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솔빈부 위치
솔빈부(率賓府)는 솔빈의 옛 땅으로 화주(華州), 악주(益州), 건주(建州)의 3주를 통치한다.
화주의 위치를 찾아보자. “화현(華縣)은 한나라가 두었다. 후한(後漢)이 합하여 비현(費縣)에 넣었다. 진(晉)나라가 다시 설치했다. 후에 폐지했다. 옛 성(城)은 산동성 비현 동북 60리에 있다”라고 하지만 이 지역은 강소성과 가까운 지역으로 대진보다는 신라의 영토로 보인다.
익주를 찾아보자. “익주는 ⑴ 한나라가 두었다. 지금의 사천성 땅이다. ⑵ 전조(前趙)가 설치했으며 지금의 감숙성 성현(成縣)을 관할한다. ⑶ 서진(西秦)이 두었으며 지금의 감숙성 임담현(臨潭縣) 남쪽에 온천성(溫泉城)이 있다. ⑷ 요나라가 설치했고 지금의 봉천성 요양의 서남이다”라고 하여 익주란 지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한 곳을 확정하기가 어렵다.
건주의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건주는 ⑴ 후위가 두었으며 수나라가 택주(澤州)로 바꾸었다. 옛 관할은 지금의 산서성 진성현(晉城縣) 동북이다. ⑵ 당나라 시기 발해가 설치했다. 솔빈부에 속했다. 옛 성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길림성 돈화현에 대진의 솔빈부가 위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솔빈부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37>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77부
9. 철리부 위치
철리부(鐵利府)는 철리의 옛 땅이다. 광주(廣州), 분부(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의 6주를 통치한다.
분주에 대해서 살펴보자. “분주는 후위(後魏) 태화(477-499) 사이에 설치했다. 포자성(蒲子城)을 관할했다. 지금의 산서성 습현(隰縣) 동북에 있다. 후에 폐지했다. 북주가 다시 두었다. 수나라가 서분주(西汾州)라 했다. 또 개명하여 습주(隰州)라 했다.”
“분주부(汾州府)는 명나라가 분주를 승격하여 부(府)라 하였다. 청나라는 그대로 따랐다. 산서성에 속한다. 민국이 폐지했다. 옛 관할은 즉 지금의 분양현(汾陽縣) 이다.” “분수(汾水) 역시 분하(汾河)라 한다.” “분수는 산서성 녕무현 서남의 관잠산(管涔山)에서 출원한다. 서남으로 흘러 양곡(陽曲)을 경유한다. ...”라고 적고 있다. 분수(분하)라는 하천으로 인하여 분주란 지명이 생긴 것으로 산서성에 있는 지명이다.
다음은 포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포주는 포주부(蒲州府) 조와 포현(蒲縣) 조를 보라”고 한다. “북주가 포주(蒲州)를 두었다. 수나라가 하동군(河東郡)이라 했다. 당나라가 포주라 했다. 개명하여 하중부(河中府)라 했다. 명나라가 다시 포주라 했다. 청나라가 승격하여 포주부라 했다. 산서성에 속한다. 민국이 폐지했다. 치소(治所)는 지금의 영제현(永濟縣)으로 했다.” “포현은 지금의 산서성 포현 동남에 있다. ...청나라가 산서성 습주에 속하게 했다. 민국 초에 산서성 하동도에 속했다”라고 적고 있다. 하동은 황하의 동쪽이란 의미로 산서성을 뜻하며 영제시와 포주는 산서성 남서부에 있는 지명이다.
