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禹)가 7년 동안 치수를 한 행적으로 “장강(長江)의 물줄기를 따르고, 황하(黃河)를 거슬러 오르며, 제수(濟水)를 오르내리고, 회수(淮水)를 살피며 노신초사(勞身焦思)하며 치수에 힘썼다”라는 대목의 일부에 대해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장강의 물줄기를 따르고”의 장강은 일명 양자강이라 하며 6,300km의 대륙에서 가장 긴 하천이다.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사천성을 지나 중경시(重慶市), 호북성, 안휘성, 그리고 강소성을 경유하여 황해로 진입하는 강이다.
우가 장강을 치수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역사 왜곡이다. 호북성, 안휘성, 강소성은 단군조선인 변한의 강역으로 우가 치수할 필요가 없는 지역이다.
첫째, 우의 고향은 하남성 개봉(開封)이며
둘째, 구산(九山)은 절강성에 있는 회계산, 산동성에 있는 태산, 섬서성에 있는 태화(화산)와 기산 그리고 왕옥산, 수산, 태행산, 양장, 맹문산은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위치한 산들로 “구산 동남쪽에 천주가 있는데 완위산이라 한다”는 말은 논리성이 없다. 회계산은 절강성 화음현 남쪽에 있는 산으로 회계산의 동남은 황해바다 이거나 아니면 대만을 일컫는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왜곡을 하다보니 이같은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우공이 치수(治水)한 하천은 4곳으로 이천(伊川: 伊水), 낙수(洛水), 영(瀛: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동해이자 발해), 간수(澗水) 모두 하남성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에 있는 4곳의 짧은 하천의 범람에도 골몰한 사람이 어찌 단군조선의 영토안에 있는 장강의 큰 하천의 치수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가능성도 설득력도 그리고 합리성도 찾기 어렵다.
우의 고향인 하남성 개봉에서 황하(黃河)만 건너면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왕검단군의 태자 부루의 고향 단향(壇鄕)이 있고 부루산으로도 불린 왕옥산이 위치한다. 따라서 <오월춘추>가 기록한 ‘장강’, ‘황제중경’, ‘황제산’ 등은 역사 왜곡인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동북에 있는 불함산은 부우산, 부루산, 부부산, 부함산(불함산), 방산 등 여러 이름을 가진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오늘날의 왕옥산을 뜻한 것으로 요약된다.
아니불(不)이나 아닌가부(不) 즉, ‘不’자는 ‘불’이나 ‘부’로 발음하니 불함산이나 부함산은 같은 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사학계의 통설처럼 불함산(부함산)은 한반도에 위치한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라는 사실이 고증(考證)되었다. 따라서 함경도 백두산을 단군조선이나 숙신국으로 비정해온 것은 문헌사료에 근거없는 사실처럼 조작된 허구(虛構)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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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3부

III. 영주(營州)의 위치
영주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서 먼저 유주(幽州)의 위치 확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1. 동북이 유주
동북지역이 유주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書蔡氏傳旁通(서채씨전방통)>, <通典(통전)>, <五禮通考(오례통고)>, <禮書綱目(예서강목)>, <周官集注(주관집주)>, <周禮纂訓(주례찬훈)>, <周禮述註(주례술주)>,
<欽定周官義疏(흠정주관의소)>, <周禮註疏刪翼(주례주소산익)>, <周禮全經釋原(주례전경석원)>, <周禮傳(주례전)>, <周禮集說(주례집설)>, <周禮訂義(주례정의)>, <周官總義(주관총의)>, <周禮詳解(주례상해)>,
<周官新義(주관신의)>, <周禮註疏(주례주소)>, <禹貢錐指(우공추지)>, <禹貢長箋(우공장전)>, <陳氏尙書詳解(진씨상서상해)>, <尙史(상사)>, <逸周書(일주서)>, <遼史(요사)>, <晉書(진서)>, <前漢書(전한서)>,
<山東通志(산동통지)>, <畿輔通志(기보통지)>,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圖書編(도서편)>, <玉海(옥해)>, <群書考索(군서고색)>, <藝文類聚(예문유취)>, <玉芝堂談薈(옥지당담회)>,
<春明夢餘錄(춘명몽여록)>, <唐開元占經(당개원점경)>, <欽定授時通考(흠정수시통고)>, <讀書劄記(독서차기)>, <元朝典故編年考(원조전고편년고)>, <歷代帝王宅京記(역대제왕택경기)>, <春秋分記(춘추분기)>,
<皇王大紀(황왕대기)>, <經稗(경패)>,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十一經問對(십일경문대)>, <通典(통전)>, <書纂言(서찬언)> 등 모두 47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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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4부
요약 정리하면 동북(東北)이라 지칭한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 남부를 유주(幽州)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문헌사료에서 고증한 사실은 한국사학계의 통설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하북성을 동북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북은 황하변인 산서성 남부를 일컫는 말이다.
