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파리 : 서울 :   시작페이지로 설정 즐겨찾기 추가하기
 
 
 
꼬리뉴스 l 뉴욕필진 l 미국필진 l 한국필진 l 세계필진 l 사진필진 l Kor-Eng    
 
뉴욕필진
·Obi Lee's NYHOTPOINT (103)
·강우성의 오!필승코리아 (40)
·김경락의 한반도중립화 (14)
·김기화의 Shall we dance (16)
·김성아의 NY 다이어리 (16)
·김은주의 마음의 편지 (45)
·김치김의 그림이 있는 풍경 (107)
·등촌의 사랑방이야기 (173)
·로창현의 뉴욕 편지 (506)
·마라토너 에반엄마 (5)
·백영현의 아리랑별곡 (26)
·부산갈매기 뉴욕을 날다 (9)
·서영민의 재미있는인류학 (42)
·신기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17)
·신재영의 쓴소리 단소리 (13)
·안치용의 시크릿오브코리아 (38)
·앤드류 임의 뒷골목 뉴욕 (37)
·제이V.배의 코리안데이 (22)
·조성모의 Along the Road (51)
·차주범의 ‘We are America (36)
·최윤희의 미국속의 한국인 (15)
·폴김의 한민족 참역사 (476)
·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37)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244)
·훈이네의 미국살이 (117)
·韓泰格의 架橋세상 (96)
폴김의 한민족 참역사
망국적인 식민사관에 언제까지 휘둘릴 것인가.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 진실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재야 사학자.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한민족사관정립의식개혁회를 이끌고 있다.
총 게시물 476건, 최근 0 건 안내
이전글  다음글  목록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제83~89부 <끝>

글쓴이 : 김태영 날짜 : 2026-01-03 (토) 18:17:46

제83부

4. 도읍을 자주 옮기고




<신당서>에 “천보(天寶: 742∼755) 말년에 흠무가 도읍을 상경(上京)으로 옮기니, 옛 도읍지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다”라고 적고 있다. 천보는 당나라의 연호이다. 대진이 동모산에 도읍하고 나서 처음 도읍지를 옮긴 기록이지만 내용 일부가 잘못되어 있다.

첫째, 상경이 아니다. 대진의 상경은 요녕성 개원이며

둘째, 개원에 청수수고(淸水水庫)가 있기는 하지만 이 청수수고를 홀한하(忽汗河)나 홀한해(忽汗海)라 부른적이 없고

셋째, 천보말년은 대진의 제4세 흠무황제(737∼793) 시기로 제3세인 무예황제(719∼737)가 되어야 하며

넷째, 홀한하[해]는 대진의 남경이 있는 하내와 하북성 사이의 천연호수인 지금의 악성수고임을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따라서 755년이 아니라 737년에 대진이 옮긴 도읍지는 남경(南京)이다.

남경에서 서경으로 언제 도읍을 옮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흠무가 793년에 상경으로 옮겼다면 57(793-737)년 사이에 서경에 도읍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제4세 흠무 대흥(737∼793) 년간에 산서성 하진시에 있던 서경(西京)에서 길림성 개원의 상경(上京)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1차 도읍지는 동모산성, 2차 도읍지는 홀한해의 남경, 3차 도읍지는 하진시의 서경에서 4차 도읍지인 상경으로 옮긴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동생 대문예가 형인 제3세 무황제(대무예)의 “말갈을 평정하라”는 명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로 도망하였으며

둘째,흠무가 직접 북쪽지역의 말갈족을 정벌하기 위해서 그 지역과 가까운 지형적인 편의상 상경 천도이고

셋째, 대흥 18년(755) 11월 9일 범양(范陽)의 당나라 삼군절도사인 안록산이 범양에서 거란, 돌궐 등을 모아 15만의 군사로 난을 일으킨지 33일 만에 하남성 낙양을 함락시키고 756년 정월에 대연국을 세웠다. 이때 당나라 왕 이융기는 사천성으로 도망하였다. 국경을 이웃하고 있는 당나라의 이 같은 정황 때문에 도성을 멀리 옮긴 것으로 보이며

넷째, 대흥 19년(756)에 당나라에서 조공과 함께 사신을 보내면서 청하기를, “금년 10월에 안록산을 칠 것이니 대진 황제는 군사 4만을 징발하여 역적 안록산을 평정하는데 도와주십시요”라고 하였으나 흠무황제는 당나라의 청을 듣지 않았다.

