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제9대 책계왕에 관하여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이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했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므로 대방에서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때문에 대방과 우리 나라는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므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군사를 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 고구려가 그 일을 원망하므로 왕은 그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를 방비했다.”
라고 하여 백제 책계왕이 장인의 나라인 대방을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준 일로 고구려의 보복이 두려워 아차성과 사성을 수리하여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하였다.
사성(蛇城)의 위치를 추적해보자. “사수(蛇水)는 지금의 비하(肥河)이다. 비하조를 보라”고 하였다. “비하는 산동성 비성현(肥城縣) 남쪽에 있다. 즉 옛 사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구현(蛇丘縣)은 춘추 노나라의 사연유(蛇淵囿)이며 역시 주향(鑄鄕)이다. 옛 성은 지금의 산동성 비성현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산동성에 위치한다는 비성현을 찾아보면 “한(漢)나라가 비성현(肥成縣)을 두었다. 후한이 생략하고 진(晉)나라가 다시 두었다. 후위가 비성(肥城)이라 했다. 당나라가 생략했다가 원나라가 다시 두었다. 청나라는 산동성 태안부에 속하게 했다. 지금은 산동성 제남도(濟南道)에 속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사성은 오늘날의 산동성 태안 서남쪽, 즉 태산(泰山) 서남쪽에 있는 비성을 뜻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당시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여 보수한 비성은 산동성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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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아차성이란 기입사항은 없으나 단서는 보인다. 즉, 아정(阿井)이다. "아정은 산동성 양곡현(陽榖縣) 북쪽 50리 동아성진(東阿城鎭)이다. 사성(비성) 서쪽으로 황하와 가까운 지역이다. 본고에서는 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질문에 대해서는 차차 나올 것이다.
<백제의 영토 연구> - 제39부
백제의 사성이 산동성에 위치하였으므로 아차성 역시 산동성에 있을 것으로 믿어지므로 산동성에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아차성과 똑같은 지명은 없으나 아차성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지명이 보인다.
“아성진(阿城鎭)은 산동성 곡양현(穀陽縣) 동쪽에 있다. 즉 옛 동아현이다. 그곳에 아정(阿井)이 있다. 아정조를 보라”고 적고 있다. 아정을 찾아보면 “산동성 곡양현 북50리에 있는 동아성진(東阿城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백제의 아차성(阿且城)으로 여겨지는 아성(阿城)이 산동성 황하북부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백제의 영역은 섬서성 동부 위례성으로부터 황하를 사이에 두고 산서성 남부 하남성 하내 그리고 산동성에 걸친 넓은 영토였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같이 백제가 대륙에 위치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보인다. “백제 제9대 책계왕(責稽王) 13년(188) 가을 9월에 한(漢)나라가 맥인(貊人)과 함께 침범해 오므로 나가서 막다가 왕이 적병에 살해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의 한나라는 동한(東漢)으로 유수(劉秀)가 하남성 낙양에 세운 나라를 말한다. 책계왕 13년에 한나라와 전쟁을 하다가 책계왕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이다. 백제와 동한이 서로 이웃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대로라면 지나대륙 하남성 낙양에 있던 동한이 낙양에서 한반도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백제를 침략하기 위해 직선거리 약 3,072리의 먼 거리를 배를 타고 황해(黃海)를 건너왔다는 것인데,
<삼국사기>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소행으로 이런 엉터리를 민족사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남성 낙양에서 한반도 충청남도 부여까지의 대략적인 직선거리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0>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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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0부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면서 민가를 약탈하니 태자(太子)가 백제군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군을 쳐부수고 5천여명을 사로잡았다.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미리 군사를 패하(浿河) 상류에서 고구려 군사를 패퇴했다.
겨울에 왕은 태자와 함께 군사 1만으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왕 사유는 백제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자 근초고왕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근초고왕과 고구려가 싸운 전쟁터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치양과 패수(패하) 그리고 평양(지금의 임분)이다.
한반도에는 치양도 패수도 평양(성)도 없었다. 이들 지명들은 모두 대륙 산서성과 하내에 위치한 것으로 문헌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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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1부
2. 관미성의 함락과 한성(漢城)으로 천도
제16대 진사왕(辰斯王) 8년(392)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쳐들어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관미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로 둘러쌓여 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켰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관미성 사방이 험준한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要塞)로 성을 함락시키는 데 20일이 걸렸다는 기록이다.
필자는 이 관미성은 백제의 위례성(거발성, 고마성)과 가까운 황하가 굴곡하는 황하 가운데의 한 섬(島)이라 주장한다.
첫째,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은 진평이군으로 알려진 황하와 멀지 않은 섬서성 동부에 위치했고
둘째,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성이라면 인위적으로 만든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거나 아니면 바다에 있는 섬이어야 하는데 해자의 물이 험할 수는 없고
셋째, 황하를 바다(海)라고 했으며
넷째, 이곳은 마한에 속한 지역이며
다섯째, 관미성의 함락으로 인하여 백제가 동쪽으로 천도했다는 것 등이다.
관미성의 함락으로 서쪽의 위례성에서 동쪽의 한성(漢城)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된다. 위의 다섯 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백제의 관미성이 위치한 곳으로 이해되는 황하 가운데 섬을 지적하면 다음 <그림 11>과 같다.
고구려의 압록수가 황하로 진입한 입구 동남쪽 방향으로 두 개의 섬이 보이는데 그중 북쪽에 위치한 큰 섬에 관미성이 있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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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2부
고구려에 관미성이 함락되고 백제가 정확하게 어느 곳으로 천도했는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어떤 문헌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백제가 천도한 곳은 산동성 제령(濟寧)이라 주장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제21대 개로왕 18년(472)에 북위(北魏)에 보낸 글 속에 “臣立國東極(신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라는 글귀는 동쪽인 산동성을 암시하고
둘째,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 대왕에게 패망 직전에 있을 때에 “신라의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 태자인 문주(文周)가 아래로 내려갔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신라가 산동성 아래인 강소성(江蘇省)에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제21대 개로왕이 쌓은 제방(堤防)이 하남성에서 산동성까지로 도성인 제령 밖으로 지나가고
넷째, 고구려의 핵심 영토는 산서성으로 백제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가까운 곳이어야 하며
다섯째, 제9대 책계왕 때 쌓은 사성(蛇城)은 산동성 황하와 가까운 곳에 축조한 성으로 도읍지인 제령의 북부로 서로 가깝고
여섯째,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인 제령시를 소개하는 글에 “수나라에 항복한 땅”이며
일곱째, 제령의 서쪽 황하변에 동명(東明)이란 지명이 있다는 등을 들 수 있다.
정리하면 백제가 관미성이 함락되자 동쪽으로 천도하였는데 옮긴 곳이 산동성 제령이며 이곳에 있던 도성을 한성(漢城)이라 불렀으며 백제 제2의 도읍지였다로 요약할 수 있다.
고구려에게 관미성이 함락되자 섬서성 동부에 있던 진평이군으로 알려진 백제의 위례성에서 동천(東遷)하는데 황해를 건너 수천리 먼 거리에 있는 한반도 한강 유역까지 도읍지를 옮겼다는 주장은 설득력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못하며 1차사료나 문헌자료에 근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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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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