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태라는 말이 난리다. 민주당 홍익표 대변인이 박정희를 귀태라고 지칭하며 ‘태어나선 안될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반발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잠시 헷갈렸다. 귀테라고? 그럼 좋은 뜻 아닌가. 보기에 격조있는 사람을 ‘귀테가 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좀더 살펴보니 실소가 나왔다. 귀테가 아니라 귀태였다. 귀신 ‘귀(鬼)’자에 잉태할 ‘태(胎)’, 귀신의 잉태쯤 되겠다.
그런데 이게 왜 태어나선 안될 사람이 되었을까. 홍 대변인이 11일 오전 10시20분 국회 정론관에서 오전 브리핑을 통해 말한 전체 내용은 이렇다.
“작년에 나온 책 중에 하나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의 표현 중에 하나가 귀태(鬼胎)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鬼)자에다, 태아 태(胎)자를 써서, 그 뜻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 당시 만주국의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에 세운 괴뢰국에,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다. 아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잘 아시다시피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이다. 최근의 이 두 분의 행보가 남달리 유사한 면이 있다. 첫째,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를 부정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시고, 박정희 시절의 인권탄압과 중앙정보부의 정보기관이 자행했던 정치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이 두 분이 미래로 나가지 않고 구시대로 가려하는 것 같다. 이제 노골적으로 아베총리는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고 있고, 최근 행태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유신공화국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홍 대변인이 언급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은 지난해 가을 번역 출판됐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저서다. 그는 이른바 쇼와시대로 일컬어지는 1905~1945년을 '귀태의 40년'이라고 정의했다. 두 사람의 정치 여정 모두 일본이 만주에 세웠던 만주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설명하며 이들을 귀태라고 묘사한 것이다.
알고보니 문제의 표현은 공동번역자인 강상중 현무암 교수가 책의 주석에서 귀태의 뜻을 “고 시바 료타로(1923~1996)가 만들어낸 일본식 조어다. 의학적으로는 융모막 조직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증식하는 '포도상 귀태'를 뜻하지만, ‘태어나서는 안 될’, ‘불길한’ 같은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다”고 설명했기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원저자가 밝힌게 아니라 번역자가 부정적 뉘앙스를 부연 설명한데 따른 것이다.
물론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격분(激憤)은 이해한다. 현직 대통령을 귀신의 잉태물처럼 폄하(貶下)했는데 가만있으면 등신 소리를 들을 판이다. 다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뜻으로 널리 퍼진 것은 언론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대로 전달하면 대통령의 심기를 너무 자극할까봐 알아서 배려한 것일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청와대의 때늦은 분기탱천이 새누리당의 대국민 협박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홍 대변인의 발언은 1시간30분쯤 지난 오전 11시53분 네이버 등 포탈사이트를 통해 첫 보도가 나갔다. 새누리당은 초기엔 반응이 없었다. 최경환 원내대표와 민주당의 전병원 원내대표가 만나 국정원 국정조사와 관련해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자료를 열람, 4대강 감사 관련 상임위 개최 등에 대해 합의했다. 양측의 회담 내용은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와 민주당 정성호 원내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누구도 귀태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당의 공식적인 발언이 나온 것은 4시간30분이 흐른 오후 4시20분 새누리당 김태흠 원내대변인의 입을 통해서다.
“오늘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발언을 보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과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야가 정치적 공방을 하더라도 금도가 있다. 홍 원내대변인의 막말과 박 대통령에 대한 도가 넘는 비하 발언은 대한민국과 전체 국민을 모욕한 것이다. 대변인은 그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다. 오늘 홍 대변인의 발언이 민주당의 공식 입장인지 묻고 싶다. 민주당과 홍 의원이 스스로 ‘귀태(鬼胎)’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당장 국민과 대통령께 사과해야 할 것이다.”
김 대변인의 어조는 강경했지만, 해당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을뿐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발언을 철회(撤回)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는 노기(怒氣)가 등등(騰騰)했다.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금도를 넘어선 민주당 의원의 막말에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이는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맹비난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홍 원대대변인은 오후 7시쯤 구두브리핑을 통해 “귀태 표현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확대 해석되어 대통령에 대한 인식공격으로 비춰졌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photo by Newsis 권주훈 기자
그러나 청와대는 한건 잡았다는듯 물고 늘어졌다. 다음날 오전 브리핑을 통해 이정현 홍보수석이 직접 나와 강도높게 비판을 했다.
