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영화제에 유명영화배우가 사회를 맡았다. 유명 배우가 사회를 맡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가 눈길을 받은 것은 영어사회를 봤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회는 여성 아나운서가 맡았다.)
문제는 그가 영어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과거 미국에서 영화유학을 잠깐 하긴 했지만 생활영어 구사하는 정도의 실력으로 국제영화제 사회를 맡기다니 시킨 사람도 한심하고 응한 사람도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영화제에서 그 배우의 영어발음은 듣기가 민망했다. 우리 귀에도 거슬린데 영어권 청중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생각하니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영화배우가 사회를 본 행사로 기억에 남는 것은 또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제적인 축하행사가 열렸는데 영어 MC를 재미동포 배우 릭 윤(윤성식)이 맡은 것이다. 릭 윤은 워싱턴에서 태어난 한인2세이니 영어권이다. 영어발음에 문제가 있을리 없다.
그런데 TV를 지켜보는 내내 그의 영어발음이 거슬렸다.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월드컵(World Cup)’이었다. 월드컵개최 축하행사이니 멘트속에 ‘월드컵’이 시도때도 없이 등장한다.
그때마다 릭윤은 ‘월드컵’을 완벽한 영어발음으로 ‘워얼~컵’이라고 발음했다. 우리는 월‘드’컵이지만 ‘드(d)’ 다음에 모음이 없으니 사실상 묵음화(黙音化)되어 ‘워얼~컵’처럼 들린 것이다.
국제행사이지만 압도적 다수인 국내시청자들에게 릭윤의 ‘월~컵’은 무슨 강아지 짖는소리만큼 이상하게 들렸다. (릭 윤을 강쥐로 비하한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 그가 전문 MC가 아닌만큼 영어사회도 그리 썩 잘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얼추 20년이 지난 요즘 대한민국은 사람들도, 나라도 과거보다는 많이 세련되졌다. 영어몰입교육의 광풍탓인지, 아님 세상이 글로벌화가 되서인지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국의 젊은이들도 참 많다. 이젠 영어도 얼마나 고급영어를 구사하느냐가 경쟁력이 될것 같다.
그러나 아직 국민들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요즘 열기가 한창인 런던올림픽을 중계하는 방송사도 그중 하나다. 특히 장기간 파업사태로 홍역(紅疫)을 치른 MBC가 집중적인 구설을 빚고 있다.
올림픽 개막식을 현지에서 중계한 MVC는 진행자로 아나운서 김성주와 함께 ‘위대한 탄생2’ 준우승자 배수정을 내세웠다.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진행자 경험이 없는 그녀의 진행은 시종 어색했고, 급기야 영국 선수단의 입장으로 행사가 절정에 오르자 “영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발언까지 해서 시청자들을 어이없게 했다.
네티즌들은 “아무리 영국 국적이라고 해도 한국 방송에 나와 ‘영국인 운운’하는 것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자신을 한국인이 아닌 영국인으로 생각하나보다”라고 비판했다. 배수정은 나중에 “영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런던올림픽이 개최돼 자랑스럽다는 의미인데, 한국어가 서툴러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배수정은 잘못이 없다. 전문MC의 소양도 없고 한국말마저 어색한 사람을 그 중요한 MC로 세운 MBC의 무지몽매함이 빚은 예정된 결과였다. 영국서 태어나 런던정경대를 졸업하고 회계사로 일하는 여성의 ‘스펙’이라면 ‘그깟 MC’ 쯤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생방송 MC는 베테랑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우리 말 구사력도 떨어지는 사람을 메인 MC로 세웠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나마 ‘영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 정도로 끝난게 다행이 아닐까.
‘영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자랑스럽다’라는 말이 잘못 전달됐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올림픽 개막식 중계 MC가 ‘자랑스럽다’는 개인적 소회를 늘어놓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굳이 MBC가 런던출신의 뉴스메이커를 세워 차별화를 꾀하고 싶었다면 전문MC 2인에 객원MC로 현지 분위기를 알려주는 양념 역할을 맡겼어야 할 것이다.
그런가하면 MBC는 개막식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방송을 끊고 광고를 내보내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부른 개막축하공연은 수많은 관중들이 따라할만큼 열광의 무대였다. 이것이 중간에 갑자기 끊어진 것이다. 매카트니의 굴욕이라고 해야할까.
실수(失手)는 아니지만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장면도 있다. 런던 현지에서 진행을 맡고 있는 MBC 아나운서 양승은이 검은색 원피스에 망사가 달린 베레모를 쓰고 나와 '장례식 의상'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잇딴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양승은은 같은 컨셉의 의상을 연일 계속 입고 나와 논란을 부추겼다. 협찬사와의 약속때문인지. 그것이 영국과 런던의 이미지를 살린다고 믿었는지, 어쨌든 그녀의 의상은 참으로 ‘거시기’ 했다.
이밖에 박태환이 수영 400m에서 실격판정을 받은 직후 무리한 인터뷰를 시도한 것이나 실격판정을 내린 심판이 중국심판이라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알린 것도 호된 비난을 받았다. 무엇 때문에 실격당했는지 이유를 몰라 황당해하는 박태환에게 “왜 실격당한것 같냐?”고 묻는 얼간이가 있다니... 시청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심판진과 경기운영자에게 달려가 확인해야지 선수에게 쪼르르 달려가 왜 실격당했냐고 묻다니 말이다.
아무려면 박태환이 “아 예, 사실은 제가 점프전에 몸을 움찔했거든요. 그게 걸렸나봐요..허허허” 하고 말할줄 알았을까.
88올림픽을 주최한지 어느덧 24년. 강산이 두 번하고도 절반은 더 바뀐 세월이지만 국제무대의 무식쟁이들은 변함없이 많은 모양이다. 또 어떤 민망한 장면들이 나올지 기대반 걱정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