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경 남해부
옥저(沃沮)[읍루]의 옛 땅으로 남경 남해부이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주를 통치한다.
먼저 옥주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당나라가 기미주(羈縻州)를 두었다. 고치(故治)는 지금의 경조(京兆) 대흥현(大興縣) 동남 50리이다. 송나라가 조주(趙州)를 승격하여 경원부(慶源府)라 했다. 금나라가 고쳐 옥주라 했다. 원나라가 다시 조주라 했으며 즉 지금의 직례 조현(趙縣)에서 다스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곳이다.
첫째, ‘동옥저(東沃沮)는 산서성 여량산맥(개마대산)과 압록수 사이’를 일컫는 말로 대진의 남경이 있던 곳은 읍루이고
둘째, 경조 대흥현은 산서성 남동부에 위치한 석성산(析城山) 부근을 뜻하며, <주(注)> 대흥현은 두 곳으로 한 곳은 오늘날의 섬서성 임동현 동북이고 또 다른 한 곳은 산서성 석성산 부근이다.
셋째, 대흥현 동쪽인 하내(河內)에 천문령(산)이 있고 동북에는 동모산과 홀한성(忽汗城)이 위치한 지역이며
넷째, 직례는 산서성 남부를 지칭한 것이고
다섯째, 따라서 동옥저란 여량산맥과 압록수 사이가 아닌 또 다른 지명이 하내에 있었거나 아니면 읍루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 등을 제시한다.
홀한성은 동모산성이 있던 황하북부 하남성과 하북성 사이에 있는 오늘날의 청장하(淸漳河)와 탁장하(濁漳河)가 서로 만나 동쪽으로 흐르다가 경도 114.3도와 위도 36.5도의 위치에 하나의 천연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를 당시 홀한해(忽汗海)라 부른 것으로 하남성 학벽시에서 북쪽으로 약 134리이다.
지금은 악성수고(岳城水庫)란 저수지로 1959년에 착공하여 1970년에 완공하여 홍수를 막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곳은 먼 옛날 동부여 대소황제의 막내 동생이 세운 나라로 갈사국인데 일명 옥저라고도 했던 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된 곳이며 고구려의 사비성(沙卑城) 자리이다.
대조영이 이곳 홀한해 근처에 도성(都城)을 만들었기 때문에 홀한성이라 부른 것이며 따라서 남경이자 남해부가 된 것이다.
정주에 대한 기록은 고금지명대사전이나 역사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지나 대륙의 지리지명을 밝히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지명대사전이다. 그런데 대진의 천문령, 동모산, 홀한해에 있는 남경 남해부 등이 위치한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어야 할 정주(睛州)가 없다는 것은 고의적인 누락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하남성 정주(鄭州)가 당시 대진의 남경 남해부가 통치한 그 정주였는데 역사적 사실을 감추기 위해 글자를 바꾸고 지명대사전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동모산성 도읍지나 남경 도읍지에서 황하만 건너면 정주(鄭州)이고 대진의 동평부와 회원부가 정주 우측인 산동성에 위치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초주에 대한 기록이다. “발해국이 두었으며 치소는 초산현이다. (지금의 조선 맹산(孟山) 동산성리이다). 요나라가 옮겨 폐지했다”라고 적고 있다.
맹산을 찾아보자. “맹산은 사천성 영경현(榮經縣) 동쪽에 있다. 서로 전하길 삼국 시기 촉나라 제갈량이 맹획을 사로잡은 곳이 여기다”라고 하여 대진의 남경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지명을 설명하고 있다.
인용문의 조선은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 지역을 일컫는 말로 맹산(孟山)이 아니라 맹현(孟縣)이나 우읍(盂邑)의 왜곡이라 주장한다. 맹(盟)과 우(盂)는 8획으로 비슷한 글자로 혼동하기 쉬운 자(字)이다.
맹현을 맹주(孟州)라고도 하며 하남성 황하변에 위치하며 우읍(盂邑)은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濮陽縣) 동남”으로 이들 두 지명은 천문산, 동모산, 홀한해(남경)가 위치한 지역에 함께 있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남경 남해부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와 하북성 사이에 위치한 오늘날의 악성수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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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6부
4. 동경 용원부
동경 용원부는 예맥의 옛 땅으로 용원부(龍原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4주를 다스린다.
