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는 주간지(週刊誌)의 전성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서울신문사가 발행한 선데이서울은 ‘주간지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80년대 들어 스포츠신문에 그 자리를 내주기전까지 대중지 시장은 선데이서울을 필두로 주간여성, 주간한국, 주간경향 등 선정적인 대중지들이 장악했고 70년대 들어 역시 서울신문이 주간스포츠를 만들어 빅히트를 기록하자 동아일보사가 70년대 말 잠시 스포츠동아(현재의 스포츠동아와는 다르다)를 발행해 얼마간 인기도 누렸다.
결국 훗날 스포츠와 연예를 양대 축으로 한 스포츠신문의 몫을 이들 연예 주간지와 스포츠 주간지들이 담당한 셈이다.
선데이서울이 주간지의 대명사라고 한 것은 인터넷 패러디매체 딴지일보가 창간하면서 '강력하고 유일한 라이벌(?)'로 지목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70년대 후반부터 주간국제 주간부산 등 후발 주간지들이 가세, 과열 경쟁을 하면서 지나친 선정성과 질적 저하로 이미지를 구기긴 했지만 사실 70년대 초반까지 연예주간지들은 놀랄만큼 괜찮은 미디어였다.
선데이서울이 창간된 것은 1968년 9월22일. 사진책자형의 주간지로는 최초였는데 80쪽 20원에 팔린 초판부터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선데이서울을 미처 못 구한 사람들이 서울신문사로 몰려와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적당히 에로틱한 사진과 기사가 결코 지나치다는 느낌이 없었고 격조(格調) 있는 유머와 재치로 포장됐거나 요즘으로 치면 ‘세상에 이런 일이’, ‘놀라운 세상’ 류의 생생한 화제 기사들로 넘쳐났다.
그 무렵의 선데이서울을 십수년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저급한 황색주간지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신선한 기사들이 많아서 놀랐다. 80년대 들어서도 선데이서울은 뉴스로의 필진이기도 한 이상숙 기자가 ‘여기자 이상숙 경찰과 뛴다’라는 장수 고정물로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기도 했다.
60년대 후반 언젠가 발행된 선데이서울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었다.
앙드레 김의 중년이후 트레이드 마크는 궁중복을 방불케하는 화려한 디자인의 흰색 의상이었고 진한 화장, 빠지는 숱을 감추기 위한 두발 페인팅을 들 수 있다.
▲ 앙드레 김 www.wikipedia.org
앙드레김을 잘 모르는 이들은 버터향 머금은 특유의 발음, 독특한 외양, 그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뭐 그건 아니더라도 앙드레김을 미남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데이서울에서 발견한 30대의 앙드레김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정말 잘 생긴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 오똑한 콧날, 당당한 체구..배우라 해도 믿을 세련된 외모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앙드레 김을 처음 만난 것은 93년 한 영화 행사장에서였다. 당시 연예부장의 소개로 그와 악수를 나누는데 짧은 인사만 주고받았지만 독특한 외양과 기름기 도는 목소리에 공연히 흠칫(?)했던 기억만 난다.
정작 그를 좀 알게 된 것은 2000년 사회부 데스크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패션을 사회부가 관할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 관한 기사를 데스킹하게 됐는데 보직을 맡은지 얼마 안됐을 때 집에 왔더니 커다란 서양 란 화분이 하나 있었다. 앙드레 김이 보낸 것이었다.
소속 직원이었을까. 양복을 깨끗이 차려입은 남성이 직접 들고 왔다는 것이다. 동양난 보다는 값싼 것이었지만 자신이 즐겨 입는 의상처럼 하얀색 꽃망울이 여러 개 피어난 난초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앙드레김 패션쇼에 관한 기사가 실린 날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앙드레 김이었다.
“부장니~임. 저 아~앙드레김이에요”
기름기 도는 특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네 앙 선생님” 할 뻔 했다. ^^ 당황한 나머지 이 바닥 애칭을 실수로 부를뻔한 것이다.
“예..예, 앙드레 선생님.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인사를 했다.
“오늘 기사 너무너무 잘 봤어요. 정말 캄사 드려요. 아주 머~어찐 기사였어요. 정말 너무너무 캄사 드려요..”
사실 내가 쓴 기사도 아니고 패션담당기자의 것이니 구태여 부장에게 감사인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기사 또한 행사를 했기때문에 쓴 것이지 이른바 ‘쪼 찡’ 기사도 아니었다.
앙드레김같은 패션의 대가가 자신에 관해 수도 없이 나오는 기사 하나를 보고 직접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약간은 감동을 한 게 사실이다. 그만의 '언론관리법'인지 모르겠지만 구태여 그런 성의를 안보여도 그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뉴스메이커였기 때문이다.
그후로도 앙드레김은 기사가 나올 때마다 '캄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앙드레김과 또다른 인연(因緣)이 시작된 것은 내가 있던 신문이 뉴욕 지사를 세우면서 이곳 책임자로 부임한 후였다. 앙드레김은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에서 패션쇼를 하겠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추진하고 있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있는 지금같으면 일도 아니겠지만 그때만해도 유엔에서 민간차원의 행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앙드레김이 오랜 세월 주한 외교사절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워낙 외교적 인맥이 많아 추진됐던 것인데 실무차원에서 현지 매체를 알아보다가 내가 뉴욕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쉽게도 유엔본부 패션쇼는 끝내 열지 못했지만 이 일로 몇 번 전화를 주고받으며 “너무너무 캄사 드린다”는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원한 현장의 패션디자이너로 활약했기때문일까. 기실 그때도 앙드레김이 칠순이 다 된 노인이라는 것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패션디자이너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를 패러디한 우스꽝스러운 농담들덕분에 대중들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존재였다. 나 역시 그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자로서 인연을 맺었던 입장에서 보면 늘 소년의 이미지로 순수함을 간직한 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일흔다섯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추모하는 각계각층의 모습들을 보노라니 대중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앙드레 김 선생님의 영면(永眠)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