해주(海州)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해주는 본래 옥저국의 땅이다. 고[구]려가 사비성(沙卑城)이라 했다. 역시 비사성(卑沙城)이라고도 하며 혹시 잘못으로 비사성(卑奢城)이라고도 한다. 발해는 남경 남해부라고 부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부가 왜곡되어 있다. 옥저땅이 아니라 읍루땅이라 해야 옳다. 고구려의 사비성으로 대진의 남경이자 남해부를 의미한다. 앞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의주을 찾아보자. “의주는 후위가 두었다. 북제가 폐지했다. 고치(故治)는 지금의 하남성 급현(汲縣)이다. 당나라가 다시 두었으나 곧 폐지했다. 수나라가 두었다. 의양군조(義陽郡條)를 보라.” “의양군은 한나라의 의양향(義陽鄕)이다. 삼국시 위나라가 여기에 군을 설치했다. 옛 성은 지금의 하남 동백현(桐柏縣) 동쪽에 있다. 진(晉)나라 초기 신야(新野)로 옮겨 관리했다. 즉 지금의 신야현이다. ...진(晉) 말기에 인순현(仁順縣)으로 옮겨 관할했다. 지금의 하남성 신양현(神陽縣) 남 40리이다”라고 한다. 급현, 동백현, 신야현 등은 하남성에 위치한 지명들로 호북성, 안휘성과의 경계 지역에 나타난다. 지명을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귀주의 위치를 찾아보자. “⑴ 당나라가 두었다. 자귀현(秭歸縣)을 관할했다. 곧 주를 바꿔 파동군(巴東郡)이라 했다. 다시 귀주라 했다. 송나라는 귀주파동군이라 했다. 원나라가 승격하여 귀주로(歸州路)라 했다. 다시 낮춰 주(州)라 했다. 명나라가 주를 폐지했다. 곧 다시 두었다. ...청나라가 호북성 의창부(宜昌府)에 속하게 했다. ⑵ 당나라가 두었다. 현을 함께 설치했다.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영하(寧夏) 동남 경계에 있었다. ⑶ 요나라 초기에 설치했으며 후에 폐지했다. 곧 다시 두었다. 귀승현(歸勝縣)을 관할했다. 금나라가 주를 폐지했다. 현을 낮춰 진(鎭)으로 했다. 지금의 요녕성 복현(復縣) 동북에 토보(土保)가 있는데 귀주라 한다. 즉 그 옛터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대진의 철리부는 산서성 남부에서 황하를 건너 섬서성의 일부 지역과 하남성의 일부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철리부가 통치한 6주 중에 분주, 포주, 해주의 3주는 산서성 남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명확한 설명이고
둘째, 해주는 대진의 남경인 홀한해를 설명하고는 있으나 철리부가 관할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부적절하고
셋째, 의주에 나오는 지명들인 급현, 동백현, 신야현 등은 모두 하남성에 위치한 지명이며
넷째, 귀주를 영하 동남 경계라 한 것은 섬서성의 한 곳을 암시한 글로 보이기 때문이다. 철리부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38>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78부
10. 장령부 위치
장령부(長領府)는 하주(瑕州)와 하주(河州) 2주를 관할한다.
하주의 위치를 찾아보자. “하(瑕)는 춘추 진읍(晉邑)이다. ...수경주에 의하면 하동 해현(解縣) 서남 5리에 옛 하성(瑕城)이 있다. 말하자면 하(瑕)는 지금의 해주이다. ...산서성 임진현(臨晉縣) 동북 15리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동은 황하의 동쪽으로 산서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해주는 산서성 남부 천연염지인 운성염지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하(하주)는 산서성 남부를 지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주(河州)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⑴ 하주(河州)는 전량(前涼)이 두었다. 지금의 감숙성 옛 난주(蘭州) 공창양부(鞏昌兩府)의 땅이다. 곧 서진의 도읍지로 했다. 후위 초에 포한진(枹罕鎭)이라 했다. 후에 하주(河州)를 설치했다. 북주가 또 포한군을 두었다. 수나라가 군을 폐지했다. 또 주(州)를 바꾸어 포한군이라 했다. 당나라 이궤(李軌)가 다시 하주를 설치했다. 후에 개명하여 안향군(安鄕郡)이라 했다. 또 다시 하주라 했다. 송나라가 하주안향군을 두었다. 금나라 역시 하주라 했다. 원나라는 하주로(河州路)라 했다. 명나라는 하주위(河州衛)를 설치했다. 다시 하주라 했다. 청나라는 감숙성 난주부(蘭州府)에 속하게 했다. 민국은 도하현(導河縣)으로 바꾸었다.
