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문헌사료를 함께 살펴보았으니 이제 동모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내용을 분석해 보자.
<구당서>에서는 “계루(桂婁)의 옛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웅거하여”라 했고 <신당서>에는 “고구려가 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와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동모산이 위치한 지역을 계루와 읍루로 적고 있으니 계루가 읍루임을 알 수 있다. 읍루는 단군조선인 숙신에서 예, 읍루, 물길 그리고 말갈로 시기에 따라 같은 부족을 달리 호칭했다는 사실을 본고 제2장 제5절에서 이미 검토한 바 있으며 읍루는 동북(東北)이라 하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곳 하내에는 반드시 동모산(東牟山)이 있어야 한다.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된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성의 위치 비정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송기호(宋基豪)로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득공이 기술한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祚榮卽並比羽之衆據挹婁之東牟山)”라는 대목에서 송기호가 임의대로 “동모산(東牟山)은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성산자산(城山子山)이다”라고 추정한 때문이다.
물론 유득공이 대진의 핵심 영토를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으로 비정하여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은 사실이나 동모산이 길림성 성산자산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쨌던 유득공과 송기호는 대진국의 지리지명 왜곡의 책임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만일 동모산이 학계의 주장대로 길림성 돈화라면 당나라 이해고가 섬서성 서안(西安)에서 긴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을 이끌로 직선거리 약 4,512리를 달려와서 대조영과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믿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4,512리라면 1,880km로 자동차가 시속 80km로 달렸을 때 약 23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이다. 동모산은 길림성 돈화시에 위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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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0부
“모산(牟山)은 하남성 탕음현 서쪽 40리에 있으며 탕하(湯河)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즉, 수경주소에서 말하는 석상산이다”라고 하며 “모산은 지금의 하남성 학벽시(鶴壁市) 북쪽에 있고 탕하가 이곳에서 발원한다”라고 적고 있어 같은 산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하는 하남성 탕음현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만금거의 옛 원하(洹河)와 합류하여 내황현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위하(衛河)로 진입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방여기요>에 이르길 동모산은 위현(衛縣) 서쪽 20리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발해 대씨가 무리와 함께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라고 하여 모산이 동모산이고 동모산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위현(衛縣)의 서쪽 20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동모산을 모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동모산은 위현의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이곳 동모산에서 탕하가 발원하는데 탕하는 위하(衛河)로 진입하는 하천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오늘날의 현대지도에는 동모산이 없고 대신 소태산(小泰山)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소태산은 ‘작은 태산’이란 뜻이니 우연 일치일까? 산동성에 위치한 태산(泰山)은 높이가 1,545m이다. 그런데 대진의 첫 도읍지였던 동모산인 소태산은 높이가 764m로 태산의 약 절반이다. 그래서 소태산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소태산이라 이름을 개명한 당사자 이외에는 알길이 없으니 접고 넘어가자.

아무튼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로 믿고있는 길림성 돈화시 서남쪽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동모산이라 주장해온 것은 허구임이 분명하게 고증(考證)되었다. 다음 <그림 16>에서 동모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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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1부
<구당서>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라고 적고 있는 한편 <신당서>에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라고 하여 두 기록이 서로 상충됨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이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영주로 옮겨 살았다는 <구당서>의 기록은 오류로 판단된다.
첫째, 거란족이 살았던 영주는 고구려의 도읍지가 있던 산서성에서 황하를 건너 섬서성 서안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며
둘째, 영주는 대조영의 입장에서 볼 때 적국인 당나라의 도읍지와 가까운 곳으로 가족을 이끌고 적국과 가까운 곳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고
셋째, 『신당서』에는 대조영이 가족을 데리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古今紀要(고금기요)>에는 “무후 시기에 [대]중상이 요수(압록수)를 건너 수비하였다”라고 하며,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에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중(大衆)을 인솔하여 읍루의 동모산에 의지했다”라 하고,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에는 “대씨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중을 인솔하여 읍루의 동모산 땅에 웅거하였다”란 기록이 보이며, <冊府元龜(책부원구)>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의 가속은 동쪽 계루의 옛 땅을 지키며 동모산에 의지했다”라 하고, <文獻通考(문헌통고)>에도 “대씨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중을 인솔하여 읍루의 동모산 땅에 웅거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당서>를 제외한 이들 문헌사료 어디에도 대중상이나 대조영이 가족을 이끌고 영주에 가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동모산은 영주(營州)에서 2천리 동쪽에 있다 하였음으로 영주에서 대진의 동모산까지 문헌사료가 기록하고 있는 거리 2천리와 일치하는지 비교해 보자.
본고 제4장 제1절에서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영주는 유주(幽州)와 겹치는 지역으로 요동(遼東) 인 산서성 남부와 섬서성 서안(西安) 동부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이곳은 선비족 탁발규가 설치한 영주이다. 영주인 섬서성 서안 동부 람전(藍田)에서부터 동모산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1,037리 정도이며 2천리라 한 것은 과장으로 필자의 견해로는 약 1,300리 정도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섬서성 서안에 도성을 둔 당나라의 이해고가 황하 북부 하남성 하내의 동모산에 위치한 대조영의 도성을 공격하려면 네 곳의 통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청나라 시기까지도 서안에서 황하를 건너 동북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모두 네 곳으로
첫째, 서안 → 조읍(朝邑) → 산서성 영제시(永濟市)로
둘째, 서안 → 하남성 고현(故縣) → 산서성 예성(芮城)으로
셋째, 서안 → 하남성 구맹진(舊孟津) → 황하 북부 하남성 하내의 온현(溫縣)으로
넷째, 서안 → 하남성 개봉(開封) → 황하 북부 하남성 하내의 봉구(封丘)로 가는 길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
세 번째가 대진의 도읍지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이다. 따라서 이해고는 세 번째 통로를 선택한 것으로 믿는다. 영주와 동모산의 위치를 비교하기 위해 다음 <그림 17>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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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2부
2. 천문령의 위치
“측천(則天)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쫒았다. 조영이 고[구]려·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해고에게 항거하자 군대는 크게 패하여 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라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 죽였다. 이때에 [대]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해고(楷固)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조영(祚榮)이 고[구]려 군사와 말갈군사를 거느리고 해고에게 저항하니 해고는 패전하고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두 사서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며 당나라 무측천이 보낸 이해고가 대조영에게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쫒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천문령은 당나라 시기 천문산(天門山)이라 부른 천문산의 ‘산봉우리 고개’를 뜻한 것이며 “천문산은 [황하 북부] 하남성 수무현(修武縣) 서북 40리에 위치한 산으로 우뚝 치솟은 양쪽 산봉우리가 서로 마주 대한 모양이 마치 문과 같아”서 천문산이라 일컫는 산이다.