<여씨춘추>에서 “북방으로 유주이며 연(燕)국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례직방씨>에는 “동북이 유주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 영주는 3가지의 다른 영주가 있었다. 영주(靈州), 영주(瀛州), 영주(營州)가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대조영과 관련이 있는 영주(營州)에 한정하겠다.
영주(營州)에 관한 기록은 <태평환우기>, <흠정성경통지>, <명일통지>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영주를 “은(상)나라 시기 고죽국의 땅”이라 적고 있다.
<문헌통고>에는 영주를 “은시대에 고죽국의 땅이었고... 후위(後魏)가 영주를 설치하였으며 ...수양제 초기 주를 폐지하고 요서군을 설치했으나 당(唐)이 다시 영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AD386에서 534년 사이에 있었던 후위가 영주(營州)를 설치했으며 수(隋)와 당(唐)이 계속 영주라고 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약하면 같은 지역을 유주와 영주로 함께 불렀던 것으로 파악된다.
기존 통념상의 유주와 영주가 요녕성이나 하북성에 있다는 것과는 달리 필자는 두 곳의 영주(營州)와 한 곳의 유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섬서성 서안 동부를 영주(A)라 하였고 경도 110도로 나뉘는 황하 동쪽인 하동(河東)이자 하북(河北)이며 기주(冀州)이고 요서(遼西)인 산서성(山西省) 남서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즉, 하내(河內)를 유주와 영주로 함께 부르다가
후위, 수, 당 시기부터 동서로 구분하여 산서성 남서부를 유주로, 하내를 영주(B)로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그림 7>과 <그림 9>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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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5부
2. 유주와 겹치는 지역이 영주
문헌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는 3가지로 ‘바다영’의 영주(瀛州), ‘신령령’의 영주(靈州), 그리고 ‘경영할영’의 영주(營州)가 그것이다.
영주(瀛州)는 산서성 남부 지금의 원곡(垣曲)을 뜻하며 영주(靈州)는 감숙성 영하(寧夏) 영무현 서남을 일컫는 말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라며,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영주는 영주(營州)로 영주(營州)는 섬서성과 하남성의 하내 2곳에 있었다.
<文獻通考(문헌통고)>는 영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주(營州)]:은(殷) 시대에 고죽국의 땅이었고 춘추(春秋) 시대에는 땅이 산융(山戎)에 속하였으며 전국(戰國) 시대에는 연(燕)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요서군(遼西郡)에 속하도록 하고 전·후한 및 진(晉) 시대에는 모두 진(秦)에 따랐다.
모용황(慕容皝)이 유성(栁城)의 북쪽과 용산(龍山)의 남쪽을 이른바 복덕(福德)의 땅이라 하여 영제(營制)와 관묘(宫廟)를 고쳐 유성을 용성(龍城)이라 하고 마침내 용성으로 천도(遷都)하여 새로운 궁을 화룡궁(和龍宫)이라 하였다.
후연(後燕)의 모용보(慕容寳)와 북연(北燕)의 풍발(馮䟦)이 상계(相繼)하여 도읍으로 삼았다. 후위(後魏)는 영주를 설치하였으며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북제(北齊)를 평정하였으나 그 땅은 오히려 고보녕(髙寳寧)에게 점거되었다.
수(隋) 문제(文帝) 시기에 보녕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다시 그 땅을 영주로 삼았으며 양제(煬帝) 초기에 주(州)를 폐지하고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였으나 당(唐)이 다시 영주로 삼았다.