⑵ 요나라가 두었다.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봉천성 경계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주가 여러 이름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가 봉천성 경계에 설치했다는 기록은 왜곡이라 믿는다. 구체적으로 위치를 밝히지 않고 “∼경계”라는 표현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나 객관성이 없다. 따라서 대진의 장령부는 지금의 감숙성 난주가 타당하다. 다음 <그림 39>에서 장령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79부
지금까지 대진(大震)의 15부의 위치를 모두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찾아 고증(考證)하고 그림과 함께 제시하였다.
대진의 다섯 곳의 도읍지 가운데 서경(西京)과 중경(中京)은 산서성에 위치하고 남경(南京)은 하내와 하북성 사이에 있는 홀한해 즉 지금의 악성수고에 위치하며 동경(東京)과 상경(上京)은 요녕성에 위치하였다.
감숙성 부여부에서 길림성 솔빈부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5,400리로 <신당서>가 언급한 동서 5천리에 부합되는 영토이다.
다음 <그림 40>에서 5경의 위치와 “용원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이고, 남해는 신라도이다. 압록은 조공도[당도]이고 장령은 영주도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라는 내용을 비교해 주기 바란다.

“조공도”에 대한 논평이다. 문헌사료들을 조사, 비교, 교차확인 해보면 지나인들의 병적인 역사왜곡 기록 중에 “조공(朝貢)”이란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조공이란 ‘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선물)을 바친 행위나 그 예물을 뜻하는 것’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속국(屬國)이 하는 행위이다.
대진(大震)은 당(唐)나라를 패배시키고 황제라 칭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다. 어떻게 칭제건원을 하고 당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춘추필법의 연장으로 문헌사료에 기록된 ‘조공’은 무시해도 좋다. 청나라가 19세기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기록한 내용이 사실인가 묻는다. 조공이 ‘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선물)을 바친 행위나 그 예물을 뜻한다’면 미국과 영국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는가를 한번쯤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동서양 역사를 공부한 필자의 역사지식으로는 미국과 영국 역시 지나 왕조인 청나라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조공도”를 “당도(唐道)”라고 적는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0부
VIIII. 대진국의 통치 형태
1. 대진의 황제 계보
대진(大震)은 칭제건원을 한 황제국으로 고구려의 대장군 대중상이 고구려가 망하던 해인 668년에 세운 후고구려를 30년 동안 존속시키다가 대중상이 사망 후 진국열황제란 시호를 올리고 아들 대조영이 698년에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대진으로 바꾸었다.
제1세 중상 진국열황제(仲象 振國烈皇帝:연호는 중광重光, 668∼698), 제2세 조영 성무고황제(祚榮 聖武高皇帝:연호는 천통天統, 698∼719), 제3세 무예 무황제(武藝 武皇帝:연호는 인안仁安, 719∼737), 제4세 흠무광성문황제(欽武光聖文皇帝:연호는 대흥大興, 737∼793),
제5세 원의 황제(元義 皇帝:성품이 포악하여 재위 1년 만에 폐위된 황제), 제6세 화흥 성황제(華興 成皇帝:연호는 중흥中興, 793∼794), 제7세 숭린 강황제(崇璘 康皇帝:연호는 정력正曆, 794∼809), 제8세 원유 정황제(元瑜 定皇帝:연호는 영덕永德, 809∼812),
제9세 언의 희황제(言義 僖皇帝:연호는 주작朱雀, 812∼817), 제10세 명충 간황제(明忠 簡皇帝:연호는 태시太始, 817∼818), 제11세 인수 선황제(仁秀 宣皇帝:연호는 건흥建興, 818∼830), 제12세 이진 화황제(彛震 和皇帝:연호는 함화咸和, 831∼857),
제13세 건황 안황제(虔晃 安皇帝:연호는 대정大定, 857∼871), 제14세 현석 경황제(玄錫 景皇帝:연호는 천복天福, 871∼894), 제15세 위해 황제(瑋瑎皇帝:폐위되어 시호 없음, 894∼906), 제16세 인선 애황제(諲璿哀皇帝:연호는 청태淸泰, 906∼926),
모두 16세 259년간 해동성국을 누렸다. 668년에서 926년까지 259년간 대륙을 지배하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은 동이배달한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1부
2. 대진의 영토는 6,000리
<구당서>의 기록에, "성력(698)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다. 돌궐에 사신을 보내 서로 교통하였다. 그 땅은 영주의 동쪽 2천리이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해있다."
