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도읍지인 산동성 제령(濟寧)에 세운 한성(漢城)이 또 고구려의 침략에 패하여 다시 남쪽으로 천도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제21대 개로왕의 국정운영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나라 사람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불에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를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지냈다. 하수(河水: 황하)를 따라 제방을 세워 사성(蛇城)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게 하니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져 나라의 위태함이 쌓아놓은 달걀보다도 심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욱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지고 와 곽(槨)을 만들어 아버지 해골을 장사지내고, 궁실, 누각, 정자를 지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이 없을 정도로 국고를 탕진한 상태에서 고구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욱리하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욱리하라는 지명은 없으나 욱리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욱이현(郁夷縣)이 보인다.
“욱이현은 한(漢)나라가 두었으며 후한이 생략했는데 옛 성은 지금의 섬서성 롱현(隴縣) 서쪽이다. <한서지리지>에 ‘우부풍(右扶風) 욱이현’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논자는 이 욱이현이 백제 개로왕 당시의 욱리하라고 주장한다.
첫째,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로 산서성 남부로부터 섬서성과 감숙성 일대란 사실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고
둘째, 백제의 1차 도읍지는 위례성으로 진평이군인 섬서성 동부임을 밝힌 바 있으며
셋째, 섬서성에 위치한 욱이현(郁夷縣)은 오늘날의 간하(干河) 바로 옆에 위치한 지역으로 당시의 욱리하(郁里河)의 다른 이름으로 의심되며
넷째, 욱리하의 리(里)를 이(夷)로 글자를 바꾸어 각색한 점을 들 수 있다. 욱리하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1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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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4부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道林)의 꾀에 속아 나라를 들어먹는 대규모 토목공사(土木工事)를 한 것이다.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의 일로 고구려왕 거련이 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자 태자인 문주가 남쪽으로 내려가 강소성(江蘇省)에 있던 신라의 원군 1만 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한성(漢城)은 이미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후였다.
백제의 한성이 산동성 황하 남쪽인 제령(濟寧)에 도읍지가 위치했기 때문에 개로왕은 황하의 범람을 막기 위해 황하를 따라 제방을 쌓아야만 했다. 하남성 숭산으로부터 산동성 비성(사성)까지 긴 제방을 쌓은 것이다.
황하의 물이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평야지대인 이유로 개로왕은 돌을 구할 수 없어 흙을 쪄서 벽돌을 만들어 제방을 만든 것이다.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처럼 한반도 한강 유역에 백제의 한성(漢城)이 있었다면 돌을 쪄서 벽돌을 만들 필요도 없이 얼마든지 돌을 구할 수 있는 지역이며 서울의 한강(漢江)을 하(河: 황하)나 하수(河水: 황하)나 해(海: 황하)라고 부른 적도 없다.
또한 한강이 범람하여 한강을 따라 백제 개로왕이 흙을 구워 성(城)을 쌓고 제방(堤防)을 만들었다는 1차사료나 문헌자료도 없다.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한낱 허구의 소설로 판명되었다는 고증이다. 개로왕이 황하를 따라 쌓은 제방은 다음 <그림 1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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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5부
3. 한성의 함락과 웅진으로 천도
고구려에 한성을 빼앗긴 백제 개로왕의 태자 문주는 왕위를 계승하여 제22대 왕이 되었다. 문주왕 원년(426) 겨울 10월에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백제는 3번째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된다.
동이배달한민족의 역사를 없애기 위해 지나인(支那人)들이 옛 지명들을 많이 지워버려 정확한 당시의 강역(疆域)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웅진강(熊津江)이 조선 남부 금강(錦江)이다. 웅진성(熊津城)이 조선 충남 공주다”라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 p.1238에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은 웅진이란 지명을 왜곡한 것으로 가치가 없다.
