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같은 지명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면서 너무나 복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피면서 교차확인하면 이들 하천과 지명들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황하(黃河)와 패수(浿水)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인 한반도의 대동강이나 용흥강이 위치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니하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계속 추적해 보겠다.
“선화현은 한(漢)나라가 설치하였는데 광녕현(廣寧縣)이다. 진(晉)나라는 그대로 따랐다. 당나라가 나누어 문덕현을 두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화현”, “관자구”, “흑성천수”, “문덕현” 등의 지명이 지워지고 없지만 다행히 광녕현에 대한 기록이 있다. 광녕현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 수무현(修武縣) 동남쪽을 일컫는 말이다.
수무현은 하내(河內)에 위치한 지명으로 대륙 지도에는 이곳 한 곳에만 있는 지명이다. 다음 <그림 20>에서 광녕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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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6부
잡힐 듯 보일 듯하지만 아직은 정확하게 니하(泥河)가 어디인지 꼭집어 확정지을 수 없다. 그런데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다.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읍루의 동쪽 동모산에 의거했다. (살펴보건데 동모산은 사서나 지리지 모두 심양성(瀋陽城) 동쪽 20리로 지금의 천주산(天柱山)이다. 구당서에는 계루라 하였으나 이것과 다르다) 영주에서 곧바로 동쪽으로 2천리이다. 니하를 경계로 하였다. (살펴보건데 원일통지가 거란국지를 인용하여 말하길 패수(浿水)가 즉, 옛 니하(泥河)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침내 대진과 신라의 국경을 마주했다는 니하가 다름 아닌 패수를 지칭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패수가 니하이고 니하가 패수였다.
그러나 이곳 저곳 왜곡된 부분이 있어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곳이다.
첫째, 심양(瀋陽)의 瀋자는 ‘강이름 심’자로 “요녕성에 있는 강”이름이다. 하내에는 지금도 심양(沁陽)이란 지명이 있다. 沁자는 ‘강이름 심’자로 “산서성에서 발원한 심수”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하내에 위치한 동모산을 왜곡 조작하기 위해 심양(沁陽)을 심양(瀋陽)으로 글자를 바꾼 것이다.
둘째, 구당서의 계루나 신당서의 읍루는 같은 지명을 달리 부른 것이다. 읍루는 한(漢)나라 시기 부르던 이름이며 계루란 고구려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결국은 같은 지역을 계루와 읍루로 지칭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위치한 패수가 니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필자의 분석으로는 대진과 신라의 경계는 니하(패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니하는 당나라와 대진의 국경이며 대진 초기의 신라와 대진의 국경은 오늘날의 황하를 중심으로 황하 이북 산동성은 대진의 영토 그리고 황하 이남의 산동성은 신라의 영토라 주장한다.

첫째, 황하 이남의 하남성의 낙양, 정주를 포함한 지역은 당나라 영토이고
둘째, 니하는 황하의 북쪽에 범수(氾水)는 황하의 남쪽 하남성에 위치하여 니(泥)와 범(氾)자가 서로 비슷하여 혼동될 수 있는 하천으로 범수가 대진과 당나라의 국경이고
셋째, 하남성 개봉으로부터 산동성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로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하자 신라가 황하 이남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넷째, 니하와 범수 사이의 황하는 폭이 넓어 천연요새의 국경이 된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산동성이 백제 강역이였다는 문제[사실]에 대해서는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음 <그림 21>에서 니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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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7부
VI. 대진이 벌(伐)한 등주의 위치
<구당서>의 기록이다.
“[개원] 20년(732)에 무예(武藝)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공격하였다. [현종은]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토벌케 하는 동시에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시켜 신라에 가서 병(兵)을 징발하여 발해의 남경을 치게 하였다.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전공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무예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몰래 동도(東都)에 사자를 보내 자객(刺客)을 빌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저격하도록 하였으나 문예는 자객을 물리쳐서 죽지않았다. [현종은] 하남부(河南府)에 명하여 그 적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라고 하였으며
<신당서>에서도
“10년 후에 문예가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게하니 임금(현종)은 급히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幽州)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공격하는 한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사신으로 신라에 보내 군사를 독촉하여 발해의 남쪽을 치게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한길이나 쌓여서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문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刺客)을 뽑아서 동도(東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문예가 그들을 물리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하남(河南)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라고 적고 있다.
당나라 개원 20년(732)은 대진 제3세 무예 무황제 인안 14년(732)으로 집권 14년째 되던 해이다.
해적(海賊)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해적이란 “해상에서 선박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는 도둑”을 뜻한다. 그런데 일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신라에까지 지원병을 요구했다는 대목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 없다.

