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史(북사)>에 기록된 백제의 위치만 정확하게 이해했어도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백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진(晉). 제(齊), 송(宋), 양(梁)나라의 도읍지는 모두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이었으니 백제는 당연히 강소성 남경과 멀지 않은 양자강(揚子江) 주위에 위치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대륙 양자강을 들먹이면서 어떻게 백제가 한반도 한강유역에 위치했다는 망발을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인지능력과 논리성이 유치한 한국역사학계의 독특한 주장이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읽지 않고 오류투성이인 선행연구자들의 논문에 근거하여 학위논문이나 학술논문을 생산하기 때문에 이 같은 모순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제24세 동성왕(東城王) 10년(449)에 위(魏)나라가 백제를 침략한 기사에 대해 <삼국사기>는 “10년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입해 왔으나 우리 군사에게 패배당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남조량(南朝梁) 때 소자현(蕭子顯)이 쓴 25사의 하나인 <南齊書(남제서)>의 기록이다.
“이때 위나라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고 국경을 들어왔다.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위나라가 말을 탄 병사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군사로 백제를 침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또 우(又)자를 쓴 것으로 보아 위나라는 백제를 최소한 2번 이상 침략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남제서>에는 동성왕이 위나라를 참패시키고 제수한 태수(太守) 이름으로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대방태수,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7명을 임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 21년(460)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었고 도둑이 많이 일어났다. 신하들은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음으로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1천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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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8부
V.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제26대 성왕(聖王) 16년(510) 봄에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했다. 백제가 4번째 왕도를 옮기고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꾼 것이다. 사비는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마지막 도읍지로 보이는데 유감스럽게도 사비(성)란 지명이 현대 지도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단서가 보인다. 사(泗)는 사수(泗水)로 산동성에서 발원하여 강소성을 거쳐 회수(淮水)로 진입하는 하천이다. 회수는 하남성 동백산에서 발원하여 안휘성과 강소성을 경유하여 황하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비(沘)는 비수(沘水)를 일컫는 말이며 하남성을 흐르는 강이다.
백제가 호북성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했으니 사주(泗州)란 지명이 있는지 추적해보자. “사주는 북주가 설치했는데 수나라가 폐지했다. 당나라가 다시 두었다. 치소는 숙예이며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 동남이다. 즉시 옮겼으며 치소는 임회이다. 개명하여 임회군이라 했다. 후에 다시 사주라 했다. 송나라가 사주임회군이라 했다. 옮긴 치소는 간치[우이]이다. 지금의 안휘성 간치[우이]현 동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용문에 나온 지명인 사현(泗縣)과 간치(盰眙)[우이(盱眙)]는 안휘성 동북에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성은 안휘성 남쪽에 있어야 한다.
첫째, 진, 송, 제, 양 시기인 AD317에서 AD557년 사이인 240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는 양자강 좌측에 도읍해야 하고
둘째, 양자강은 안휘성 남부를 흐르는 강이며
셋째, 백제의 도읍지인 사비성은 양자강과 가까운 곳이어야 하며
넷째, 사비성은 계백장군이 신라군과 마지막 결전을 한 황산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하고
다섯째, 청양은 “삼국 시기 오나라가 나누어 임성현(臨城縣)을 두었으며 수나라가 폐지했다. 당나라가 청양현(靑陽縣)을 두었다. [청양]이 청산의 양지에 있어 청양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청(淸)나라 시기 안휘성 지주부(池州府)에 속했다. 지금은 안휘성 무호도에 속한다”는 것이며
여섯째, “청양성(靑陽城)은 즉 지금의 안휘성 남릉현이 관리한다. <구당서/지리지>에 의주 남릉이 옛 자기성(赭圻城)을 관리하였다. 장안 4년(701-704)에 옮겨 관리하는데 청양성이다”라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는 지역은 청양(靑陽)으로 이곳이 백제의 사비성이 위치했던 곳이라 주장한다. 흥미로운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기(圻)란 ‘경기기’자로 경기(京畿)란 “왕성을 중심으로 천리 사방의 땅”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지나의 왕조인 요, 순, 하, 은, 주, 노, 위(衛), 정, 진(秦), 조, 체, 연, 송, 제, 진(晉), 초, 진(陳), 위(魏), 한(漢), 수, 당, 송, 요, 금, 원, 명, 청 어느 나라의 도읍지도 청양이었다는 1차사료와 문헌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백제의 사비성이 있던 안휘성 청양이 바로 백제 의자왕의 도읍지가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글귀이다.
성왕 31년(525) 가을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 땅을 빼앗았다. 이때 빼앗긴 백제의 동북변 읍은 호북성 무한(武漢) 동북에 있는 지역으로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18년(557)에는 신주를 없애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가 29년(568) 겨울 10월에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성왕 36년(604) 가을 7월에는 남천주를 북한산주로 다시 했다. 신라가 백제의 영토를 빼앗아 여러 차례 지명을 바꾼 곳으로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인 것이다. 물론 고구려는 남평양을 백제에게 빼앗겨 백제의 영토가 된 곳이다. 현재의 지나 대륙지도에는 신주라는 지명이 호북성에 그대로 남아있다.
32년(526) 가을 7월에 성왕(聖王)은 신라를 치려고 친히 보병과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그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왕이 살해되었다.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 의해 살해되자 아버지 성왕의 죽음에 허무함을 느낀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林成太子)가 대만에 있던 왜(倭)를 데리고 일본열도에 들어가 지금의 나라현(奈良縣)에 나라(那良)라는 나라(國)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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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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