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통행금지가 있던 때의 일이다. 방송녹화가 끝난 뒤 몇몇 연예인과 워커힐 호텔 나이트 클럽에 놀러갔던 적이 있다. 한참 놀고 난뒤 술에 취해 바람도 쏘일겸 새벽 3시쯤 호텔 현관으로 나와 프론트 바로 앞 소파에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잠시후, 정말 잠시후였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채 잠이 덜깬 채로 가만가만히 내 모습을 온몸으로 느껴봤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은 있는대로 벌리고 자고 있는게 아닌가. 맙소사, 아차 싶은 생각에 함께 일단 흉한 입을 다물었다. 눈을 살짝 뜨고 주변을 살폈더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프론트에서 입실수속을 하는지 뭐라 떠드는 사람, 로비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 가방을 든 채로 서서 뭐라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 받는 사람.
다시 살짝 눈을 돌려 프론트의 시계를 보았더니 째깍째깍 무심한 시계는 10시 정각을 넘어서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일생일대의 망신인가, 그 모든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지나갔을 것이 아닌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침이라도 흘리지는 않았을까. 외국인의 목소리도 들리는데 이 무슨 국제적 망신인가. 만감이 교차해갔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나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단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손을 앞머리에 갔다대며 상체를 앞으로 굽히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시계를 보는 척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이사람 도대체 몇신데 아직도 안오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주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왕 내친김에 가문의 명예를 걸고 씩씩하게 나가자, 그래 난 특급호텔 로비에서 7시간 정도 한번도 안깨고 입벌리고 잔놈이다. 어쩌란 말이냐, 뒷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눈물나도록 창피한 순간이었다.
몇해전에는 수영장에 설치된 성인용 미끄럼틀에서 똥배는 안나왔다 으스대며, 위험하게 엎드려서 타고 내려오다가 수영장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는(이제까지 머리에 받아본 충격가운데 최대의 것이었다) 주위에서 쳐다보는 몇몇 아가씨들 때문에 웃는 표정으로 그곳을 천천히 통과해서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부둥켜잡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는지...
또 얼마전 수영장에서는 깨끗이 샤워를 하고 수영을 하려 탈의실을 나왔다.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은 미모의 여인들, 그리고 내게 쏟아지는 미녀들의 시선, 그들의 입에서 터지는 비명에 가까운 환호소리, 나는 처음엔 개그맨 주병진을 보고 그러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만 나는 수영복을 입는 것을 깜빡잊고 벌거벗은 채로 나왔던 것이었다. 그날 나의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한 여인들은 지금도 내가 TV에 나올때면 그날을 되새기며 상상의 나래를 펴겠지... -주병진의 스타스토리에서>
주병진에 대해 한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주병진이 국토종단 마라톤을 두번이나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을 빌어보면 84년의 첫 번째 마라톤은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속죄도 하고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한 것이었기 때문에 과연 방송도 잘 나가고 인기도 있는 상황에서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성이 들더라는 것이다.
요는 진정성의 문제였다. 결국 그는 3년 후인 87년 2월 부산에서 임진각까지 국토종단하는 마라톤에 나섰다. 이번엔 육상스타 장재근씨와 함께였다. 하루종일 달리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잠깐 시간을 내어 주요 도시에서 성금함을 들고 돌아다녔다. 엄청나게 힘든 레이스였지만 14일만인 3월 1일 임진각에 골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간 모은 성금으로 두명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수술을 할 수 있었던 주병진은 “두번이나 국토종단 마라톤을 뛰고 나니 왠지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헤쳐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알려진대로 주병진은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노사연과 배워봅시다 코너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본격 토크 코미디라 할 수 있는 프로였다. 그는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했는데 ‘몰래 카메라’의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였고 이경규, 김흥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도 주병진의 도움이 컸다.
주병진이 토크쇼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93년 1월 후발 민방인 SBS에서 기획한 <주병진 쇼>였다. 당시 토크쇼라는 개념은 SBS가 개국하면서 <자니윤 쇼>를 통해 자리잡았는데 개그맨의 이미지를 가진 주병진이 젊은 나이(34세)에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하게 된 것은 가히 파격(破格)이었다.
그 무렵 연예부 기자였던 필자도 주병진이 연예계는 물론, 정치 문화 사회의 폭넓은 영역의 인물까지 아우르는 쇼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게 사실이다. 필경 본인의 심리적 부담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건대 주병진은 특유의 입심으로 시사풍자를 하였고 비교적 무난하게 자신의 쇼를 이끌었지만 방송은 그해 12월말 종영되고 <투맨쇼 두남자와 만납시다>로 교체되었다. 이후 95년 MBC의 <주병진 나이트쇼>, 99년 SBS의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등 주병진은 90년대 시작한 속옷회사의 경영자로, 방송 토크쇼 진행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런 그가 본의아니게 방송을 떠나게 된 것은 2000년 11월 이른바 성폭행 누명사건이다. 한 여대생이 주병진의 벤츠승용차안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하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그는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결국 구속됐다가 다음달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이듬해 11월 무죄판결이 났지만 ‘개그계의 신사’로 불린 주병진의 이미지는 만신창이가 난 뒤였다.
주병진은 그해 12월 자신을 고소한 여대생과 당시 이를 보도한 모방송사 등 4개 언론사와 취재기자 등을 상대로 모두 2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고 이듬해 7월 법원은 ‘A주간신문과 당시 소속 기자는 5천만원을, 온라인 뉴스 제공업자 임모씨는 1천만원을 주병진에게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주병진을 고소한 여대생은 2003년 6월 지명수배되었으나 향후 행방에 대해서는 더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은 당시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정 보도한 무수히 많은 매체들이 아주 작게 보도하거나 거의 다루지 않았다. 설사 크게 보도했다해도 주병진의 이마에 새겨진 주홍글씨는 지울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재판은 3심이 가능하지만 인터넷여론재판은 1심으로 끝났기때문이다. 그는 한때 자살을 생각했을만큼 고통의 나날을 보냈고 한때 자신의 안방이었던 방송 복귀를 두려워했다.
지난 여름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것은 주병진의 존재를 다시 한번 세인들에게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12년 공백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옛 모습 그대로인 주병진은 신중했지만 진행자 강호동을 넉다운 시킬만큼 해학과 기지는 여전했다. 주병진을 잘 아는 세대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젊은 세대는 ‘돌아온 예능대제’ 주병진이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방송인이었는지, 인터넷의 정보를 회람(回覽)하며 열광했다.
그때 출연에서 주병진은 2000년의 사건으로 아직 악몽을 꾸고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는 말을 솔직히 토로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주병진도 어지간히 굴곡진 인생이었다. 최고의 스타로 각광을 받다가 끝없는 나락으로 두 번씩이나 떨어진 참담한 경험을 한 셈이다.
그러나 한번도 하기 힘든 국토종단 마라톤을 두 번씩이나 하면서 뜨거운 의지를 갖고 있는 그가 이렇게 다시 대중과 만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12년만의 방송복귀. 그의 쇼는 어지럽게 자막이 난무하고 숨돌릴 틈 없이 편집된 기존의 예능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룬 정통 토크쇼이다. 이제 50대로 접어든 그가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토크쇼의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