이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국의 장수는 군사를 거느리지 바다에서 노략질하는 해적집단을 인솔하지 않고
둘째, 명색이 당나라 자사란 자가 해적집단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은 구실이며
셋째, 일개 해적집단을 토벌하는데 대(大) 당나라가 신라에 군사요청을 할 필요도 없고
넷째, 날씨를 핑계삼아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구차한 변명과
다섯째, 대진의 군사에게 완패한 것을 감추기 위해 천재지변의 날씨를 끌어들이고
여섯째, 대진이 정벌한 등주(登州)는 산동반도에 있는 지금의 봉래(蓬萊)가 아니라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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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9부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기술하고 있는 등주(登州)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등주는 당나라 여의원년(如意元年: 주 692)에 두었으며 치소는 모평현에 있다(지금의 산동성 모평현이다). 신룡(705∼706) 3년에 옮겨 봉래현(蓬萊縣)에서 관할했다(지금의 산동성 봉래현이다).
천보(742∼756) 원년에 바꾸어 동모군이라 하고 건원(758∼759) 원년에 다시 등주라 하였다. 명나라 홍무(1368∼1398) 원년에 승격하여 등주부(登州府)라 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두 사서를 잘 검토해 보면 춘추 시기의 모자국이 있던 산동성 태산 부근을 당나라가 등주란 이름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산동반도 북쪽에 위치한 봉래현(蓬萊縣)으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용 3년이라면 707년에 해당되는 해로 신용(705∼706)과 다르다. 따라서 당나라의 지명 조작이자
역사 왜곡임이 고증된 것이다.
대진의 장문휴 장수가 정벌한 등주(登州)는 지금의 봉래(蓬萊)가 아닌 산동성 태산(泰山) 부근이다. 다음 <그림 22>에서 등주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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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0부
지금까지 등주의 위치를 추적하여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였으니 그동안 한국 역사학계가 얼마나 무책임하였으며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없는 허구의 소설로 일관해 왔는가를 짚어보고자 한다.
유득공의 <발해고>에서는 “개원 20년(732)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적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라고 <구당서>·<신당서>와 같은 내용이다.
첫째, 대진의 장수 장문휴가 등주를 정벌한 때는 732년이고 대진이 상경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천보(天寶) 말년이니 756년의 일이며
둘째, 상경(上京)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동모산(東牟山)이나 남경(南京)인 홀한성에 있을 시기이고
셋째, 대진이 등주를 공격하려면 도읍지에서 황하(黃河)만 건너면 되며
넷째, 본문에서의 해(海)를 송기호는 “바다”라고 번역하였으나 당시의 해(海)란 황하를 뜻한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만 읽어보았어도 쉽게 알 수 있고
다섯째, 동모산이나 남경에 도읍한 대진의 장문휴가 해적을 이끌고 발해만까지 나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봉래를 공격한다는 것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 없는, 다시 말하면 지적수준이 극히 유치한 발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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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흥렬
선생님의 역사 바로알아가는 길목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신흥 근대역사까지도 일제식민지로 남아있는체로 친일본 일제 반민특위가 독립투사 반민특위를 쳐부시고 김구투사를 죽이고 제주4.3 민중을 때려죽인 친일매국 빨갱이 간첩당 카멜레온정부와 카멜레온당이 80년간 친일매국 계엄령을 선포한 역적들이 운영하는것을 야당20년 보조카멜레온당이 되어서 함께 휩쓰려서 역적이 된것을 모르는체 이재명이 유력한 6월 선거도 매국놈들이 개. 새끼들이 정치놀음을 하고있으니
답답한 한국정치입니다,
허참! 이보시오. 내말좀 들어보소!
가장 시급한것이 친일청산이오. 그다음 새헌법이 필요한때이다,
병신들이 헌법을 말하면 겨우 한다는것이 대권자와 선거를 개헌하는것이 전부이라면 그 어떤놈에 새끼가 대권자를 하여도 지난 80년동안 대통령을 해쳐먹은 자식들과 조금도 달라지지않는다는것을 알아야한다! 새헌법으로 갈아치우는것만이 세계를 통합시킬수있다! 개소리는 썪은 똥국물을 마시는것이 약이다!
배병윤 올림!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1부
VII. 대진의 5경 위치
대진은 5경 15부 62주 10군 94현의 행정 조직을 가진 대제국으로 다섯 곳의 도읍지는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이다.
<신당서>에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戶口)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서계(書契)를 제법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海: 황하) 북쪽에 있던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도 35도로 나뉘는 황하 이북의 땅인 산서성은 부여, 옥저, 변한, 조선,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필자의 여러 학술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따라서 대진이 고구려의 영토인 산서성을 모두 차지했다는 말이니 산서성에 위치한 대진의 도읍지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자.

1. 서경 압록부
압록(鴨綠)이라는 말은 산서성에 위치한 고구려의 압록수(鴨綠水)에서 비롯된 것으로 “물이 오리의 머리처럼 푸르러 압록수라 부른다”라고 북송의 구양수가 지은 <신당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압록수에서 압록강(鴨淥江)으로 이름이 바뀐 시기를 알아보자. 고구려의 핵심 강역인 산서성에 위치한 하천은 원래 압록수(鴨綠水)였으나 ‘푸를록(綠)’이 ‘맑을록(淥)’으로 글자가 바뀐 것은 당나라 시기에 편찬된 북사(北史)에서 부터이다.