경주의 위치를 알아보자.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지금의 열하 임서현(林西縣), 경붕현(經棚縣) 두 현 및 찰합이(察哈爾) 북부의 땅이다. 관할한 옛 성(城)은 파림(巴林) 서북 객라목륜하(喀喇木倫河) 옆이다. 몽고의 옛 이름은 삽한성(揷漢城)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경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용원현(龍原縣)이다. (지금의 길림성 혼춘시(琿春市) 남쪽 도간강(圖間江) 동쪽 기슭의 온특혁포성(溫特赫布城)이다. 일설에는 즉 서반랍성자(西半拉城子)이다). 요나라가 옮겨 폐지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경주의 위치를 열하객라목륜하 옆이라 하고 역사지명대사전에서는 길림성 도간강 동쪽 기슭이라 하여 두 출처가 서로 다르다.
염주(鹽州)를 보자.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지금의 조선 경계에 있다.”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용하현(龍河縣)이다. (즉 지금의 러시아 연방 고랍사기 북쪽 하암저하(下岩杵河)이다.) 요나라가 폐지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조선과의 경계라 하고 역사지명대사전은 러시아연방이라 하여 두 출처가 서로 다르다.
목주를 살펴보자. “목주는 요나라가 설치했고 지금의 조선 함경도와 경계이다.” “발해국이 두었으며 치소는 회농현(會農縣)이다. (지금의 조선 경원(慶源) 남 용북동(龍北峒)이다)”라고 설명하여 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조선 함경도와 경계라 하고 역사지명대사전에서는 조선 경원 남쪽 용북동이라 하여 역시 두 출처가 서로 다르다.
끝으로 하주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요나라가 설치했고 지금의 조선 경계이다.” “발해국이 두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길림성 혼춘시 동북 사제성(沙齊城)이다. (살기성薩其城이다). 요나라가 폐지했다”라고 적고 있어 고금지명대사전은 조선 경계라 하고 역사지명대사전은 길림성 혼춘시 사제성이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정리하면 대진의 동경 용원부가 통치했다는 경주, 염주, 목주, 하주는 길림성, 내몽고, 조선 함경도 경계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동경 용원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금사>에 “요양부(遼陽府)의 동경유수사는 본래 발해의 요양 고성이다”라고 밝히고 있고 <三朝北盟會編(삼조북맹회편)>에도 “발해 요양부를 동경이라 했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요양부는 요나라가 두었으며 금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원나라는 요양성이라 했다. 즉 지금의 요녕성 요양현에서 관할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대진의 동경 용원부는 오늘날의 요녕성 요양임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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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7부
5. 상경 용천부
상경은 용천부(龍泉府)로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3주를 통치한 곳으로 요녕성 개원현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용주는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즉 지금의 요녕성 개원현(開原縣)에서 관할했다”라고 적고 있으며
“호주는 요나라가 설치했는데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봉천성 경계이다”라 하고, “발주는 요나라가 설치했다.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봉천성 경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용주는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영녕현(永寧縣)에 있다.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서남 동경성이다. 요나라가 폐지했다”라고 하며
“호주는 발해국이 설치했다. 치소는 즉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서남 경박호 북쪽 장랍자(墻磖子)이다. 요나라가 폐지했다”라고 하며 “발주는 발해국이 두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북쪽이다. 요나라가 폐지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정리하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용주, 호주, 발주를 모두 요녕성(봉천성)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은 이들 지명들을 모두 흑룡강성 영안현 지역으로 적고있어 두 출처의 내용이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료비판과 교차확인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천보(天寶: 742∼756) 말년에 흠무가 도읍을 상경(上京)[남경]으로 옮기니 옛 도읍지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다”라고 <신당서>가 기록하고 있다.
우선 상경이 될 수 없다.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인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寧安)으로 동모산성(東牟山城)에서 직선거리로 약 4,200리 떨어진 곳이다. 그리고 영안 주위에는 홀한하가 없다.
홀한하[해]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와 하북성 사이의 천연호수로 청장하(淸漳河)의 물을 받아 생긴 오늘날의 악성수고(岳城水庫)를 뜻하며 동모산성에서 악성수고의 남경(南京)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00리에 위치한다. 4,200리 보다는 400리가 <신당서>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대진의 최초의 도읍지는 동모산성이었으며 2차 도읍지는 남경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홀한해에 위치한 도읍지를 남경이라 했고 남해부라고 지칭했다.
필자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을 따른다.
첫째, 고금지명대사전의 초판은 1931년이고 재판은 1982년인 반면 역사지명대사전의 초판인 1995년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65∼14년 전에 출판되어 더 신뢰감이 가고
둘째,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은 대진의 지리지명을 철저하게 왜곡한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1919)을 근거로 편찬한 것이고
셋째,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기록한 대진의 5경 지명들을 한결같이 “발해국이 설치했다. 치소는 ∼이다”라는 판에 박힌 표현이 역사왜곡을 강조한 방법이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 이다.
