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면 <명일통지>, <하남통지>, <대청일통지>, <대원대일통지>, <산동통지>에서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패수 대신 추수, 격수, 추하, 제수 등으로 패수를 달리 부르고 있지만 같은 지역에 있는 동일한 하천임을 알 수 있다.
<산동통지>를 제외한 이들 모두 그 수원이 셋이라 했지만 <사기>의 습수, 산수, 열수처럼 3수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단지 세 수원의 발원지만을 명시하고 있다.
패수는 제원현과 지현(軹縣)에 있으며 맹현에 이르러 동류하여 황하로 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원과 맹현은 오늘날의 제원시(濟源市)와 맹주(孟州)임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원과 맹주는 <금사>에서 언급한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 무덕, 백향, 만선, 수무현, 무척현 등의 지명이 있는 하내(河內)라고 하는 오늘날의 하남성 황하북부임도 지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주(幽州)에 속하는 산서성 남부와 하내(河內)는 서로 경계지역이다.
요약하면 패수의 물줄기를 기록한 모든 문헌사료들은 패수가 제원현(濟源縣)에 있으며 동류(東流) 또는 동남류(東南流)하여 황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왕옥산에서 발원한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하천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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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36부
가. 왕검의 고향 단향(壇鄕)은 왕옥산과 패수 부근
왕검단군이 세운 단군조선의 핵심 영토를 밝힐 수 있는 1차사료 중 하나는 동한(東漢)의 조엽(趙曄: 또는 조욱趙煜)이 지은 <吳越春秋(오월춘추)>이고 다른 하나는 송나라 시기 라필(羅泌)이 쓴 <路史(로사)>이다.
<로사>에 “주나라 무왕시기에 단백달(檀伯達)이 있었는데 단구단성(단丘檀城: 단자는 옥돌단자로 ‘구술옥변玉에 조각단段’인데 아래아 한글에 글자가 없어 적지 못한다)이며 옛 관단(灌檀)이다. 단구는 지금의 례연(隷兗)으로 단향(檀鄕)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 (1046-1043BC) 시기까지도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백달 일명 단구단성 즉, 단향이 있었다는 중요한 고증이다.
관단(灌檀)이란 지명은 없고 대신 관양현(灌陽縣)이 있는데 “서한이 두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수평현 동남이다. 남조시기 송나라가 개명하여 구양현이라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현대 지도에 수평현이란 지명이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수평현을 찾아야 한다.
“수평현은 춘추시기 방국이다. 한나라가 오방현(吳房縣)을 두었으며 후위가 개명하여 수녕현(遂寧縣)을 두었다. 수나라가 다시 오방이라 했다. 당나라가 오원제를 평정하고 이로 인해 개명하여 수평이라 했다. 명과 청이 모두 하남성 여녕부(汝寧府)에 속하게 했다. 국민 초기의 하남성 여양도(汝陽道)다. 경한철로가 경유한다”라 적고 있다.
여양(汝陽)이란 지명은 오늘날의 하남성 낙양 남쪽에 위치한다. 낙양 바로 위가 황하이고 황하 바로 위쪽이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백달 즉 단구단성이 위치한 곳이며 옛 관단(灌檀)이다. 산서성 남쪽 왕옥산 부근에 위치했던 관단이란 지명이 후대에 황하를 건너 내려와 하남성의 여양으로 옮겨진 것으로 의심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관단이란 지명은 오늘날의 하북성 창려나 요녕성 요하근처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밖에도 단군조선과 관련이 있는 아래 지명들을 현대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위치가 다소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단丘縣’, ‘단縣’, ‘단丘邑’, ‘단陽邑’ 등의 지명들이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 하내 등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지명들은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인 요동으로 알려진 동북삼성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으므로 동북삼성은 단군조선의 중심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잘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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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37부
<여지광기(輿地廣記)>에 의하면 단(檀)은 단(壇)과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례는 산서성 남부를 나타내며 연(兗)은 연주(兗州)로 “황하와 제수(濟水: 연수, 패수)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향은 지금의 산서성 남부 왕옥산 부근을 뜻한다.
왕옥산이 바로 왕검단군이 도(道)를 닦은 곳임을 앞 1절에서 살펴본 바 있다. 연주가 황하와 제수 사이라는 기록은 <상서/우공>과 <여씨춘추/유시람>을 비롯하여 모두 14종의 문헌에 “濟河惟兗州(제하유연주)”라고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단자는 박달나무 단(檀)자가 아닌 제단단(壇)자를 써야 한다. 즉 ‘壇君朝鮮’이라 적어야 옳다.
<산해경>에는 “왕옥산은 산 위쪽에 금옥(金玉)이 있고 아래쪽에는 양석(陽石)이 있다”고 적고 있다. 왕옥산 위에서 옥이 생산된다는 말이다. 옥과 관련하여 ‘단구현’, ‘단현’, ‘단구읍’, ‘단양읍’ 등의 단자는 옥돌단자이며 ‘구술옥변(玉)에 조각단(段)’의 조합된 글자로 왕옥산 부근에 위치한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구단성’이자 ‘단향’과 ‘단구현’, ‘단현’, ‘단구읍’, ‘단양읍’ 등은 서로 관련이 있는 지명들로 여겨진다.
단군왕검과 관련된 단대(檀臺)란 지명도 나온다. “단대는 지금의 하북 영년현(임락진) 북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하북이어야 하는 산서성 남부나 하내에서 영년현이란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당시의 하북(河北)은 황하의 북쪽으로 위도 35도로 나뉘는 황하 윗쪽 산서성 남부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은 중화민국 때인 1938년경에 원래의 하북인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를 직선거리 약 2,000리가 넘는 북쪽으로 옮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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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38부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향(壇鄕)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왕옥산에서 패수가 발원하는데 이 패수를 제수(濟水)라고도 한다. 제수는 제원시(濟源市)를 거쳐 흐른다. 그런데 단국(檀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국(檀國)을 단국(單國)이라고도 한다. 서주가 봉한 나라의 하나이다. 지금의 하남성 제원시 동남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남성 하내에 있는 제수의 동남에 있는 나라는 단군조선밖에 없으므로 이 단국은 단군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이 왜곡되어 있어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곳이다. 서주(西周)는 단군조선의 신하국인 상(은)나라의 제후국이다. 서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패망시키고 자신의 동생들을 은나라의 영토인 하남성에 제후로 봉한 것이 최초의 제후국들이다.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10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古今姓氏書辯證(고금성씨서변증)>이 기록하고 있다. 문왕의 자식들을 순서대로 적으면 백읍고(伯邑考), 무왕발(武王發), 관숙선(管叔鮮), 주공단(周公旦), 채숙도(蔡叔度), 조숙진탁(曹叔振鐸), 성숙무(成叔武), 곽숙처(霍叔處), 강숙봉(康叔封), 담계재(聃季載) 모두 10명이다.
무왕은 문왕의 둘째이고 관숙선에게 관나라, 주공단에게 노나라, 채숙도에게 채나라, 조숙진탁에게 조나라 곽숙처에게 곽나라, 강숙봉에게 위(衛)나라를 봉했다. <그림 16>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의 봉지는 위(衛)를 제외하고 모두 황하 남쪽 하남성에 위치했다.
따라서 단국(檀國)을 서주가 봉한 나라들의 하나라는 것은 왜곡이자 날조 조작이다. 다음 <그림 14>에서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향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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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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