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한국현대불교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성철 큰스님이 93년 입적하자 당시 신문들은 너도나도 스님의 법어를 주먹활자로 뽑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세상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한 것은 성철스님이 걸어온 철저한 수행자의 삶이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8년 동안 단 한번 눕지도 않은 장좌불와(長坐不臥)를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돈오사상(頓悟思想)과 중도사상(中道思想)의 대이론가였던 스님은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추대식에 참석하는 대신, 저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했다.
성철스님은 평소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권했다. 당신 자신도 청빈하게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고 평생을 작은 암자에서 살았다.
큰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책자들이 수십종 나오는 등 한동안 한국사회는 ‘성철스님 신드롬’이 불어닥쳤다. 세간에서는 성철스님덕분에 불교신자가 크게 늘었다는 말도 들렸다. 성철스님을 통해 불교가 새롭게 조명이 된 것이다.
성철스님이 입적할 때 필자는 연예부 기자였다. 종교는 문화부 소관이었기에 필자가 직접 취재하거나 기사를 쓸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문화부와 나란히 이웃했기 때문에 종종 불교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종교담당이었던 후배기자를 통해 이따금 촌지를 받는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고마움의 정표인지, 관행의 사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부님이나 목사님, 스님이 기자에게 촌지를 준다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배는 분명히 그랬다. “조계종 스님이 봉투를 주더라구요. 좀 민망하대요..” 기자에게 촌지를 주는 스님이라, 금액의 다소를 떠나 기업의 홍보담당 직원도 아니고 가사 장삼을 걸친 스님이 봉투를 주는 풍경은 낯설다기보다 웃지못할 코미디였다.
그런데 그 촌지는 무슨 돈으로 만든 것일까. 스님이 노동을 해서 벌었을리는 만무하고 필경 신도들의 시줏돈이었을텐데 불자들이 부처님전에 합장하고 넣은 불전의 일부가 기자의 촌지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사지가 오글거릴 지경이다.
필자가 순진했는지 멍청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때는 그랬다. 하기야 저자거리에서 속진(俗塵)에 쌓인 중생들과 씨름해야하는 스님네 입장에선 만부득이 해야 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에겐 있을 수 있다며 넘어갈만한 것이 감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종교가 드리우는 성스러운 이미지때문이다. 종교와 종교인들이 세금을 면제받거나 큰 혜택을 받는 것도 그들 성직자들에 대한 존경과 예의 또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특히나 불교는 삭발을 통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깨달음을 위해 용맹정진(勇猛精進)의 수행이 전제되는 종교이다. 성철스님이 40년간 손수 기워입은 누더기 장삼을 입은 것처럼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스스로에 엄격하고 청빈한 수행의 삶이 그려지는 까닭이다.
안타까운 것은 성철 스님이나 연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같은 덕높은 큰스님들 덕분에 높아지는 불교의 위상을 불교계 스스로가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된 이른바 ‘도박승’ 파문은 조계종으로 대변되는 오늘의 불교계가 얼마나 한심한 지경인지 여지없이 까발려졌다.
보통 사람들이 특급호텔에서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을 했어도 문제가 되는 세상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스님과 말사(末寺) 주지들이 끼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며 도박을 했다니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올 정도다. 더구나 다음날 큰스님의 49제를 모시기 위해 온 스님들이었다니 이건 승려이전에 사람으로서 할 도리도 아니었다.
이러니 생전에 법정스님이 ‘가사 장삼 입은 도적놈’이라고 일갈(一喝)하셨던게 아닌가. 머리를 깎고 회색 가사를 걸친 스님이기에 중생들이 합장의 예를 갖추고 머리를 조아린 것인데 이 자들은 되레 부처님을 팔아 시줏돈을 챙기고 온갖 부패한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혹세무민(惑世誣民)이 따로 없다.
땡추라는 소리도 아까운 ‘가사장삼 입은 도적놈들’로 인해 불교계는 엄청난 이미지 훼손의 타격을 입었다. 산사에서 염불선을 행하며 용맹정진하는 눈푸른 납자(衲子)들과 부처님의 반야지혜를 널리 알려 중생을 제도하는 진짜 스님들까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조계종단의 몇몇이 사직하고 사과하는 일로 끝나서는 안된다. 일부 땡추들의 일탈행동이 아니라 관행화된 부패가 대체 어디까지인지 종단의 썩은 환부를 모조리 도려낸다음 모든 스님네가 불자들과 국민들, 부처님전에 무릎꿇고 참회하는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미주 등 해외의 한국불교계도 뼈저린 자성을 해야 한다. 척박한 토양에서 해외포교의 어려움을 모를 바는 아니지만 바로 그것을 빌미로 수행정진은 고사하고 일반인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무늬만 스님’들도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개기름 흐르는 얼굴에 배까지 나온 스님도 민망하지만 신도들과 어울려 스테이크를 거침없이 쓸어대는 육식승, 저 푸른 초원에서 나이스샷을 외치는 골프승, 여신도와 함께 천연덕스럽게 사우나를 이용하던 찜질승, 사찰안에서 손님을 접대한다며 생선스시를 쓸어내는 황당한 초밥절….
연전에 한국서 잠시 온 어느 황당승은 법문시간에 “부처님은 육식을 금한 적이 없다. 그러나 술만큼은 금하셨기 때문에 계율을 지킨다”고 떠벌리고 나선 며칠뒤 대취(大醉)해 ‘오바이트’까지 하더라던 얘기도 전해진다.
급기야 수년전엔 심야에 여신도와 술판을 벌이다 강간미수에 상해죄로 미국경찰에 체포된 겁탈승까지 있었지만 그 절의 문을 닫기는 커녕, 불교계 어느 한구석에서라도 참회의 제스처를 했다는 소식조차 없었으니 뻔뻔하다고 해야할까, 아둔하다고 해야할까.
부처님시대 육식을 금한 일이 없다는 것은 그 시절의 스님들은 탁발(托鉢)과 걸식(乞食)을 하며 신도들이 주는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귀하게 먹었던 데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바 아닌 것을, 입맛 다시며 불판에 고기를 구워먹는 주제에 어찌 감히 부처님을 들먹이는가.
티벳 등 환경상 야크와 같은 고기외엔 거의 먹을게 없는 곳이 있듯이 우리네 불교는 엄격히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있는바 왜 먹을 때는 먼나라 아득한 시절의 얍삽한 핑계를 대며 합리화하는가, 보통사람들도 채식주의를 하면 일체의 육식을 중단하는데 언감생심 부처가 되겠다며 발심을 한 스님들이 고작 육식과 술조차 참아내지 못한다면 머리깎은게 아깝지 않은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지만 중 때문에 절이 싫어지는게 작금의 한국불교 문제이다. 아직도 한국엔 불교신자가 가장 많은지 모르겠지만 이미 절에 가면 노보살과 여성신도가 대다수로 젊은 사람과 남성들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불교의 암담한 미래가 보이는데 종단은 호의호식하고 권력에 아부하며 부패와 부조리가 판을 치니, 이보시요들, 부처님 보기가 두렵지 않소.
▲ 이상 사진 KBS-TV 캡처
올해는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81년 3월 1일 한국일보에 실린 성철 스님의 법문에 등골 서늘하지 않을 이 누구인가.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 장삼을 빌려서 입고 부처를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의복인 가사 장삼을 빌려서 입고, 승려의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주생을 제도하지 않고, 부처님을 팔아서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승려가 돼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함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대로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몸 받기는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다행히 사람의 몸 받아 승려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해 중생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절도 가고 부처님 법도 만나고 싶은데 ‘가사 장삼 입은 도적들’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