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논평
댓글: 대부여는 단군조선이 개명을 한 것이고 북부여는 대부여가 모돈에게 망하자 해모수가 세운 나라이고 동부여는 북부여가 고주몽에게 망하자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논평: 그렇지 않다. BC425년에 단군조선의 국호가 대부여(大扶餘)로 바뀐 것이고 앞에 대(大)자를 붙인 것은 크다는 형용사이다. 고로 대부여나 부여는 같다. 그러므로 북부여가 즉, 단군조선이고 북부여가 모돈에게 망한 것 역시 단군조선의 일부가 망한 것과 같다.
단군조선은 동이(東夷)인 구이(九夷)를 결집한 왕조로 강역은 크다. 그러므로 북쪽에 있으면 북부여, 동쪽에 있으면 동부여, 남쪽에 위치하면 남부여 중부에 있으면 중부여 그리고 졸본부여(산서성 태원) 등으로 이름된 것이다.
위도 35도 황하북쪽에 살던 부족(部族)을 동호(東胡)라고도 했으므로 단군조선의 후신인 부여부족은 모두 동호이며 산서성 북부 즉, 지금의 내몽고와 하북성에 살던 동호 즉, 부여(북부여)가 흉노 모돈에게 망하고 고주몽은 지금의 하북성 장북(부여성)에서 마리, 협보, 오이를 데리고 남하하여 산서성 태원에 있던 졸본부여(흘승골성)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졸본부여는 본래 위구태가 왕을 하다가 죽고난 후 과부가 된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살던 시기이다.
주몽이 남하하던 시기 북쪽에서 일부 부족들이 하남성 하내와 산동성 서북부 그리고 하북성 남부에 살던 부여족들과 함께 동부여(갈사국)란 이름으로 잠시 지탱했고 산서성 남부 대방군(帶方郡)으로 알려진 곳에 잔류한 비류계(沸流係)의 백성들이 부여란 이름으로 4대에 걸쳐 명맥을 유지했다. 이보다 앞서 온조는 황하 이남으로 내려와 진평이군으로 알려진 섬서성 동부와 하남성 서북부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고마성, 거발성)으로 명실공히 백제(百濟)란 나라를 세운 후 제2차 도읍지인 산동성 한성(漢城: 제령)으로 옮긴 시기이다.
해모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이규보(李奎報: 1169∼1241))가 지은 시집 <동국이상국집>에서 비롯된다. 서정시는 마음의 감정을 읊은 글이고 비록 서사시라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이 왜곡된 경우는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규보가 창조한 해모수가 <삼국유사>를 지은 승(僧) 김견명, <북부여기>를 찬한 범장, <조선상고사>를 지은 신채호 등에 의해 각색(脚色)된 꾸며낸 이야기로 발전되었다.
<사고전서> 79,337권과 <25사> 4,022권 어디에도 해모수는 없다. 해모수 좋아하지 말라. 해모수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고 주몽의 아버지라면 어찌하여 주몽은 해주몽이나 해추모가 아닌 고주몽과 고추모로 고(高)씨가 되었는가 묻는다. 애비의 피(血)를 마다하고 뚜렷한 이유없이 다른 성씨를 취한 자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륜을 저버린 패륜(悖倫)임을 알라.
제곡고신(帝嚳高辛)의 후예(後裔)라 하여 주몽이 스스로 고씨성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주몽은 고씨가 분명하고 제곡고신은 전욱고양(顓頊高陽)의 아들이고 전욱고양은 소호금천씨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고주몽은 본래 김씨이다. 즉, 고씨는 모두 김씨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역사학자와 사이비(似而非) 사학자, 그리고 창작 소설가의 역할은 각각 다르다. 김부식은 역사학자이지만 ‘동명왕, 동명왕이 부여를 건국, 해모수, 700년의 부여, 흑룡강성과 길림성이 부여국의 중심지’ 등을 주장한 사람들은 사이비(似而非) 사학도이거나 아니면 창작 소설가(小說家)들임을 알라.
금년에 출간될 논문 <700년 부여국의 허구와 동명왕과 고주몽 관계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집필 중에 있다.
-김태영학파(T.K.School)-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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