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내면서∼1

지구 인류의 역사는 일정한 장소에서 생존경쟁을 위해 발생한 사회계급투쟁과 이해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악순환이다. 따라서 역사란 한마디로 전쟁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진의 역사 역시 당나라와의 전쟁 승리에서 건국되었고 거란족 야율아보기와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로 망했다. 개국에서 패망까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 흔적을 남긴 것이 대진의 5경, 15부, 62주이고 시공간 속의 흔적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바로 대진의 강역이다.
대진의 건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패망하자 “서압록을 지키던 고구려의 대장군 대중상이 요수를 건너 남은 군사 8,000을 거느리고 동쪽 태백[행]산을 넘어”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에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했다.
섬서성 서안에 있던 당나라가 장수 이해고를 보내 고구려 부흥군과 싸우게 하였으나 대중상 장군의 아들 대조영이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산)으로 유인하여 그의 군사를 괴멸시켰다. 병으로 사망한 아버지 대중상을 진국열황제라 시호를 올리고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진국(震國)으로 바꾸면서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여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독자적인 황제국으로 명실공히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한 대제국으로 지나인들은 대진국을 해동성국이라 칭했으며 6,000리에 달하는 대륙을 지배한 나라로 돌궐족과 선비족의 지족인 거란족에게 926년 패망하였다.
같은 지명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너무 많아 간결하고 군소리없는 논문을 작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간략하려면 복잡하게 되고 줄이려면 더욱 커져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문헌사료에 철저했다는데 긍지를 갖는다. 복잡한 곳은 간추려 이해하면 될 것이다. → 계속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2부
논문을 내면서∼2

본 논문을 작성하면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사료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훗날 두고 두고 한(恨)이 될까봐 노심초사 하다보니 그만 산만한 논문이 되고 말았다.
대진의 지리지명을 가장 왜곡시킨 사람은 중공의 사학가(史學家) 김육불(金毓黻)이다. 그는 1919년에 <발해국지장편>을 저술하여 동북이라 하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를 동북삼성 또는 동삼성이라 칭한 오늘날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옮겨 역사를 왜곡, 날조, 조작했다.
당나라의 재상을 지낸 가탐(賈耽))은 <도리기>를 지어 대진의 지리지명을 왜곡했으며 <신당서>도 <도리기>의 영향을 받아 지리지명이 잘못된 곳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씨조선 말기의 실학자라고 하는 노사신의 <동국여지승람>,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장지연의 <대한강역고> 등이 지리지명들을 크게 왜곡하였다.
고구려의 땅을 회복한 대진이 고구려의 역사를 남겨야 했고 대진의 땅을 차지한 고려가 대진의 역사서를 남겨야 했으나 고려는 대진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한 연고로 유득공의 <발해고>는 한국 사학계의 독보적인 저서라 아니할 수 없지만 유득공 역시 대진의 지리지명에 대해 많은 오류를 남겼다.
그는 대진의 동경을 함경북도 경성으로 남경을 함경남도 함흥으로 비정하여 대진의 강역을 한반도에 끌어들이는 큰 실수를 하였다. 유득공의 이 같은 잘못된 지리 추정은 다른 실학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믿어진다.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기존 선행연구자들의 성과를 확인해 본 바 동북삼성으로 알려진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한반도 이북을 대진의 중심 영토로 비정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선행연구자들의 이 같은 성과는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전혀 근거없는 허구의 잡설들이다.
기존 연구 업적과는 달리 필자는 오직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전거(典據)를 제시하면서 대진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考證)했다. 필자의 이 연구가 한국역사학계의 민족사 정립에 작은 횃불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바란다. 뉴욕 연구실에서 적는다.
2022년 6월 25일
역사학자 김 태 영
<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부
I. 머리말
문헌사료에 나타난 발해(渤海)란 명칭은 4가지로
첫째,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천연호수(天然湖水)를 발해 혹은 동해라 부르던 곳이고
둘째, 천연호수인 발해 인근의 [하남성] 지역을 발해군(渤海郡)이라고 부른 행정상의 지명이며
셋째, 당나라의 제6대 왕 현종 이융기(李隆基)가 713년에 대조영에게 “좌효위 대장군이자 발해군왕이며 홀한주 도독”에 책봉했다는 일방적인 기록에 의한 대조영의 나라 이름이고
넷째, 1926년 이후 손문의 중화민국에 의해 오늘날의 발해가 탄생된 황해의 일부로서의 바다인 발해이다.
따라서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의 이름을 발해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이므로 당연히 대진(大震) 또는 대진국(大震國)이라 불러야 하며 본고에서는 대진으로 기술하겠다.
대진은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과 함께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고 태행산을 넘어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위치한 위현(衛縣) 서쪽 20리에 있는 동모산(東牟山)에 의거하여 698년에 대진을 건국하고 칭제건원의 황제국으로 16세 259년간 존속했던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였다.
영토는 남북 6,000리에 달했으며 5경, 15부, 32주를 두어 통치하다가 거란족 야율아보기에게 패망한 나라였다.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은 우선 국호가 발해이며 초기 도읍지였던 동모산을 길림성 돈화시 서남쪽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발해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로부터 주로 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등으로 비정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우선 비정, 추정, 추측, “후보자로 떠오른다”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개인의 견해로 일고의 가치가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