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첫 해외출장지가 태국 방콕이었다. 왕년에 킹스컵 국제축구대회하면 제법 권위있는 대회였다. 왕의 컵이니 태국에선 그야말로 최고의 대회였을 것이다.
70년대초 우리나라도 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를 만들었는데 태국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시절 박정희가 시월유신으로 사실상의 영구총통이 되고보니 왕이라도 되고 싶었는지 '박스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그거 박카스컵이에요? 아님 상자컵(빡스컵)? 할지 모르겠다..ㅎㅎ 그넘의 박스컵이란 이름 때문에 어느 선진국 클럽이 출전을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독재자를 미화하는 그런 축구대회엔 우리 안가’ 하구말이다. 참 개념있는 사람들 아닌가. 비록 축구경기지만 인권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독재자가 문패를 축구대회이름으로 붙이는데 왜 거기에서 들러리 서주냐 이거다..
암튼 태국 방콕에서 삼발이라 불리는 툭툭이도 타보고 축구장과 호텔을 오가며 낯선 이국의 풍물을 눈으로 즐겼다. 그때 말레이시아 대표팀 단장이 그 나라 왕자가 왔는데 본부석에서 몇 번 마주치다보니 대화도 나눠보고.. 암튼 며칠 계속 보니 약간의 친분이 생겼다. 남의 나라 왕자에 내가 주눅들 일도 없고 스스럼없는 모습에 한 선배가 “당신 말레이시아 왕자 친구 생겼네”라고 농 삼아 말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는 여러 부족이 왕을 돌아가면서 맡는다했고 그 왕자는 직전 왕의 아들이었다. 본부석에서 이 왕자랑 같이 관전하던 어느날, 음료를 가져온 태국의 여성이 왕자가 앉아 있는 2m 전방부터 무릎을 꿇은 채 기어오면서 바치는 것이었다. 영화 보면 시종이 왕에게 갖다 바치는 그런 식이었다.
비록 남의 나라 왕이었지만 태국에 왕실이 있으니 자기나라에 준해 예우(禮遇)하는 것이었다. 그걸 보니까 이런 높은 분 옆에서 다리 꼬고 앉아있어도 될까 약간은 송구한 마음도 들었다..ㅎㅎ
현지 거주자로부터 태국인들이 왕실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언젠가 극장에서 영화상영전 우리나라 애국가같은 왕의 찬가가 울려퍼지는데 한 외국인 관객이 자리 에 앉아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무자비하게 두드려패서 숨지게 한 태국인이 영웅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나?
그때나 지금이나 안타깝게도 태국은 군사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는데 군부에게도 신성불가침은 왕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 왕이 재가(?)를 해야 성공한 쿠데타가 된다니 말이다.
엊그제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태국의 추억(追憶)이 떠올랐다. 기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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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한 남성이 국왕의 애견을 모독(冒瀆)한 죄로 37년간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뉴욕타임스는 14일 타나콘 수리파이분이라는 공장노동자가 부미폰 국왕의 애견을 비꼬는 표현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돼 군사법정에서 37년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타나콘은 지난주 자신의 집에서 체포됐으나 14일에야 무슨 죄목이 적용됐는지 공개됐다. 국왕의 애견에 대한 불경죄(不敬罪)에 선동죄(煽動罪)와 왕실모독죄가 추가됐다. 또한 역대 국왕의 기념물을 군부가 건립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부패문제를 거론한 것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고 있다.
타임스는 이번 사건은 태국에서 왕실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과보호의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한 유명 학자가 400년전 죽은 왕을 모독한 혐의로 기소됐고 태국 주재 미국대사를 포함한 일단의 사람들이 비슷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타나콘의 법정대리인 아논 눔파 변호사는 "이른바 국가원수모독죄(lèse-majesté)의 경계가 최근들어 너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왕과 왕비, 직계가족의 명예가 손상될 때 적용되는 왕실 모독죄가 집에서 키우는 개한테까지 확대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비판했다.
문제의 왕실 개는 '통댕(Tongdaeng)'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국왕에 큰 존경심을 갖고 있는 태국 국민들은 이 개 역시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있다. 암컷 잡종견인 통댕은 본래 떠돌이 견이었으나 푸미폰 아둔야뎃(88) 왕이 구조해 왕실에서 살게 돼 일약 '견생역전(犬生逆轉)'을 한 주인공이다.
푸미폰 국왕이 2002년 통댕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은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았다. 이 책에선 통댕이 적절한 매너와 공손함을 갖췄으며 의전도 익숙해서 항상 왕보다 낮은 자세를 취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태국 미디어는 이 개를 부를 때 여성에게 쓰는 정중한 존칭인 쿤(khun)으로 표현한다.
지난해 쿠데타로 집권한 현 군사정부는 왕실모독죄를 가혹하게 적용하고 이를 빙자(憑藉)해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 언론인과 학자, 정치인들을 구금하고 학생들을 군사캠프에서 훈련시키는 등 인권유린을 하고 있다. 반체제인사들은 정치적 행동에 관여하면 재정적 징벌을 받겠다는 서약서를 강요받고 있다.
타임스는 태국 주재 미국대사 글린 데이비스가 최근 외신기자들 앞에서 태국 군사법정이 국왕모독죄를 적용하면서 너무 가혹한 형량을 선고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과 관련,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국제인권단체와 유엔이 비판하고 있지만 태국 군사정부는 개의치 않고 있다. 지난 8월 유엔인권최고사무소 대변인은 태국에서 왕에 대한 모독으로 기소하는 일들이 증가하고 장기간의 금고형이 선고되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가혹한 형량에 경악한다"고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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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인터넷 서핑을 해보니 방콕은 떠돌이개의 천국이라는 글들이 눈에 띈다. 유기견(遺棄犬)들이 많다는건데..글쎄 내가 갔던 20여년전엔 잘 느끼지 못했는데 그후에 많아진건지 모르겠다. 개들이 사람을 두려워도 않고 길가나 집, 건물 주변에서 신경도 안쓰고 널부러져 자기도 한다는데 사람이 죽어서 개가 된다고 믿기도 하는데다 불교국가인지라 개들을 함부로 살생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그렇지 왕의 개 통댕을 모독했다고 중형을 선고받는다면 참 한심무인지경(?)이 아닐 수 없다. 태국의 국민개 통댕만 욕먹이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