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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영토연구 제31부>
백제의 강역을 밝히기 위해서는 도읍지 추적이 필수적이므로 먼저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의 관계를 다음 인용문을 통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단군조선 제47대 고열가 단군이 계해 58년(BC238)에 승하하기 전 임술 57년(BC239)에 해모수가 북부여란 나라를 세웠다. 이때부터 북부여, 동부여, 북동부여, 남동부여, 졸본부여, 연나, 환나, 계루, 비류 등 여러 나라로 난립되는 단군조선 분열기를 맞게 된다.
졸본부여국은 유구태(有仇台) 혹은 위구태(尉仇台)가 세워 약 10여대로 내려오다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씨(優台氏)가 졸본부여에 와서 왕이 되면서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죽었다.
이 무렵 북부여에서 쫓기던 추모(鄒牟)가 졸본부여에 와서 소서노와 재혼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며 고구려를 세우고 몇 년이 지나 추모가 부여에서 결혼한 본부인 예씨(禮氏)와 그의 아들 유리(類利)가 동부여로부터 찾아왔다.
황후의 자리를 빼앗긴 소서노는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 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리의 땅 미추홀(彌鄒忽)을 얻어 소서노는 48세로 왕이 되었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비류와 온조 두 형제가 의논하기를, “낙랑과 예(濊)가 날로 침략해오니 차라리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두 형제와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명의 신하들과 함께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는 것으로 정리된다. 각주 제90항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건국은 BC232년이며 백제의 건국은 BC213년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고구려 건국해와 19년의 연대 차이는 “백제가 BC18년에 건국되었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백제본기>로부터 추산한 숫자이다.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 이야기는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시점에서부터 계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유(위)구태와 우태씨 기사는 고구려 건국 이전의 일로 백제를 건국하기 이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함께 검토해 본 바와 같이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이며 마한은 산서성 남서부로부터 황하를 건너 섬서성 감숙성에 걸친 지역임을 확인하였으므로 백제의 초기 도읍지는 산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최초의 도읍지가 산서성 남부에 있었는지부터 추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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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32부
IV. 백제의 도읍지 위치
백제의 도읍지를 추적하기에 앞서 백제에 대한 기록이 언제부터 구체화 되었는지를 짚어보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선열전이 보이고, 반고의 <한서>에는 조선전이 기록되어 있으며, 범엽의 <후한서>에는 부여국(夫餘國),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麗), 구려(句驪: 貊), 동옥저(東沃沮), 예(濊), 한(韓: 진한, 마한, 변한)이 기술되어 있고,
위수[진수]의 <삼국지>에는 동이전, 부여전, 고구려전, 동옥저전, 읍루전, 예전(濊傳), 한전(韓傳), 진한전, 변한전의 기록이 보이며,
방현령과 이연수 등이 지은 <晉書(진서)>에 부여국, 마한, 진한, 숙신씨를 언급하고 있고, 심약(沈約)이 487∼488년 사이에 편찬한 <송서>에서 고구려국과 백제국이 기술되어 있어 마침내 백제국(百濟國)에 대한 1차 사료는 <송서>임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로 고구려의 건국과 거의 같은 시기인 BC213년에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支那)의 사서에서 독자적인 백제국으로 언급된 것은 약 700년이 지난 487년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당시도 백제는 실존하였으나 사마천을 비롯 반고, 범엽, 위수, 방현령, 이연수 등은 백제를 개별국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700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된 백제는 사실성(事實性)이 많이 소실되었다는 방증(傍證)이 되겠다. 다시 말하면 백제사는 왜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도 <구당서>와 <신당서> 등을 저본으로 하여 찬(撰)한 것으로 먼 후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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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33부
IV. 백제의 도읍지 위치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열명의 신하가 간해서 말했다. ‘오직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었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했으며, 남쪽은 비옥한 소택(沼澤)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가로막혔으니,
그런 자연적인 요해와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도읍을 여기에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趨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를 십제(十濟)라 했다. 이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20-17BC) 3년(기원전 18)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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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 제34부
IV. 백제의 도읍지 위치
온조가 최초로 세운 도읍지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지금의 직왕산(稷王山) 남서부에 위치한 한사((漢師)[한설라 주장하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래 하남(河南)이란 황하의 남쪽이란 뜻인데 여기서의 하남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압록수와 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동쪽의 높은 산이란 중조산(中條山)과 역산(歷山)을 가리키고, 서쪽의 큰 바다란 황하를 일컫는 것이며 남쪽의 비옥한 옥토란 운성분지(運城盆地)를 가리켜 천연지형물의 관점에서 볼 때 지역 설명이 정확하고
둘째, 온조의 첫 도읍지이지만 국호가 십제(十濟)로 백제와는 다른 도읍지이고
셋째,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갔다고 한 미추홀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운성염지(運城鹽池) 부근으로 소서노가 13년 동안 도읍한 곳이며, 소금을 생산하는 천연염지이기 때문에 땅이 습하고 소금기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나중에 비류가 온조의 한사 도읍지를 돌아보고 부끄러워 화병을 얻어 죽은 후에
넷째, 온조가 형 비류의 땅까지 차지하고 백가(百家)가 황하를 건넜다는 의미의 백제(百濟)를 세웠으며
다섯째, <그림 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비류수(沸流水)는 환도성과 압록수 서쪽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진입하는 하천으로 산서성에 위치한 하천이라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정리하면 온조가 최초로 도읍한 곳은 한사(한설)로 산서성 남부이며 당시의 국호는 십제(十濟)임을 알 수 있다.

온조가 세운 최초의 도읍지가 산서성 남부였다는 사실을 지리적(地理的)으로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을 <周書(주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황하)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이다”라고 하였다.
산서성 남부에 세운 백제이기 때문에 서쪽과 남쪽은 황하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방(帶方)이 황하북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하였음은 <그림 5>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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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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