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통고(文獻通考)>는 영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주(營州)]:은(殷) 시대에 고죽국의 땅이었고 춘추 시대에는 땅이 산융(山戎)에 속하였으며 전국 시대에는 연(燕)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요서군에 속하도록 하고 전·후한 및 진(晉) 시대에는 모두 진(秦)에 따랐다.
모용황이 유성(栁城)의 북쪽과 용산의 남쪽을 이른바 복덕(福德)의 땅이라 하여 영제(營制)와 관묘(宫廟)를 고쳐 유성을 용성(龍城)이라 하고 마침내 용성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궁을 화룡궁(和龍宫)이라 하였다. 후연의 모용보(慕容寳)와 북연의 풍발(馮䟦)이 상계(相繼)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후위(後魏)는 영주를 설치하였으며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북제(北齊)를 평정하였으나 그 땅은 오히려 고보녕(髙寳寧)에게 점거되었다. 수(隋) 문제 시기에 보녕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다시 그 땅을 영주로 삼았으며 양제 초기에 주(州)를 폐지하고 요서군을 설치하였으나 당(唐)이 다시 영주로 삼았다.”
영주는 은나라(1600-1046BC) 때 고죽국의 땅이며 춘추(770-403BC) 시대에는 땅이 산융(山戎)에 속하였으며 전국(403-221BC) 시대에는 연(燕)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요서군(遼西郡)에 속하도록 하고 전·후한 및 진(晉) 시대에는 모두 진(秦)에 따랐고 후위(386-534)가 영주(營州)를 설치했으며 수(隋)와 당(唐)이 계속 영주라고 했다고 서술하고 있어 기주이며 유주이고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와 섬서성 람전 동남 유성현의 동부를 영주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주와 영주 지역이 서로 겹치면서 유주와 영주로 함께 불렀다는 것이다. <문헌통고>의 영주는 ‘영주A’이며 인용문에 나온 유성(柳城)은 <그림 1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섬서성에 있는 람전(藍田) 동남쪽에 있다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밝히고 있다.
‘영주A’는 오호십육국 시기 북위(후위: 386-534)가 세운 곳으로 “태평진군 5년에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평진군은 북위의 연호로 440-450년이고 태평진군 5년은 445년을 뜻한다. <그림 12>에서 알 수 있듯이 유주의 일부가 영주가 되고 영주의 일부가 유주가 되어 지역이 서로 겹치고 있음을 여러 문헌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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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와 영주의 위치 연구(제17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영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주(營州)]: 유성군(桞城郡)은 오늘날 유성현(桞城縣)이 치소(治所)이다. 살펴보건데 당(唐) 개원(開元) 십도략(十道畧)에 이르기를 순(舜)이 유성을 쌓았다 하는데 즉 우순(虞舜) 이전에 이미 유성의 이름이 있고 우공(禹貢)이 기주(冀州) 지역으로 삼은 적이 있으며 12주(州)에 있으니 영주라는 이름이 고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제(齊)를 영주라 하였고 또 군국지(郡國志)에 땅이 경작하며 살기에 마땅하여 나누어 영주라 한다고 하였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며 춘추시대에는 산융의 땅이고 전국시대에는 그 지역이 다시 연(燕)에 속하였다. 사기(史記)에서 연(燕)이 장성(長城)을 쌓으니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라 하였고 요서 우북평군을 설치하였으며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요서군을 설치하였으며 전·후한(前後漢)은 이를 따랐다.”
라고 하여 영주는 은나라 때 고죽국이며 춘추시 산융 땅이고 전국시 연에 속했으며 진(秦)이 요서군이라 했으며 우공의 기주 지역이라 설명하고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처럼 <태평환우기>도 같은 지역을 유주와 영주로 함께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영주는 기주이자 유주이며 요서로 고죽국이 있던 산서성 남서부와 섬서성 람전 동남 유성현의 동부로 정리된다.
<태평환우기>에서 <상서/순전>에 나온 12주를 언급하고 있으나 인용문의 일부는 ‘영주A’와 일치하고 일부는 ‘영주B’의 것으로 혼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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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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