<북사>는 당 태종 정관 원년(627)에서 고종 현경 4년(660) 사이에 이연수(李延壽) 개인이 지은 역사서이다. “오리 머리는 푸르다”라는 표현이 논리적이며 “오리 머리는 맑다”라는 표기는 옳지않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이연수는 이렇게 글자를 바꾼 것이다.
‘록(綠)’을 ‘록(淥)’으로 기술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북사>외에 <요사(遼史)>, <요사십유(遼史拾遺)>, <통지(通志)>,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섬서통지(陝西通志)>,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태평어람(太平御覽)>, <책부원구(冊府元龜)>, <격치경원(格致鏡原)>, <談苑(담원)> 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우선 압록수의 위치를 다음 <그림 23>에서 확인하면서 대진의 서경 압록부의 위치를 추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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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2부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으로 삼으니 압록부(鴨淥[綠]府)이며,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통치한다”고 하였다.
우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을 살펴보겠다. “[환주] 요나라가 환주(桓州)를 두었다. 고[구]려 환도땅(桓[丸]都地)이다. 즉 지금의 봉천 환인(桓仁)과 집안(輯眼) 등 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곳이다. 고구려 환도성의 환(丸)을 환(桓)으로 왜곡했고 산서성이 아닌 봉천성으로 조작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다음은 정주(正州)의 위치를 알아보자. “요나라가 두었다. 옛날 관할하던 곳은 지금의 조선 평양성 서북 380여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 평양성이나 고구려 평양성은 같은 곳으로 산서성 임분(臨汾)을 뜻한다.
“풍주는 요나라가 설치했으며 지금의 조선 평양성 서쪽에 있다”라고 하여 산서성 임분 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신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음은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의 기록을 순서대로 검토해 보겠다. “환주는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환도현(桓[丸]都縣)이다.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서쪽 통구(通泃)이다. 금나라가 폐지했다”라고 하여 환(丸)을 환(桓)으로 조작하고 산서성 화염산에 있는 환도성을 길림성 집안시로 왜곡하고 있다.
“정주는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즉 지금의 길림성 통화시 동북 노통화(老通化)이다. 금나라가 폐지했다”라고 하여 산서성에 있어야 할 정주를 길림성 통화시로 왜곡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풍주는 발해국이 설치했으며 치소는 안풍현(安豐縣)이다. (지금의 길림성 장백 조선족 자치현 남쪽 혜산진(惠山鎭) 부근이다). 요나라가 옮겨 관리하고 지금의 길림성 무송현(撫松縣) 경계이다. 금나라가 폐지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산서성 임분 평양을 길림성으로 조작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신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신주는 발해국이 두었으며 치소는 신록현(神鹿縣)이다. (지금의 길림 혼강시 임강구 서남 호노투(葫蘆套) 촌 건너 장성(長城) 사이다). 요나라가 개명하여 록주(淥州)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에 있어야 할 지명을 길림성 혼강시로 왜곡하였다.
이 두 지명대사전 모두 약간씩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나 특히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은 대진의 서경인 압록부의 지리지명들을 모두 길림성으로 옮겨놓아 이 대목에 관한한 심각한 역사왜곡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료비판을 통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대진의 서경 압록부가 관할한 신주, 환주, 풍주, 정주는 고구려의 환도성과 평양성이 있던 산서성에 위치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앞의 <그림 2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구려의 환도성은 안시성과 함께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환도산(환都山)에 있었는데,
이 환도산은 말처럼 생겨 말머리 부분을 마수산(馬首山)이라고 부르고, 말꼬리 부분은 마미산(馬尾山)이라 불렸으며 말머리 부분에는 안시성이 말꼬리 부분에는 환도성이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을 www.coreanhistory.com 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대진의 서경 압록부는 산서성 남서부 지금의 하진시(河津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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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63부
2. 중경 현덕부
중경 현덕부는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6주를 통치하였다. 철주부터 살펴보자.
<遼史拾遺(요사십유)>에
“한나라 안시현(安市縣)은 요동군에 속한다. 후한과 진(晉)은 그대로 따랐다. 고[구]려 역시 안시성(安市城)이라 했다. 당나라가 정관(貞觀) 19년(646)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함형(咸亨) 3년(673)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반항하자 장수 고간(高侃)을 보내 싸웠으나 패했다. 발해가 안시성을 개명하여 철주(鐵州)를 설치하고 4현을 통치했다. 요나라는 그대로 철주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안시성을 대진이 철주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요나라 역시 고구려의 안시성을 철주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안시성은 산서성 여량산맥의 일부인 화염산(火焰山)에 위치한다. 다음 <그림 24>에서 안시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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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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