대흥 48년(785)에 다시 동경(東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6세 화흥황제(793∼794) 원년(793)에는 상경(上京)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다. 제11세 인수황제(818∼830) 때는 다시 서경(西京)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산서성은 계속 대진의 영토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4부

5.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며

제11세 인수황제(818∼830)에 이르렀다. 인수 선황제는 지혜와 덕이 있고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였다. “당 원화(元和: 806-820) 중에 발해왕 대인수가 남쪽의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여러 마을을 빼앗아 군(郡)과 읍(邑)을 설치했는데 1천 가옥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음은 <태백일사/대진국 본기>의 기록이다.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등 7주를 두었다. 대개마의 남쪽에 자리 잡고 땅의 넓이가 9,000리로 영토를 크게 넓히고 문치를 펼쳤다.

당, 왜(일본), 신라, 거란 할 것 없이 두려워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홀한해인 남경에서 정확하게 언제 산서성 남서부 서경으로 천도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나 인수황제 시기에 서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위에서 언급된 지명으로 추리해보면 당시 대진과 신라의 국경은 산동성 북부가 틀림없다. 천하 만방은 모두 성인흥치(聖人興治)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제11세 인수황제 시기인 818∼830년 사이 대진이 가장 번성했던 때로 보이며 당시 대진의 강역은 9,000리이다.

9,000리면 대진의 서경(西京)이 있던 산서성 황하 굴곡지점에서부터 북쪽으로 연해주를 훨씬 넘어 러시아 땅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약간의 과장이라고 본다. <신당서>에서는 대진의 영토가 사방 5천리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함께 살펴본 문헌사료들의 기록에 근거하면 대진의 강역은 최소한 6천리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5부

6. 요(遼)를 세운 거란족 야율아보기의 도발

거란족은 돌궐족과 선비족의 지족으로 단군조선 때는 모두 같은 백성이였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시에 이들은 주로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 서쪽의 하서(河西) 지방인 감숙성, 청해성, 요서(遼西)인 섬서성과 섬서성 북쪽 내몽고 지역에서 살았으나 고구려 후반에는 섬서성 서안 동부의 영주지역에 집단 거주하였다.

대진의 제6세 화흥황제 때부터 제11세 인수 선황제 사이(793∼818)에 청해성 남부 칭다현(稱多縣) 일대에 살던 거란족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부족을 규합하여 대진국에 몇 차례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여 대진은 결국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遼)에게 926년에 망하였다.

요나라가 건국될 때는 당시 요양(遼陽)인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동평군(東平郡)에서 생긴 나라이다. 요녕성 요양에 세운 나라가 아니다.

탈탈(脫脫)이 지은 <요사>의 내용을 잘 검토해보자. "신책3년(918) 겨울 12월 경자 초하루 요양의 옛 성에 행차하였다. 신책4년(919) 2월 병인 옛 요양의 옛성을 수리하여 한민(漢民)과 발해인(渤海人)으로 채웠으며 동평군으로 고쳐 방어사를 두었다. 신책6년(921) 12월 단주 순주의 백성들을 동평군과 심주로 이주하도록 허락하였다."

동평군으로 이름을 고치기 전에는 요양으로 불렀던 곳으로 황하 우측 산동성에 있는 지역이며 현재의 대륙지도에 동평(東平)이란 지명이 뚜렷이 남아있고 동평 좌측에 동평호(東平湖)가 있다.

이곳은 당시 대진의 영토로 청해성과 영주 지역에 살던 거란족이 이곳 동평에서 요(遼)나라를 세운 것이다. 대진의 남쪽 도읍지인 남경(홀한성)과는 직선거리 약 480리 떨어진 거리에 불과하지만 홀한성과 동평군은 황하강으로 서로 막혀있는 지리적 형국이다. 그 후 요나라는 차례로 대진의 서경인 산서성 하진시 등을 차츰 점령하였다.

야율아보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요(거란)나라 초대 황제(916∼926)인 야율아보기의 이름은 억(億)이고 자는 아보기(阿保機)이며 거란 질랄부(迭剌部) 출신이다.

901년 거란 요련부(遙輦部)의 흔덕근(痕德菫)이 가한(可汗)이 되자 그 밑에서 질랄부 이리근(夷離菫: 추장)이 되었으며 902년에는 하동(河東)인 황하 동쪽 산서성을 침략하였다.