다음은 <신당서>의 내용이다. "조영(대조영)은 즉시 비우(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아주먼 곳에 의지하여 마침내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진국이라 하고 왕이 되었다. 사신을 돌궐에 보내 서로 교통하였으며 땅은 사방 5,000리에 달하였고 호구(가구)는 10여만 호였으며 정예병이 수 만명이였다.
서계(書契)를 상당히 잘 익혔으며 맨 먼저 부여를 취하고 옥저, 변한, 조선의 바다(황하)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획득했다."
<신당서> 기록은 한마디로 상고사(上古史)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신당서>는 송나라 때 구양수, 송기 등이 1044∼1060년 사이에 걸쳐 완성한 역사서인데 ‘한자’ 대신 ‘서계’란 표현을 쓴 점이며,
약 1,240여년 전에 이미 고구려의 영토가 된 부여, 옥저, 변한, 조선(단군조선) 등을 기록한 것은 900년 동안 대륙을 지배한 고구려를 고의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자는 한(漢: BC206∼AD220)나라 때 정리되어 한자(漢字)로 명명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위의 <신당서>의 기록으로 보아 한자란 명칭은 한나라 때부터가 아닌 1912년 손문의 중화민국 이후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대진국의 초기 강역은 감숙성과 내몽고를 포함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차지하였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0리가 개척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82부
3. 대문예(大門藝)의 항명
대조영 성무고황제는 태자인 대무예와 차남인 대문예를 두었다. 제3세 무예 무황제(719∼737)가 된 대무예는 북쪽 지역에 살고있는 말갈을 평정하여 백성으로 삼고 그곳의 책임자로 도독(都督)을 두었는데 말갈은 주로 흑룡강성과 내몽고 그리고 길림성, 요녕성 일부에 거주한 대진의 백성이다.
인안(제3세 무예황제의 연호로 719∼737) 7년(726)에 흑수말갈의 사자가 당나라 왕 현종(이융기)을 찾아가자, 당 이융기는 그곳 흑수말갈 땅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고 당나라 관직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흑수말갈은 대진국의 백성이였으나 대진의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한 것이다.

“흑수말갈은 분명히 당과 공모하여 우리 대진을 전후에서 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화가 난 무예황제는 동생 문예와 외삼촌 임아상(任雅相)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대문예는 일찍이 당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러있어 당나라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예는 흑수말갈의 정벌을 반대한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관리를 요청했다고 해서 우리 대진이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나라와 원수지간이 됩니다”라고 부당성을 말하면서 흑수말갈의 정벌을 반대하자 무황제는 사촌형인 대일하에게 대신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문예를 소환하여 죽이려 하자 문예는 당나라로 도망쳐버렸다.
당 왕 이융기는 그를 우효위장군으로 삼았다. 무황제는 마문궤와 총몰아를 당나라에 보내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하였으나 이융기는 ‘대문예가 우리 당에 귀순하였으니 죽일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대진은 당과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