한국역사학계는 상경 용천부를 흑룡강성 영안으로 비정하지만 필자는 요녕성 개원임을 전거로 제시한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대진의 5경의 위치를 다음 <그림 25>와 <그림 26>을 함께 제시하니 비교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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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8부
대진의 지리지명들을 동북삼성, 즉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집중하여 왜곡한 사람은 다름 아닌 중공의 사학가(史學家) 김육불(金毓黻: 1887∼1962)로 그가 1919년에 지은 <발해국지장편>에서이다.
이 같은 지명왜곡은 당나라의 재상을 지내고 <도리기>를 찬한 가탐(賈耽: 730∼805)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명나라와 청나라가 지리지명을 지속적으로 조작했다.
김육불의 지명 날조에 일조한 조선인들을 열거하면, <동국여지승람>을 지은 노사신, <동국통감>을 찬한 서거정 등, <해동역사>를 지은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 <대한강역고>를 지은 장지연, <아방강역고>를 찬한 정약용 등이다.
1471년에 편수한 <동국여지승람>에서 노사신은 “함경북도 종성부의 고적에 [대진의] 남경이 있다”라는 망발을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함경북도에 대진의 남경인 남해부 홀한성이 있다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림 26>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함경북도에 남경 남해부를 추정한 원조(元祖)는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이다.
“태백산의 본명은 불함산이고 또는 개마대산이라 한다. 연이어 뻗친 그 맥을 단단대령이라고 한다. 지금은 장백산이라 부르고 조선에서는 백두산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김육불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전혀 근거없는 주접을 떨었다.
실학자라고 하는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가 지은 <해동역사>에서 “동모산은 영고탑 부근의 땅에 있다”라고 헛소리를 했으며,
“정약용은 말하기를 ‘지금의 경박호에서 남쪽으로 2백리에 액돈산(額敦山)이 있다. 그 높이가 60리로 바로 호이합하의 서쪽에 있으며 이것이 동모산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했는데 그 설명이 옳은 것 같다”라고 동조(同調)하여 정약용이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동모산(東牟山)을 흑룡강성 경박호 부근으로, 직선거리 약 4,090리 옮겨놓은 만행(蠻行)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김육불은 “[정약용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라고 문헌사료에 근거없는 부화뇌동까지 하고 있다.
김육불은 또 “양수란 오늘의 태자하이다. 요양현성의 북쪽에 있는데, 발해대씨의 먼 조상이 일찍이 여기서 살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야율우지가 양수(梁水)유역이 곧 그들[대씨일족]의 고향이라고 한 것을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야율아보기를 꾸짖는 모양새이다.
양수(梁水)는 양산(梁山)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진입하는 하천으로 여량산(맥)을 뜻하므로 산서성에 있다. 산서성이 고구려의 핵심 영토였고 바로 이곳이 대중상의 고향이다. 그러니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이니 속말말갈족이니 하는 따위는 얕은 지식을 가진 사학자들의 잡설로 본고에서 이미 밝힌 부분이다.
김육불은 자신이 1백종의 서적을 수집했다고 주장했으며 발해사연구회에서 옮긴 <발해국지장편>에는 “130여 종에 달하는 문헌을 인용하였다”고 했으나 100∼130여 종의 문헌만 보았으니 허구의 소설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김육불은 또 대역사학자 구양수가 “사실대로 적은 <신당서>를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신빙성이 없는 <길림통지> 등을 인용하고 있으나 <길림통지>는 <구당서>나 <신당서>를 뒤 짚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기본 상식이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진의 역사를 기록한 1차사료가 되지만 지방지인 <길림통지>는 2차사료로 참고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당서>에서 발해가 백제의 땅을 얻었다고 했는데 큰 잘못이다”라고 주장하지만, 백제의 땅인 산동성과 하남성 땅을 대진과 신라가 나누어 가진 것은 역사적 사실로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옳고 김육불이 틀린 것이다.
이런 자가 사학가 행세를 했으니 오늘날의 동북공정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김육불에 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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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9부
VIII. 그밖의 부(府) 위치
1. 부여부 위치
부여성(부여부)의 위치에 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은 없고 잡설(雜說)만 분분(紛紛)할 따름이다.