천문산은 태행산과 연결된 산이며 휘현(輝縣) 서북 45리에 위치한 하남성과 산서성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은 운태산(雲台山)이라고 하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주유봉으로 해발 1,304m이고 폭포와 샘과 못이 절경(絶景)이며 산세가 험하고 지나(支那) 제일의 협곡인 청룡협곡(靑龍峽谷)이 있다.
주(周)나라 시기는 의무려(醫巫閭)라 부른 산이고 세칭 광녕산(廣寧山)이라고도 부른 산으로 의무려, 광녕산, 천문산, 천문령, 운태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산이다. 단군조선의 땅이었고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산서성 임분에 위치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에서 직선거리 약 442리이고 하남성 낙양(洛陽)에서는 약 326.4리로 동경 113.5도 위도 35.6도에 위치한다.
천문령은 대진의 도성인 동모산 서남쪽 약 190리에 위치한 산이다. 용병술이 뛰어난 대조영은 이해고를 천문령 협곡으로 유인하여 대파(大破)시킨 것으로 “이해고는 천문령 고개를 넘어 뒤쫒았다”는 기록은 왜곡이라 주장한다.
첫째, 잔당이란 주력군사는 이미 궤멸되어 오합지졸의 잔여 군사를 일컫는 말이며
둘째,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이해고가 ‘12만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셋째, 대진의 도성은 동모산으로 천문령을 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으며
넷째, 따라서 굳이 천문령을 넘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대조영이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이해고에게 패전의 치욕을 안겨준 천연요새 천문령과 도성이 있던 동모산의 위치를 <그림 18>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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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3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통설로 대변되는 천문령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천문령(天門嶺)의 현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천문령이 승덕현(承德縣) 서쪽 경계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한규철 경성대 사학과 교수는 1994년 11월 천문령으로 추측되는 지역을 직접 답사한 후, 천문령이 오늘날 중국 요하 동쪽의 훈허(渾河)와 휘파허(輝發河)의 분수령인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이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추정하고 있다”, “∼추측되는 지역을”, “∼보고 있다” 등은 개인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해 고증할 수 있는 전거(典據)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추정한 천문령의 위치는 허구의 소설임이 입증되었다. 송기호 역시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천문령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길림성 합달령(哈達嶺)에 해당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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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54부
3. 니하의 위치
대진의 남쪽과 신라의 북쪽 경계를 이루었다는 니하(泥河)의 위치를 밝히기에 앞서 대진과 신라 사이의 영토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당서>는 “그땅[백제땅]은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가져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겼다”라고 적고 있으며 <신당서>에서도 “땅[백제땅]은 조금 있다가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갖고 백제는 끝이났다”라고 말하고 있다.
<欽定續通志(흠정속통지)>는 “신라가 강성해져서 갑자기 고[구]려 땅을 다스렸다. 무후(武后: 624∼705)가 죽음으로써 그의 후손 경습왕(敬襲王: 신라 56대 경순왕, 929∼935)이 그 땅을 신라의 소유로 하고 발해 등이 나누어 갖자 백제는 끝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리하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한 후 백제의 땅을 신라와 대진이 나누어 가졌으며 당나라 측천무후가 죽은 후에는 신라가 고구려 땅도 소유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본래 산동성은 한(韓: 변한)의 땅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지역을 서로 나누어 경략했던 곳이다. 그런 까닭에 백제는 산동성 일부를 영토로 가지고 있던 나라로 대륙에서 패망한 사실을 필자의 학술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대진의 남쪽과 신라의 북쪽 경계는 산동성의 한 곳에서 찾아야 한다.
니하(泥河)의 위치에 대해 <구당서>에서는 “남쪽은 신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에서는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로 경계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은 패수를 대동강으로 니하를 용흥강(금야강)으로 추정하고 있다.
“니하는 직례 선화현(宣化縣) 동쪽 15리이다. 관자구(關子口)로부터 서남으로 흘러 양하(洋河)와 합류한다. 즉, 옛 흑성천수(黑城川水)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양하는 역시 동양하(東陽河)라고 하며 또 양하라고도 한다. 직례 무령현(撫寧縣) 서쪽에 있다. 원래는 장성 밖에서 출원하여 서양하(西陽河)·연하(燕河)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하구(洋河口)에서 해(海: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적고 있다.
연하(燕河)를 찾아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연하는 없고 대신 연현(燕縣)이란 지명이 보인다. “연현은 한(漢)나라가 남연현을 두었다. 삼국시 위(魏)나라가 개명하여 연현이라 했다. 진(晉)나라 초에는 생략했으며 고성(故城)은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동쪽 35리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진현이 현대 지도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다음 <그림 19>에서 연진현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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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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