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가 소국임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사기/연소공세가>에 잘 나타나 있다. “연의 북으로 만(蠻)과 맥(貉)과 접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사이에 있어 강국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있는 가장 약소한 나라였다. 여러 차례나 거의 멸망할 뻔하였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의 맥은 고구려를 뜻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북연에 대해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과는 약간 달리 기록해주고 있다. “주국(周國)의 이름이고 희씨성이며 백작이다. 주 무왕이 그의 동생 소공석에게 북연을 봉하였다. 즉 지금의 하북(河北) 대흥현(大興縣)이다. 전국시 왕이라 처음 칭했다. 7웅의 하나이며 진(秦)에게 멸하였다.” “주나라 초기의 계국(薊國)이다. 춘추시 연나라의 도읍지다. 진(秦)이 계현을 두었고 요(遼)나라 초기에 계북(薊北)이라 했다. 다시 고쳐 석진(析津)이라 했고 금(金)나라가 처음 대흥이라 고쳤으며 대흥부에서 다스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흥이라 고친 것은 금(金: 1115-1234)나라 때라는 것이다.
요약정리하면 북연의 도읍은 황하를 사이에 둔 섬서성, 산서성, 황하남부 하남성과 가까운 지역으로 파악된다. 주 무왕이 그의 동생 소공석에게 봉한 북연이 지금의 ‘하북(河北) 대흥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지금부터 북연의 도읍지 계현이 위치했던 곳이 어디인지 그 범위를 함께 좁혀가 보자.
2. 요동땅의 하북(河北)
옛부터 경도 110도에서 세로로 나뉘는 황하를 사이에 둔 섬서성에서 볼 때 산서성(山西省)을 하동(河東)이라 하고, 하남성에서 볼 때는 황하북부와 산서성 서남부를 하북(河北)이라고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내(河內)를 통칭해서 하북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동과 하북의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기주이자 요동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던 수많은 지명들이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옮겨졌음으로 그 내역을 알아보자.
하북성(河北省)이란 이름 이전에는 직이성(直隶省)이였는데 하북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손문의 중화민국 때인 1938년 무렵이다. 1911년부터 손문정부에 의해 ‘북방공정’이란 이름으로 지명이동이 구체화 되었다. 하북(河北)의 하(河)는 황하(黃河)를 뜻하며 원래의 하북은 하남성 황하북부(하내)와 산서성 남서부를 지칭하였다. 이곳 산서성 남부에 노룡(盧龍), 수양산(首陽山), 영지(영제), 고죽성, 고죽국, 포판, 창려, 해양, 광녕 등이 있었다. 이들 지명들은 명나라 주체(朱棣) 때에 지금의 하북성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고, 손문정부 때에 직이성이던 것을 아예 하북성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철저한 역사 왜곡의 산물이라 하겠다. 하북이라고 부르던 산서성 남서부에 있던 옛 지명들을 모두 옮겨놓은 곳을 하북성이라 이름 하였으니 철두철미한 역사 사실의 날조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은 수많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모두 다 왜곡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周)나라 초기의 계국이 연(북연)의 초기 도읍지였는데 계국에서 계현으로, 계현에서 계북으로, 계북에서 석진(析津)으로, 석진에서 대흥(大興)으로 5차례나 지명이 바뀌어 가고 있다. 석진현(析津縣)조를 검토해보면 대흥의 위치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석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석진현: 본래 한(漢)의 계현이다. 요나라 초기에 계북이라 하였다. 곧 석진(析津)이라 고쳐 남경의 석진부에서 관리하였다. 금나라가 대흥(大興)이라 고쳤다. 즉 지금의 경조 대흥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용문에서의 경조(京兆)는 섬서성 서안이나 장안을 뜻한다. 문헌자료에 기록하고 있는 “경조(京兆), 경조윤(京兆尹), 경조부(京兆府), 경조군(京兆郡), 경조역(京兆驛)”은 모두 섬서성 서안이나 장안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은 경조(윤,부,군,역)라 하지 않고 경사(京師)라고 칭하였다. 명나라 3대 주체(朱棣) 19년에 경사라 하였고 속칭 북경이라 한다. 따라서 대흥은 섬서성 서안이나 장안과 가까운 곳이여야 한다.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석성산(析城山)은 산서성 양성현(陽城縣) 서남에 있는 산이다. 그런데 이 석성산을 석진산(析津山)이라 적고 있다. 석진산 지역이 석진현 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이 바로 하북으로 요나라 초기에 계북이며 금나라가 대흥이라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을 유주라 하였음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정리하면 “주(周) 무왕이 동생 소공석에게 봉한 북연(北燕)인 지금의 하북 대흥현”은 석성산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로 요약된다. 북연이 하북인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즉 하내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예기집설>은 “오늘날의 위주(衛州)는 급현(汲縣)에 두고 다스리는데 즉 목야(牧野)의 땅이고 계(薊)는 유주(幽州)의 현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현대 지도에는 당시의 지명들이 지워지고 없지만 계(薊)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석진산과 석진현인 대흥현을 근거로 하여 한곳을 꼭 집어 북연의 초기 도읍지 계(薊)의 위치를 지정한다면 대략 아래 <그림 7>과 같은 도출이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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