“첫째, 길림성 장춘(長春)과 농안(農安) 부근 설
둘째, 금나라 발흥지인 흑룡강성 아성(阿城) 부근 설
셋째, 요녕성 창도(昌圖) 북부 사면성(四面城) 부근으로 보는 설
넷째, 송화강 하류 지역으로 보는 설
다섯째, 길림시 일대로 보는 설” 등 다양하다.
설(說)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역사학계는 아직 부여성(부여부)의 위치를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함께 부여부의 위치를 추적해 보도록 하자.
“부여부(扶餘府)는 부여의 옛 땅으로 항상 강한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주(扶州), 선주(仙州) 두 주를 통치한다.” 부주의 위치를 찾아보자. “부주는 서위(西魏)가 토곡혼(吐谷渾)을 올려 등주(鄧州)를 설치했고 수나라가 부주라 했다. 상안(尙安)에서 관할한다. 당나라가 옮겨 동창에서 관할했다. 나중에 폐지했으며 지금의 문현(文縣) 서쪽 변방 밖이다”라고 하여 부여부가 오늘날의 감숙성 문현 서쪽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통전>에 부여는 남쪽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은 읍루와 접하며 서쪽은 선비와 접한다. 후에 고[구]려가 그 땅을 차지하고 부여성(扶餘城)을 설치했다. 당나라 건봉 2년(668)에 설인귀가 고[구]려를 쳐부수고 금산(金山)까지 나아가 부여성을 빼앗았다. 나중에 발해에 속했다. <신당서>에 이적이 고[구]려를 치고 부여성을 빼앗았다. <통고>에는 부여의 옛 땅으로 발해가 부여부(扶餘府)라 하였으며 항시 강한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주(扶州), 선주(仙州) 두 주를 관할한다.”
라고 적고 있다. 요약하면 부여의 땅을 고구려가 차지하여 부여성을 두었는데 후에 발해(대진)가 이 부여성을 부여부라고 했다. 부여성 부근에 금산(金山)이 있다고 하였으니 금산의 위치를 추적해 보겠다. “금산은 감숙성 산단현(山丹縣) 서남”이라 말하고 있다. 산단은 장액(張掖) 동북부에 위치하고 따라서 부여성인 부여부는 장액 남쪽 지금의 남고성(南古城)임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선주(仙州)의 위치를 찾아보자. 유감스럽게도 선주는 없고 선주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선해(仙海) 즉 청해이다. <한서지리지>에 금성군 임강현 서북 요새밖에 이르면 선해염지(仙海鹽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주는 선해 부근으로 청해성 청해 근방을 일컫는 것으로 압축된다. 청해성은 부여부가 있는 감숙성 남쪽으로 감숙성과 접한 지역이며 청해성에 있는 천연호수를 서해(西海)나 청해(靑海)라고도 했지만 신선선(仙)자를 넣어 선해(仙海)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해성에 선해가 있으므로 천연호수인 선해에 의해 선주란 지명이 생긴 것이니 대진의 부여부가 선주(仙州), 즉 청해를 통치했다는 논리를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대진의 부여부에서 이곳을 관할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여 대진의 부여부 위치를 제시하면 다음 <그림 27>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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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70부
2. 막힐부 위치
부여의 옛 땅으로 막주(鄚州), 고주(高州) 두 주를 관할한다. “막힐부는 당나라 시기 발해가 두었으며 막주와 고주 두 주를 통치했다. 지금의 봉천성 창도현(昌圖縣) 남쪽 경계다”라고 적고 있다.
봉천성 창도현은 동경 용원부(龍原府)와 가까운 지역으로 동의할 수 없다. 따라서 고주(高州)를 찾아보자. “고주는 요나라가 두었으며 금나라가 폐지하고 삼한현(三韓縣)이라 했다. 다시 승격하여 고주라 했다. 명나라 초기에 폐지했다. 옛 관할한 곳은 지금의 열하성 평천현(平泉縣) 옛 대녕성(大寧城) 서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열하성은 1928년부터 열하특별구를 바꾸어 설치하고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였다. 관할했던 경계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과 내몽고 일부 지역이며 1956년에 폐지했다.”
지금의 하북성은 1928년에 설치한 행정 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1928년 이전에는 하북성이라 하지 않았다.
고주를 평천현이라 했으며 평천현의 위치를 찾으면 대진의 막힐부가 있었던 곳을 확인할 수 있다. 평천현은 지금의 하북성에 위치한 지역으로 하북성, 요녕성, 내몽고가 서로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대진의 막힐부는 현재의 하북성 평천현 지역임이 고증된 것이다.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 <그림 28>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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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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