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와 접한 영주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 동쪽인 산서성을 하동이라 하고 위도 35도에서 나뉘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를 하북이라 했다. 산서성 남서부 일대를 기주, 유주, 영주, 요서라 했으며 이곳이 고죽국 땅이며 북연 땅이었고, 이곳에 수양산, 영평부, 노룡, 유수(난하), 갈석산 등이 위치했고 영주(A)는 섬서성 람전 동남 유성현을 포함한 동부지역이며 영주(B)는 하남성 하내에 위치한 광녕의 동쪽으로 요약 정리된다.
이들 기주는 하나라 우(禹: 2070-1600BC)가 나눈 구주(九州)의 하나이다. 영주(營州)는 <문헌통고>에서 설명하듯이 후위(後魏)가 처음 설치한 것이며 그 후 수(隋)와 당(唐)이 계속 영주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후위가 설치한 영주는 <문헌통고>, <태평환우기>, <명일통지>, <흠정성경통지>에서 언급한 영주와 약간 차이가 있는 영주로 보인다.
아무튼 유주와 영주는 섬서성 동북부를 포함한 산서성 남부와 하내로 위도 35도에서 가로로 흐르는 황하변에 위치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후위가 영주를 설치하고 534년에 후위가 망한 후 서위(535-556)와 북주(557-581)를 거치면서 수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 섬서성 동부의 ‘영주A’지역은 축소되고, 기주이자 유주지역이던 산서성 남서쪽을 유주라 하고 순이 설치했다는 광녕의 동쪽 즉 ‘영주B’를 영주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14>에서 본 바와 같이 광녕의 동쪽을 영주(영주B)라 하였으며 이곳 영주가 제(齊)나라 땅이였다고 <古經解鉤沉(고경해구침)>, <廣博物志(광박물지)>, <群書考索(군서고색)>, <畿輔通志(기보통지)>, <大學衍義補(대학연의보)>, <讀書紀數略(독서기수략)>, <山堂肆考(산당사고)>, <山西通志(산서통지)>, <尙書要義(상서요의)>, <尙書全解(상서전해)>, <歷代詩話(역대시화)>, <繹史(역사)>, <五禮通考(오례통고)>, <玉海(옥해)>, <虞東學詩(우동학시)>, <禹貢長箋(우공장전)>, <禹貢指南(우공지남)>, <禮書綱目(예서강목)>, <爾雅註疏(이아주소)>, <潛邱劄記(잠구차기)>, <帝王經世圖譜(제왕경세도보)>, <周禮訂義(주례정의)>, <天中記(천중기)>, <太平御覽(태평어람)> 등이 기록하고 있다.
영주가 어디였는가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영주A’와 ‘영주B’ 모두 황하강의 주변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하북성이나 요녕성은 황하와 인접한 지역이 아니다. 따라서 ‘영주를 하북성에 있는 난하와 요녕성에 위치한 대릉하 유역까지로 본’ 신용하의 주장은 큰 오류임이 입증되었다. 다음 <그림 16>에서 영주는 황하 주변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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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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