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을 세운 왕검(王儉:환검) 단군은 아들이 셋이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인 부루(扶婁)이고 둘째는 부여(扶餘) 셋째가 부유(扶宇)이다.
왕검(王儉) 단군이 붕어(崩御: 천자가 죽음, 제후가 죽을때는 ‘홍’이라하고, 대부가 죽을 때는 ‘졸卒’, 선비가 죽을때는 ‘불록不祿’, 서인이 죽을때는 ‘사死’라함 )하니 태자인 부루(扶婁: BC2240-BC2181)가 제 2대 단군(壇君)이 된다.
신축원년(BC2240)에 백성과 함께 산업(産業)을 다스리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았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였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기숙사(寄宿舍)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켰다.
• 동이(東夷)를 칭찬한 공자
임인 2년(BC2239) 단제(壇帝)께서 소련(少連) 대련(大連)를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물었다.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어 사흘동안 게을르지 않고 석달동안 느슨하지 않고 한해가 지날때까지 슬퍼하고 애통해 하였으며 삼년동안 슬픔에 젖어있었다. 이때부터 상(喪)을 치룸에 다섯달로 그치던것을 오래될수록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다.
▲ 공자상 www.zh.wikipedia.org
이 내용이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예기>에도 잘 나타나있다. <예기禮記> ‘잡기하 雜記下’의 기록이다. 孔子曰: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공자왈:소련대련선거상 삼일불태 삼월불해 기비해 삼년우 동이지자야) “ 공자가 말하기를: 소련과 대련은 부모상을 잘 치루었다. 3일동안 태만하지 않았고 3개월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1년간 슬피 애통해하고 3년간 근심하였다. 소련 대련은 동이사람이다.”
필자는 공자가 했다는 이 말을 여러차례 되새겨 보았지만 소련, 대련 형제와 동이(東夷)를 칭찬하는 뜻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공자는 BC 515년 경 사람이다. 공자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약 1,800년 전의 단군조선 (壇君朝鮮) 땅에 살던 효성(孝誠)이 지극한 소련, 대련의 일화를 제자들에게 가르친 공자가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오랑캐 이(夷)’라고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오랑캐 이(夷)라고 우리 동이족 (東夷族)의 단군조선 (壇君朝鮮)을 비하 (卑下)한 사람이 어떻게 “ 나도 구이(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했겠는가! 인(仁)를 가르치던 공자(孔子)의 인격(人格)으로 보아 공자가 한 말이 아니라고 믿어진다. 이(夷)자를 ‘오랑캐 이’라고 한 것은 먼 후대에,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唐)나라와 명(明)나라때의 작품(作品)으로 보인다.
• 최초의 밭문서와 달력
계묘3년(BC2238) 9월 조서(詔書: 왕의 뜻을 일반에게 알리기 위하여 적은 문서)를 내려 머리를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다. 경술 10년(BC2231)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자12년(BC2229) 신지(神誌: 역사를 기록한 직책)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歷: 달력의 일종)과 구정도(邱井圖:세금징수를 위한 행정구획도로 생각됨)를 만들었다. 무술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였는데 이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태자 가륵(嘉勒)이 즉위했다.
가륵(嘉勒:BC2183-BC2137)은 단군조선의 제3대 단군이다. 대야발(大野勃) 어른이 쓴 <단기고사>에 의하면, “첫 해에 맏아들 오사구(烏斯丘)를 태자로 삼고 아우 가록(嘉祿)을 사달(斯達: 아사달)왕으로 삼아 도읍(都邑)을 구월산(九月山) 장당경(藏唐京)에 정하였다.”라고 기록하고있다.
• 평양성(平壤城)이 장당경
구월산이 어디인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아사(阿斯)는 음이 아홉(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월(月)과 같아서 아사달이 구월산(九月山)으로 와전(訛傳: 잘못 전해짐)된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장당경(藏唐京)은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최초에 도읍(都邑)한 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에 있던 평양성(平陽城)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인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서 가륵단군 원년인 BC2183년에 동생 가록(嘉祿)에게 비왕(단군을 보좌하는 왕)으로 아사달을 맡기고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都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왕검단군(壇君王儉)이 처음 도읍한지 150년후에 왕검의 손자인 가륵단군(嘉勒壇君)에 의해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초기 도읍지(都邑地)였던 평양성(平陽城)으로 다시 돌아온 것으로 봐야 한다.
• 한글창제는 가륵단군때
경자2년(BC2181)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상형문자(象形文字: Hieroglyphic, 뜻글자)인 진서(眞書: 배달국때 만들어진 녹도문으로 현재의 한자漢字의 전신)가 있다 해도 열가구(十家口)가 있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 가림다문加臨多文 혹은 가림토加臨土글자라함) 38자를 만들게 했다.
이 국문정음이 바로 한글의 전신인 것이다. 신축3년(BC2180)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 배달국의 역사, BC3898-BC2333)를 편수케 하였다.
<中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