질랄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우선 질랄을 질달(迭達)이라고도 한다. “질달토사(迭達土司)는 청해성 남쪽 경계이며 목축지로 목노오소하(木魯烏蘇河)에 걸쳐있다. 그의 큰 부족은 하서(河西)에 있다. 옛 서번(西番) 40족의 상하 륭포(隆布) 2족(族)이다. 질달은 본래 륭포소속의 백장(百長)인데 후에 륭포 100가구를 죽이고 그 직책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질달이란 이름의 족(族)이 되었다. 지금의 옥수토사(玉樹土司) 25족의 한 족속이다.”

“륭포토사(隆布司)는 청해성 남쪽 경계로 목노오소하 빈(濱)이다. 상하 2사(司)가 있다. 서번토사 10족의 2족이다. 지금은 질달과 합하여 1족이 되었다. 질달은 본래 륭포소속의 백장이었는데 후에 륭포 100가구를 죽이고 그 직을 빼앗았다. 이로 인하여 질달이란 이름의 족속이 되었다.” “륭포토사는 지금의 청해성 칭다현(稱多縣) 남쪽 일대에 있다. 청나라가 서번 40족의 하나로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 야율아보기는 질랄부(迭剌部) 출신이고, 질랄(迭剌)을 질달(迭達)이라고도 하며 질달은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남부 칭다현(稱多縣) 남부 일대인데 901년에 질달의 추장이 된 야율아보기는 하동(河東)인 산서성(山西省)을 침략한 것으로 요약된다.

산서성은 대진의 영토로 서경과 중경이 위치한 지역이다. 지도상에 야율아보기가 살던 청해성 남쪽 칭다현(稱多縣)의 위치를 나타내면 다음 <그림 41>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6부

<송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후당 천성(天成: 926∼929) 초에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부여성(扶餘城)을 침공하여 함락시킨 다음에 부여를 고쳐 동단부(東丹府)로 삼고 그의 아들 돌욕(突欲)에게 명하여 병사를 주둔시켜 진압하도록 하였다.

아보기가 죽자 발해왕이 다시 부여를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야율아보기가 공격하여 함락시킨 대진의 첫 성(城)은 부여부가 있는 부여성(扶餘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죽자 대진은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해 부여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거란이 함락시킨 대진의 첫 성(城)이 부여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다음 인용문을 함께 검토해보자.

“윤12월 임진일(4일) 요임금이 목엽산(木葉山)에 제사를 지내고, 임인일에 푸른 소와 흰말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도착하여 귀전(鬼箭)을 쏘았다. 정사일에 고령(高嶺)에 이르렀고, 이날 밤에 요나라 군사가 발해 부여부(扶餘府)를 포위하였다.

천현(天顯: 926∼936) 원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태양을 관통하였다. 경신일에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하였다.

요나라가 따로 발해 동평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병인일에 늙은 재상이 이끄는 발해군대가 패하였다. 이날 밤에 요 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 이리근(夷離菫) 야율사열적, 남원 이리근 야율질리(耶律迭里) 등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기사일(12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에 요 임금이 홀한성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신미일(14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羊)을 끌고서 신하 300여 명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천복성(天副城)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을유일에 요 임금이 왕 및 왕족을 이끌고 개선하였다. 임황(臨潢) 서쪽에 쌓고 왕으로 하여금 그곳에 거주시키고, 왕에게는 오로고(烏魯古)라는 이름을, 왕후에게는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내렸다.

오로고와 아리지는 요 태조와 황후가 발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로서, 그 이름을 따서 왕과 왕후에게 내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7부

본 인용문의 지리지명 하나 하나씩 조사, 교차확인 해보자.

“목엽산은 열하성 적봉현(赤峯縣) 북쪽 경계에 있다. 개노현(開魯縣)의 남쪽이다. 황하(潢河)와 토하(土河)가 서로 만나는 곳이다. <요사지리지>의 영주(永州)다. 태조가 여기에 남루(南樓)를 설치했다”라고 적고 있다. 목엽산은 내몽고에 있는 적봉 북부에 위치한다.

