국 공채 개그맨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본격 연예활동을 벌이기 전 누나와 함께 해변가요제에 출전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78년 그는 동양방송 TBC가 연포해수욕장에서 주최한 제1회 해변가요제에 누나(주선숙)와 함께 듀엣을 이뤄 출전했다.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구창모 배철수 왕영은 등 훗날 쟁쟁한 스타들이 된 인물들과 당당히 겨뤘다면 좀 놀랄 일이다.
그 가요제에서 대상은 징검다리의 ‘여름’이 받았고 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가 우수상, 런웨이(배철수)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 블루 드래곤의 ‘내 단하나의 소원’, 조인숙의 ‘요즈음’이 장려상, 열기들(Febers)의 ‘그대로 그렇게’, 벗님들의 ‘그바닷가’가 인기상을 차지했다. 돌이켜보니 지금도 애창되는 대단한 곡들이 참 많다.
주병진-주선숙 남매의 ‘속삭여주세요’는 제1회 해변가요제라는 제목을 달고 본선에 오른 다른 곡들과 함께 음반이 출시됐다. 주병진의 노래 실력은 어떨까. 방송에서 한두번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리 썩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
어쨌든 시작은 가수일지언정 유명세를 얻은 포맷은 개그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가 한창 인기가도(人氣街道)를 달리던 80년대 후반 일간스포츠에 스타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연재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포츠연예신문에 연재되는 스타고백물은 연예부 기자들이 그 주인공을 인터뷰하여 대필(代筆)을 하는데 주병진 편은 정리한 기자가 재치있어서인지, 아니면 주병진이 그만큼 재미있는 얘기를 잘 풀어준 덕인지 몰라도 배꼽잡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그 무렵 주병진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83년 10월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방송계를 또다시 떠나게 된 것이다. 한번 인기의 맛을 본 사람은 그것이 없어졌을 때의 상실감을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더구나 주병진은 인기가 서서히 식은게 아니라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수렁에 빠진 것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던 것 같다.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속죄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심장병 어린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4월 국토남단 제주도 서귀포에서 임진각까지 621.3km의 달리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국토종단 마라톤’을 단행했다.
필자가 주병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시작한다고 했을때만 해도 그냥 한번 쇼이벤트를 벌이나보다, 생각했지만 막상 그가 14일간 하루 50km를 사력을 다해 달리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5월 5일 어린이날 임진각에 골인하는 주병진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핼쓱한 모습이었다. 발바닥은 물집이 수없이 터지고 겨드랑이마저 쓸려 터지고 중간엔 배탈 설사까지 나는 등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점에 골인할 때 80kg이 넘는 체중이 10kg 이상 빠져 있었다.
그 모금운동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는 당시로선 거액인 5천만원의 국민성금을 모아 열명의 어린이들에게 새 삶을 안겨줄 수 있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끗이 씻어낸 그는 다시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