“정치권의 평범한 막말 중 하나로 볼 수 없는 수준이며, 대선불복종 연장선의 완성이다..우리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그런 막말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망치고 국민을 모독하는 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photo by Newsis 김영욱기자
청와대의 분기탱천을 감지한 새누리당은 전날 여야 원내대표간의 합의 내용을 모두 무위로 돌리는 엄청난 강경모드로 선회했다. 12일 오전 9시 여야 원내대표간 합의사항이었던 남북정상회담 자료 열람위원의 회의 일정을 취소한다고 밝힌데 이어 국회 운영위 회의가 예정됐던 오전 10시에 새누리당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연다고 밝혔다.
급기야 이날 국회에 잡혀 있던 모든 정치 일정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열람위원들이 성남에 있는 대통령기록관에 방문해서 열람목록을 살펴보는 일도 홍준표 경남도지사 및 경남도 공무원들의 국정조사 불출석인에 대한 국정조사 증인에 대한 고발의 건을 다루려 했던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전체회의도 연기됐다.
새누리당은 귀태 발언이 대한민국과 전체 국민을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대변인의 발언은 번역된 책에 있는 내용을 빗댄 것이다. 합법적으로 출간된 책을 인용한 것이 모욕이라면 그 책부터 문제 삼아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은 박정희와 그 가족들, 나아가 지지자들이 분개(憤慨)할만한 것이지만 대한민국과 전체 국민을 모욕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왜 대한민국과 전체 국민을 박정희와 동일시 하는가. 그 내용에 공감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인”이 아닌가.
전체 문맥상 홍 대변인이 사과하는 것도 '오바'지만 정치공세를 펴려는 여당의 의도가 드러난만큼 유감 표명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여기서 귀태 논란은 끝났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참지못했고 정작 새누리당이 넘지 말아야 할 금도를 넘었다. 해프닝을 대사건으로 키운 것이다.
귀태발언이 전체국민을 모욕했다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이야말로 여야가 합의한 사항을 파기하고 모든 국회일정을 취소하는 오만(傲慢)방자함을 드러냈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망치고 전체 국민을 모독한게 아닌가.
까놓고 말하자. 귀태 운운이 당사자에겐 열불 터지는 일이었겠지만 상관도 없는 일로 대한민국을 팔며 국회 기능을 마비시켜도 되는가 말이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과 공공의료 국정조사 등 국회 일정을 전면 취소한 데 대해 집권 여당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는 12일 새누리당 의원들은 한명도 나오지 않은 열람위원 상견례 자리에서 “새누리당이 회의록 열람과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여야가 합의한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더이상의 국정 혼란과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서 국회가 재적의원 2/3 이상 찬성을 통해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인데 국론분열을 막을 책임이 있는 집권 여당이 일정을 취소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한 술 더 떠 김한길 대표의 사과와 홍 원내대변인의 대변인직 사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을 위한 열람위원 사퇴 등을 요구했다.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는 “홍 대변인이 유감 표명을 했지만 진정성도 없고, 조건을 달았다. 정식으로 정론관에 가서 사과를 해야 한다. 민주당 지도부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당 대변인은 자기 의견이 아닌 당 지도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말하므로 말을 조심해야 한다. 정치인에게 말은 대한민국 역사가 될 수 있는데 대변인으로서 금도를 넘었다"고 훈계했다.
이에 민주당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는 “국회 일정은 개인 발언과 다르다. (홍 대변인이)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해서 (새누리당이) 청와대 대변인이 돼선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행태”라고 맹비난했다.
민주당은 홍 대변인이 문제된 발언에 대해서 지도부와 협의 후에 유감 표명한 만큼 지도부가 나서서 사과를 할 수 없다면서 새누리당의 행태에 “국회의 파행(跛行)을 핑계 삼기 위한 꼬투리잡기”라고 비판하면서 국회 상임위 활동 복귀를 거듭 촉구했다.
결국 12일 저녁 홍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일부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우선 사과의 말씀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고 원내대변인 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김관영 수석대변인도 김한길 대표의 말이라며 “어제 발언은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국정원 국정조사 등 모든 국회 일정이 정상화되길 바란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더 이상의 꼬투리는 잡히지 않겠다는 포석이다. 너무 빨리 사퇴와 유감표명이 이뤄진 탓일까. 새누리당은 어쩐지 뻘쭘해 보인다.
새누리당 윤 원내수석부대표는 “우리가 요구한 것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사과를 해달라는 것”이라며 “이를 충족했는지 판단 여부는 13일 당 지도부와 논의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국민을 들먹인다. 이번엔 ‘눈높이’라는 피상적 단어까지 붙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국민의 눈높이는 대체 지상 몇센치미터란 말인가. 간밤에 또 어떤 말라 비틀어진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문득 갈릴레이의 말이 오버랩된다.
홍 대변인은 이런 말을 되뇌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서 귀태는 귀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