살갈산(撒葛山)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고령(高嶺) 역시 기록이 없다. 부여부(扶餘府)는 이미 밝힌 것으로 앞 <그림 41>을 참고하기 바란다. 야율아보기가 ‘이리근(夷離菫)’의 추장이 된 바 있었다는 내용도 앞에서 밝혔다. 홀한성(忽汗城)은 대진의 남해부 남경(南京)을 일컫는 말로 앞 <그림 41>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임황(臨潢)에 대해서 살펴보자. “임황부는 요나라가 두었다. 상경이라 하였다. 겸하여 현을 두었다. 금나라는 북경이라 했다. 또 바꾸어 임황부라 했다. 후에 북경임황로를 설치했다. 곧 폐지했다. 옛 성은 지금의 열하 임서현(林西縣)에 있다. 즉 파림좌기의 파라화둔이다. 임황이란 물(水) 이름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임황은 대진의 상경 용천부 서쪽으로 내몽고에 있는 지명이다. 앞 <그림 41>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함께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서 사료 비판을 해보도록 하자.

첫째, 임황은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부여성을 함락시킨 시기가 될 수 없고

둘째, 만약 임황이 부여성을 공격한 당시에 있었다면 굳이 멀리 서남쪽 감숙성에 위치한 대진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할 필요가 없이 아주 가까운 상경 용천부(龍泉府)를 공격하면 되며

셋째, 야율아보기의 본래 고향은 청해성(靑海省) 남부 칭다현(稱多縣) 남쪽 일대라는 사실로 대진의 부여부와 가깝고

넷째, 부여부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별도로 동평부를 부순 다음 곧바로 남경 남해부인 홀한성(忽汗城)을 공격한 것은 부여부, 동평부, 남해부가 남쪽에 서로 멀지않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따라서 요나라의 임황은 대진의 부여성을 공격할 당시에는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해 고증한 대진의 부여부(扶餘府)는 감숙성(甘肅省)에 위치한 것으로 한국사학계의 통설은 허구의 소설이었음이 입증(立證)되었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이날 밤에 요 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 이리근(夷離菫) 야율사열적, 남원 이리근 야율질리(耶律迭里) 등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기사일(12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에 요 임금이 홀한성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라고만 기술하였으나

송기호란 사람이 각주를 달면서 “홀한성(忽汗城)은 발해 수도인 상경성을 이른다.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성터가 남아있다”라고 문헌사료에 전혀 근거없는 헛소리를 하였다.

대진은 홀한성 남경에서 패망한 것이지 요녕성에 있는 용천부 상경에서 망한 것이 아니다. 야율아보기가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고쳤다는 기록은 <宣和畫譜(선화화보)>, <御批資治通鑑綱目(어비자치통감강목)>, <欽定重訂契丹國志(흠정중정거란국지)>, 그리고 <御批歷代通鑑輯覽(어비역대통감집람)>에도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8부

X. 맺음말∼1

대진의 영토인식에 대한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은 한반도 북부를 포함하여 지금의 동북삼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핵심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 같은 비정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전혀 근거없는 잡설임을 확인하였다.

대진의 정확한 강역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지리지명(地理地名) 위치와 종족(種族)에 대한 명칭 등이 선결(先決)되어야 했다.

따라서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 지역을 동북이라 했다는 사실을 문헌사료에 근거 고증했고, 동북이 요동이며 요동인 산서성 남부에 있는 왕옥산에서 발원한 하천의 이름이 패수(浿水)이자 예수(濊水)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예수란 하천으로 인하여 예(濊)와 예맥(濊貊)이란 부족의 이름이 생겼음을 확인하였다. 왕옥산과 예수(패수) 부근 일대에 왕검단군의 고향 단향(壇鄕)이 위치한 사실을 문헌사료에 의해 고증하고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단군조선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예맥조선이며 예수(패수)라는 하천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섬서성 서안에 있던 주(周)나라는 단군조선을 숙신(肅愼)이라 불렀고 전한(前漢)·위·진 시기에는 읍루(挹婁)라 하고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勿吉)이라 부르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는 말갈(靺鞨)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하면 숙신, 예, 읍루, 물길, 말갈은 단군조선(예맥조선)의 땅이나 그 지역에 살던 부족을 시대에 따라 달리 호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흐르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를 읍루의 땅이라고 했음을 확인하고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영주(營州)는 선비족 탁발규가 세운 북위(후위: 386∼534)가 설치한 지역으로 섬서성 서안 동부 일대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발해(渤海)란 이름은 모두 4가지 종류로