첫째, 요동(遼東)인 산서성에 고구려와 함께 있던 백제가 고구려의 팽창에 밀려 황하를 건너 요서(遼西)인 섬서성 동부를 가리키는 진평이군인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고구려에 관미성이 함락된 후 다시 산동성 한성인 제령으로 옮겼으나 또다시 고구려에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수년간 쇠약해져 남쪽의 한(韓)의 땅으로 내려갔다”고 하였는데 황해(黃海)를 건너 수 천리 먼 곳인 한반도 금강이나 충청도 공주로 천도했다는 것은 날조이자 조작이다. 산동성의 한성에서 볼 때 한반도 충청도는 남쪽이 아닌 동쪽일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주장은 논리성도 설득력도 찾아보기 어렵고
둘째, 한반도는 지나의 왕조인 한, 수, 당, 송, 요, 금, 원, 명, 청 등 어떤 나라의 영토가 된적도, 되었었다고 기록된 1차사료와 문헌자료도 없기 때문에 지나(支那)의 영토를 기록한 지명사전에 한반도의 지명이 나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웅(熊)자가 들어간 지명들을 모두 살펴보았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모두 19곳이 나오는 데 많은 순서로 호남성에 6곳, 하남성에 4곳, 요녕성에 3곳이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15곳으로 호남성에 3곳, 호북성에 2곳, 하남성에 2곳으로 나온다. 확인한 바와 같이 웅(熊)자가 들어간 지명은 주로 호북성과 호남성에 분포되어 있다.
“웅구진(熊口鎭)은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동쪽에 있으며 반만호와 서쪽에서 만난다. 북쪽은 잠강현(潛江縣)과 서로 경계이다”라고 하여 무한(武漢)과 가까운 곳으로 보이고,
“웅가암진(熊家巖鎭)은 호북성 은시현(恩施縣) 동북 60리이다. 의창현과 길이 통한다”고 하여 역시 무한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해된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도읍지 웅진을 정확하게 기록한 곳이 없어 꼭집어 말할 수는 없으며 다만 당시의 상황과 사서들의 기록을 분석하고 교차확인 하여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호북성에 있는 웅가, 웅구, 잠강, 잠수, 웅진(무한), 신주(고구려의 남평양, 북한산주, 남천주) 등을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4>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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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46부
당나라 때 이연수가 지은 <北使(북사)>의 기록에, "진(晉)나라 때부터 송, 제, 양나라 시기에 양자강(揚子江) 좌측에 자립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은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에도 자세히 적고 있다.
정리하면 백제가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시기인 AD317에서 AD557년 사이 240년 동안 양자강 좌측에 도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웅진(熊津)의 진(津)자는 ‘배가 발착하는 항구나 포구’의 뜻으로 항구를 가지고 있는 도성이여야 한다. 강소성 남경(南京)에 도읍한 진, 송, 제, 양나라의 좌측으로, 양자강에 있으며 지나 대륙을 주름잡고 해상을 제패(制覇)한 백제의 도읍지는 호북성 무한(武漢)밖에 없다.
백제가 바다를 제패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기/오제본기> ‘제왕편’에 의하면, “괄지지에 이르기를 백제국 서남 바다 가운데 큰 섬등 15개에 읍을 설치하고 사람이 살았으며 모두 백제에 속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두우의 <通典(통전)> 권 185, 百濟(백제)에도 보인다. “...[百濟]國西南海中有三島, 出黃漆樹, 似小而大. 六月取汁, 漆器物若黃金, 其光奪目([백제]국서남해중유삼도, 출황칠수, 사소이대. 유월취즙, 칠기물약황금, 기광탈목) 백제국 서남해의 세 군데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수액을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면 황금처럼 빛이나서 눈에 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칠은 해변과 섬의 산록수림 속에서 잘 자라며 키는 약 15m에 달한 식물로 나무껍질에 상처가 나면 황색의 액이 나오는데 황금색을 내는 도료로도 사용된다. 주로 절강성과 서남해의 세 섬, 즉 대만, 해남, 필리핀을 비롯하여 말레이반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대지명대사전> 어디에도 무한(武漢)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무한에 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은 백제가 망할 당시인 660년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 지명대사전이 출간된 1930년대까지도 무한이란 지명이 있지 않았다는 증거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근거로 호북성 무한이 백제의 도읍지 웅진이였다고 확신한다. 종합하여 정리하면 요서(遼西) 진평이군에 있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산동성 제령인 한성(漢城)으로,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되자 호북성 무한인 웅진(熊津)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이다. 백제의 도읍지들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다음 <그림 1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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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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