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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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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과 안성기의 추억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3-05-05 (일) 11:19:39

통상 연예인들은 대중에 비친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같은 인물 두사람을 꼽으라면 조용필과 안성기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한사람은 국민가수, 다른 한사람은 국민배우로 통한다. 90년대초 영화기자를 한 덕분에 안성기를 근거리에서 볼 일이 많았다. 사려깊고 배려심 많고 사람좋은 이미지, 실제 모습 또한 그랬다. 아역배우로 데뷔해 거의 평생을 연기자로 산 예능인이지만 겸손한 모습은 한결같다.

 

 

그 시절 안성기에 대해 누군가 그랬다. “안성기는 구두쇠인 편인데 구두쇠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성격이 워낙 좋기 때문이다.” 구두쇠가 성격이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어쨌든 구두쇠라 하더라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온화한 성품이 상대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기때문일 것이다.

 

 

90년대초 안성기와 함께 최고 줏가를 올리던 박중훈이 사석에서 은근히 불평을 늘어놓았다. “성기형이 어려운 영화판을 배려한다고 개런티를 1억원이상 받지 않아서 저도 그이상을 부를 수가 없다니까요.”

 

 

90년대 상반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영화판은 정말 영세(零細)했다. 영화 한편 제작비가 10억원을 넘기 어려웠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같지만 보통 7억5천만원에 뚝딱 만들어졌고 15억원만 들어가도 대작 소리를 들었다. 그런 마당에 주연배우 개런티가 1억원이면 꽤 큰 비중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안성기는 그 이상을 달라 해도 군말을 달 수 없는 흥행배우였다.

 

그러나 고집스레 1억원 이상을 절대 부르지 않았기때문에 톱 배우들의 개런티 가이드라인이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나혼자 잘먹고 잘사는게 아닌 전체를 고려하는 ‘배려남’다운 행동이었다.

 


www.ko.wikipedia.org

 

‘그섬에 가고 싶다’라는 박광수감독의 영화를 촬영하던 진도의 로케현장을 기자들이 1박2일로 방문했을때 진도 명주 홍주(紅酒)를 기울이며 소탈한 대화를 나누던 기억도 새롭다. 뉴스로 독자들을 위해 한가지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20여년만에 공개한다. 다름아닌 안성기의 ‘소변요법’ 체험이다.

 

소변요법은 자신의 오줌을 마심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인데 고혈압이나 당뇨병, 암 등 난치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이론이 있다. 오줌이 지저분한 배설물(排泄物)이 아니라 사실은 영양소가 많은 깨끗한 액체라는 설을 신뢰한다 하더라도 오줌을 마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당대의 최고배우 안성기가 '딱 한번'이지만 오줌요법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자리엔 물론 나말고 기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기사화한 이들은 없었다. 요즘같이 스타들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身邊雜記)는 물론, 방송출연이나 드라마 내용까지 인터넷 속보로 중계하는 현실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언제 무슨 기사를 써제낄지도 모르는 연예부 기자들을 앞에 두고서 ‘오줌요법’을 털어놓는 그를 보며 참 소탈하고 인간미가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조용필을 만난 것은 영화를 맡기 직전 방송기자로 KBS를 출입할 무렵이었다. 지금도 미안한 기억이지만 본의아니게 조용필을 괴롭게 만든 적이 있다. 인기토크쇼 ‘밤으로가는 쇼’ 출연을 앞두고 있었는데 독신이었던 그가 재혼을 생각한다는 내용을 그 프로의 작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첫 결혼에 실패했던 당대 최고의 가수 조용필이 오랜 독신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방송을 통해 재혼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니 ‘조용필 공개구혼’이라는 제목이 나올만 했다. 이 내용을 보고받은 팀장이 기사작성을 지시한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녹화전에 기사화됐다는 것이었다.

 

 

‘조용필 공개구혼’이라는 기사제목에 놀란 라이벌 신문이 황급히 확인을 한 결과, 아직 녹화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조용필측에 녹화에서 결혼 얘기를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우리 신문의 특종(?)을 낙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팀장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조용필측에 예정대로 방송에서 구혼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스포츠신문의 연예부 파워는 천하의 조용필도 눈치를 볼 정도였다. 마침내 녹화일, 4년차 쫄때기 기자였던 나는 여의도 스튜디오로 나갔다. 특종이냐, 낙종이냐 갈림길이기도 했지만 방송에 출연하기도 전에 호되게 시달린 조용필 보기가 껄끄러웠다.

