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맨으로 최초의 국제적인 스타는 단연코 차범근일 것이다. 분데스리가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로 이름을 떨치던 79년 독일에 진출, 외국인선수 최다골인 98골을 작렬한 차범근. 그 골 가운데는 페널티킥이 단 한 개도 없었다.
만 10년간 308경기에 출전하며 거친 태클과 숱한 고의파울에 시달렸으면서도 경고는 단 한 장만 받을만큼 페어플레이의 대명사였던 차범근. 이후 수많은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명멸(明滅)했지만 차범근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범근이 독일에 진출한 동안 당시 유일한 스포츠신문이었던 일간스포츠를 통해 활약상을 접하고 매주 편성된 MBC의 분데스리가 중계는 그때의 내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한국 선수가 감히 세계 무대에 진출한다는 것을 거의 생각조차 못했던 시절, 차범근은 그냥 활약한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출전 3경기만에 데뷔골을 시작으로 3게임 연속골을 작렬하며 현지 팬들과 전문가들을 놀래킨 그는 두차례 UEFA컵 우승과 서른네살의 나이였던 84-85 시즌MVP에 오르는 등 유럽의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단지 축구를 잘하는 선수였을뿐 아니라 성실한 태도와 엄격한 자기절제로 귀감(龜鑑)이 되었던 차범근은 훗날 세계적인 스타가 된 축구 유망주들의 우상(偶像)이었다. 독일에 축구유학을 떠난 모 축구인이 현지의 유명한 지도자에게 “독일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돌아온 말은 “나에게 배우겠다고? 당신들에겐 차붐(차범근)이 있지 않느냐. 오히려 내가 차붐한테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차범근이 독일 진출 초기 미디어들로부터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인터뷰가 불성실하다는 것이었다. 차범근처럼 매너좋은 선수가 불성실한 인터뷰를 했다고? 어느날 외신을 통해 전해온 얘기의 전말(顚末)은 웃지못할 해프닝이었다.
차범근은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그가 승부를 확정짓는 골을 넣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자주 달았던 모양이다. 물론 기자들이 바라는 대답은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분석이나 인간적인 소회(所懷)였다. 그러나 차범근에게서 번번히 신에 대한 찬미가 나오자 독일 기자들은 “인터뷰에 대한 성의가 없다”는 지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프로선수로서의 쇼맨쉽에 익숙치 않은 차범근의 순진함(?)과 깊은 믿음을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구설수는 나오지 않았다. 비단 차범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크리스찬 선수들의 돈독한 신앙심은 특기할만 하다. 골을 넣거나 승리가 확정됐을 때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선수들, 인터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수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본다.
문제는 이들이 외국에서 활약할 경우 그것이 너무 도드라진 나머지 종종 역기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외형상 다종교 국가이긴 하지만 청교도의 정신에 따라 건국됐고 달러에 ‘신의 품에서’라는 표현이 있으며 국가로 ‘God bless America’를 부르다시피 기독교가 대세인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의 스포츠 스타 소감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기자들의 질문은 경기와 관련된 것이므로 구태여 하나님을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크리스찬 선수들은 좀 다른 것 같다.
지난 15일 저녁 NBC-TV를 지켜본 미주 한인들은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탱크’ 최경주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 짜릿한 우승을 차지한 덕분이다. 골프채널에서는 경기가 끝나고도 한시간 동안 대회를 분석하며 최경주의 활약상을 반추(反芻)했다. 아시아선수로는 첫 우승한 최경주와 함께 자랑스런 태극기를 여러번 화면에 비추기도 했다.
역시 독실한 기독교도인 최경주는 공식 기자회견에 앞선 현장 인터뷰에서 “나는 크리스찬이다. 홀을 돌면서 성경 구절을 떠올리고 기도를 한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기자가 경기적인 소감을 듣기위해 두 차례 질문을 했지만 그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보면서 안타까움이 들었다. 물론 최경주의 신실한 믿음과 신에 대한 감사는 이해하고도 남지만 기자와 시청자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의 말들은 같은 교회 성도들이 자리한 곳이나 간증집회에서 하면 좋았을 것이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었을까. 이날 방송에선 다른 대회에 비해 우승자 인터뷰에 대한 비중이 떨어졌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이고 3년 4개월만에 PGA에서 승리한, 소위 스토리가 있는 선수에 걸맞지 않은 대접이었다.
물론 최경주의 영어가 유창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쳤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않고 골프와 무관한 대답을 섞은 최경주의 스타일때문이 아니었나하는 우려가 들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기대치에 밑돌게 최경주 기사를 스포츠섹션 하단에 처리했다. 기사 내용중에는 최경주가 ‘브로큰 잉글리시’로 말했다는 표현도 있었다. 문법이야 어쨌든간에 생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는 최경주를 놓고 굳이 브로큰 잉글리시라고 토를 단 기자가 그리 호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날 ESPN의 해설가 진 워처하우스키(Gene Wojciechowski)는 최경주의 우승이 가장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최경주의 우승은 그의 가족과 캐디, 은행계좌(우승상금 171만 달러)를 위해서는 매우 좋겠지만, 결과적으로 PGA투어를 깎아 내렸다(shorts pulled down)”라고 비아냥댔다. 그의 조롱이 최경주의 많은 나이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그냥 받아들이기엔 꺼림칙하다.
단지 나이는 빌미가 됐을뿐 그가 최경주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최경주가 모든 미디어에 좋은 평가를 받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2% 모자란게 있다면 노력해 볼 필요는 있다.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기왕이면 유머러스하게 언론을 상대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인간적인 뒷이야기, 기자들이 쓰기 좋은 것들을 적절히 내놓는다면 지금보다 최경주의 인기는 훨씬 올라갈 것이다.
골프 실력에 비해 어쩐지 저평가되는 최경주. 적극적인 태도는 우선 자신의 몸값부터 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인식되는 대한민국의 이미지도 동반 상승할 것이다. 골프부터 잘 치고 볼 일이지만 기왕이면 실력에 걸맞는 자기홍보와 마케팅에도 우리의 최경주가 세심하게 신경을 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