첫째, 천연호수인 발해

둘째, 천연호수 발해의 주변 지역을 발해군이라 한 행정상의 발해

셋째, 1928년 이후에 나타난 황해(서해)의 일부인 발해

넷째,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지어서 기록한 대조영의 국호인 발해가 있었음을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해 고증(考證)하고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때문에 대조영이 세운 나라의 국호는 발해가 아닌 진국(震國)이나 대진(大震)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문헌사료에 의해 밝히고 필자는 대진으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강(江)과 산(山)에서 연유된 지리지명 확인과 종족 명칭들을 근거로 하여 대진의 강역을 추적한 바 대진의 건국과 영토 설정은 동모산(東牟山)에서 시작된 것으로 동모산의 위치가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국사학계의 통설인 “동모산의 위치는 길림성 돈화시 서남쪽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비정, 추정, 추측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9부

X. 맺음말∼2

동모산은 읍루라고 부르던 하남성 하내에 위치한 산으로 지금은 소태산이라 부르는 산이라는 사실을 <요사십유>, <중국역사지명대사전>, 그리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근거하여 고증하고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괴멸시킨 천문령은 천문산(天問山)이라고도 불렸고 지금은 운태산이라 하는데 황하북부 하남성 수무현(修武縣) 서북 40리에 위치한 사실을 밝히고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된 “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라는 등주는 한국역사학계가 비정하고 있는 산동반도에 위치한 지금의 봉래(蓬萊)가 아니라 산동성 태산(泰山) 부근임을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거 전거를 제시하며 고증하였다.

대진의 5경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로 한국사학계는 이들 5경을 모두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비정하였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전혀 근거없는 허구의 소설이었음을 분명히 밝히며 강단사학계를 비판한다.

서경 압록부는 압록수가 흐르고 고구려의 안시성과 환도성이 있던 산서성 남서부 하진시(河津市)이고, 중경 현덕부는 산서성 남부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던 지금의 임분시(臨汾市)이며, 남경 남해부는 홀한해의 홀한성으로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와 하북성 사이에 있는 지금의 악성수고(岳城水庫)이고, 동경 용원부는 요녕성 요양(遼陽)이며, 상경 용천부는 요녕성 개원(開原)임을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입증(立證)하고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대진을 처음 공격하여 함락시킨 곳은 부여성이 있는 부여부(扶餘府)이다. 부여성의 위치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통설은 없다.

부여부는 감숙성 금산(金山)인 지금의 산단(山丹) 지역으로 부여성은 지금의 남고성을 뜻한다. 야율아보기의 본고향이 청해성 남쪽 칭다현(稱多縣)으로 대진의 다른 도성들과 비교해 볼 때 부여부와는 비교적 가깝고 거란족을 막기 위해 설치된 성(城)이였다는 이유에서 야율아보기는 대진의 부여부를 맨 처음 침략했다.

막힐부는 지금의 하북성에 있는 평천현(平泉縣)이다. 정리부는 하북성 창주(滄州)이다. 동평부는 산동성 운성(鄆城)이다. 안원부는 감숙성 지금의 경양(慶陽)이다. 회원부는 산동성 태산이 있는 등주(登州)로 태산 부근이다.

안변부는 내몽고 지금의 임서(林西)이다. 솔빈부는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이다. 장령부는 감숙성 난주(蘭州)이다.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밝힌 대진의 15부의 위치를 종합해 보면 가장 서쪽으로 감숙성에 부여부가 있고 가장 동쪽으로 길림성에 솔빈부가 위치한다.

부여부에서 솔빈부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5,415리이다. 『신당서』에는 대진의 강역이 사방 5,000리라 했고 <발해고>에서는 9,000리라 했으나 필자는 사방 6,000리라 주장하며 이 같은 주장은 본고에서 밝힌 내용들에 근거한 것이다.

대진이 망한 곳은 남경 홀한성이다. 본고 제9장 제6절에서 자세히 밝혔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


이전글  다음글  목록

뉴스로를말한다 l 뉴스로 주인되기 l뉴스로회원약관  l광고문의 기사제보 : newsroh@gmail.com l제호 : 뉴스로 l발행인 : 盧昌賢 l편집인 : 盧昌賢
청소년보호책임자 : 閔丙玉 l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아50133 l등록일 : 2010.08.31. l창간일 : 2010.06.05.
미국 : 75 Quaker Ave Cornwall NY 12518 / 전화 : 1-914-374-9793 l한국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10, 607-204 / 전화 : 010-2041-1942
뉴스로 세상의 창을 연다! 칼럼을 읽으면 뉴스가 보인다!
Copyright(c) 2010 www.newsroh.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