 

조용필은 일면식도 없던 내가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인줄 몰랐다. 00신문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아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하고 반겼다. 욕을 먹더라도 솔직하고 싶어 “실은 제가 결혼 기사를 쓴 아무개 기자입니다”하고 이실직고(以實直告)했다.

 

아주 짧은 순간 조용필은 낯빛이 굳는듯 하더니 금세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구, 저 그것 때문에 아주 힘들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기사때문에 시달린 그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결과적으로 조용필은 방송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다. 결혼의사는 비쳤지만 아주 약하게, 슬그머니 넘어갔기 때문이다.

 

조용필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남들처럼 75년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였다. 약간은 허스키한듯한 음색에 심금을 울리는듯한 그의 목소리는 깊이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고교 2학년때 미8군 무대에 서며 데뷔 7년을 맞은 중고신인 조용필을 경향 각지에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72년 대마초사건에 연루(連累)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방송출연이 중단됐고 필생의 기회는 어이없이 사라졌다. 4년여 자숙의 세월을 보낸 그를 보게 된 것은 1980년 한 대학교 행사장이었다.

 

그는 막 나온 신곡을 들려주었다. 다름아닌 ‘창밖의 여자’였다. 노래를 듣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창밖의 여자’로 그는 10여년 무명의 세월을 끝내고 전성기를 활짝 열어제쳤다. ‘창밖의 여자’는 사상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 밀리언 셀러였다.

 

 


www.ko.wikipedia.org

 

 

대마초파동 당시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명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바꾼 이름값을 한걸까. 이후 ‘단발머리’  ‘일편단심 민들레야’  ‘못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친구여’  ‘허공’  ‘그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등 발표곡마다 대박행진을 펼쳤고 수많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최초의 가수가 다름아닌 그이였다.

 

 

1980년 1집앨범을 시작으로 20여년의 장기 히트레이스를 지속한 조용필은 지난 2003년 18집 앨범 ‘Over the Rainbow’를 낸 이후 10년간 공백기에 들어갔다. 이 앨범도 사실 98년 ‘Ambition’ 이후 5년만이어서 신규 앨범은 더 이상 내기가 힘든 것으로 관측됐다.

 

그런 그가 10년만에 19집 앨범 ‘Hellow’를 발매하면서 한국가요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앨범에 수록된 신곡 ‘바운스’(Bounce)가 공개된 지난달 18일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월드스타 싸이의 ‘젠틀맨’을 가볍게 누른 ‘가왕(歌王)’의 귀환이었다.

 

조용필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대는 음원시장이란게 존재하지 않았다. LP판 등 음반세대라 할 수 있는 그가 기라성같은 신세대가수들이 지배하는 음원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환갑도 지난 만 예순세살에 말이다.

 

그의 고정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와 20대들도 사로잡은 그의 음악적 재능과 창작열은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의 앨범을 사기 위해 아침부터 팬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급기야 지난 3일 KBS ‘뮤직뱅크’에서 ‘바운스’로 ‘K차트’(4월22일~28일) 1위에 올라섰다. 조용필이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정상에 오른 것은 1990년 MBC ‘쇼 네트워크’에서 12집 앨범 ‘추억속의 재회’로 1위에 오른지 무려 23년만의 일이다.

 

조용필도 어안이 벙벙했고 기성 팬들도 놀랐다. 사실 락음악과 발라드, 트로트는 물론, 한국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거의 모든 대중음악의 장르를 소화하는 전천후(全天候) 음악가인 조용필이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신세대까지 아우르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세계의 대중음악사에서도 보기 힘든 일일 것이다.

 

난 솔직히 조용필이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정상에 오른 지난 3일의 위업을 싸이가 빌보드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나가수’ 등 7080세대 음악에 대한 재평가 등이 이같은 기적의 바탕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조용필 개인의 놀라운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이 덕분에 기성세대는 ‘꼰대’에서 벗어나고, 신세대는 자기들의 세계에 갇힌 ‘폐인’으로 여겨지지 않고 함께 공유하는 ‘우리들’이 된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조용필과 안성기가 중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다. 안성기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조용필과는 집에도 놀러오는 등 친하게 지냈다. 그때는 조용하고 공부만 열심히 했기 때문에 가수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국민가수와 국민배우, 한국의 대중문화사에 길이 남을 두명의 ‘살아있는 전설(傳說)’이 한 학교를 나온 친구사이라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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