영주는 은나라(1600∼1046BC) 때 고죽국의 땅이며 춘추(春秋: 770∼403BC) 시대에는 땅이 산융(山戎)에 속하였으며 전국(戰國: 403∼221BC) 시대에는 연(燕)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요서군(遼西郡)에 속하도록 하고
전·후한 및 진(晉) 시대에는 모두 진(秦)에 따랐고 후위(386∼534)가 영주(營州)를 설치했으며 수(隋)와 당(唐)이 계속 영주라고 했다고 서술하고 있어 기주이며 유주이고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와 섬서성 람전 동남 유성현의 동부를 영주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주와 영주 지역이 서로 겹치면서 유주와 영주로 함께 불렀다는 것이다. <문헌통고>의 영주는 ‘영주A’이며 인용문에 나온 유성(柳城)은 <그림 8>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섬서성에 있는 람전(藍田) 동남쪽에 있다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이 밝히고 있다.
‘영주A’는 오호십육국 시기 북위(후위: 386-534)가 세운 곳으로 “태평진군 5년에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평진군은 북위의 연호로 440∼450년이고 태평진군 5년은 445년을 뜻한다.

<그림 8>에서 알 수 있듯이 유주의 일부가 영주가 되고 영주의 일부가 유주가 되어 지역이 서로 겹치고 있음을 여러 문헌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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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00
좁게는 福德之地 柳城 龍城 藍田이 榮州이고 크게는 幽州 遼西에 속하며 현재 지도로는 섬서성 동부 華山 東南이자 陝州의 西方이고 하남성 서북 지역이며 商 時期의 고죽국이고 춘추 시기의 산융비자국이라는 것이지만 전국시기의 燕나라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6부
3. 영주A 와 영주B
영주(營州)는 <문헌통고>에서 설명하듯이 후위(後魏)가 처음 설치한 것이며 그 후 수(隋)와 당(唐)이 계속 영주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후위가 설치한 영주는 <문헌통고>, <태평환우기>, <명일통지>, <흠정성경통지>에서 언급한 영주와 약간 차이가 있는 영주로 보인다.
아무튼 유주와 영주는 섬서성 동북부를 포함한 산서성 남부와 하내로 위도 35도에서 가로로 흐르는 황하변에 위치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후위가 영주를 설치하고 534년에 후위가 망한 후 서위(535∼556)와 북주(557∼581)를 거치면서 수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 섬서성 동부의 ‘영주A’지역 외에, 기주이자 유주지역이던 산서성 남서쪽을 유주라 하고 순이 설치했다는 광녕의 동쪽 즉 ‘영주B’를 영주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주B는 후대의 왜곡이라 주장하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尙書(상서)/舜典(순전)>에 “肇十有二州 封十有二山(조십유이주 봉십유이산: 새로12주를 마련하고 12산을 봉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우(禹)가 천하를 9주로 나눈 후에 순(舜)이 새로 12주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순은 대략 BC2300년 경의 인물이고 그의 후계자인 우임금은 BC2100년경 사람으로 두 사람 사이는 약 200년의 연대 차이가 난다. 200년 후의 우가 9주를 나눈 뒤에 2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순이 9주를 12주로 나누었다는 것은 왜곡이며
둘째, 한나라 시기 가장 훌륭한 학자인 마융(馬融: 79∼166)의 <馬季長集(마계장집)>에도 “9주로 나누어진 후에 12주가 나누어졌다. 공씨의 주와 부합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순이 12주를 마련했다”는 것은 후대의 가필로 의심되는 방증이다.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셋째, 영주A를 설치한 후위의 탁발규(386∼534)는 선비족(鮮卑族)이다. 선비족은 원래 산서성 서북쪽인 섬서성, 감숙성, 내몽고 일대에서 흉노와 함께 살다가 흉노 모돈에게 쫒겨 일부가 남하하여 섬서성 서안 동부에 모여 살게되자 같은 부족인 탁발규가 후위를 건국하고 난 후 이들 거주지를 영주A라 한 것이며
넷째. 순이 새로 봉했다는 지역이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상서/우공>, <여씨춘추/유시람>, <회남자/지형훈>에서 처럼 특정 지역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우가 치수를 한 후에 순이 기주를 나누어 유주와 병주로 하고 청주를 나누어 영주로 하여 12주가 시작되었다”라고 추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
다섯째, 수나라를 세운 양견(楊堅: 541∼604, 하남성 남양현 북쪽)이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 566∼635, 감숙성 롱서朧西 출신) 모두 선비족으로 영주A 지역인 섬서성 서안에 도읍을 정했다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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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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