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을 정리하면 당나라 정관(627-649)초에 하동도를 설치하였으며 황하 동쪽의 옛 지명으로 산서성(山西省)을 하동(河東)이라 했으며 동시에 하북(河北)이라 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도 앞에서 확인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과 같이 황하 동쪽을 하동 그리고 산서성 남부를 하북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기부터 진나라 한나라 때까지 산서성 남부를 하동이라 했고 당나라 이후에는 산서성 전역을 하동이라 했다”라고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도 기록해 주고 있으며 역시 “황하의 북부지역을 하북”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강과 산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리지명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그리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 모두 산서성이 하동이고 산서성 남부와 하내가 하북이라고 일관되게 기술해주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나 요녕성이나 현재의 하북성은 하동(河東)도 하북(河北)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황하와 인접해 있지 않을뿐더러 황하의 동쪽이 아닌 북동쪽으로 산서성 남부 황하로부터 하북성 북경은 직선거리로 약 1,536리나 먼 곳에 위치하며, 한반도, 하북성, 요녕성을 하동이라 했었다는 사서(史書)나 문헌(文獻)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문헌사료에서 기술한 산서성의 하동과 하북을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1>과 <그림 2>와 같다. <그림 1>에서는 경도 110도로 나누어지는 황하의 서쪽을 섬서성이라 하고 황하의 동쪽을 산서성이라 하였으며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하북이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는 위도 35도에서 하남성과 산서성을 가로로 나누는 황하 북부인 산서성 남부지역과 황하북부 하남성 일명 하내를 하북지역(河北地域)으로 표시한 지도이다. 당시의 하북지역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0부
산서성 남부에 있던 하북이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지명 이동이 된 내역을 알아보자.
하북성(河北省)이란 이름 이전에는 직이성(直隶省)이였는데 하북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손문의 중화민국 때인 1938년 무렵이다.
하북(河北)의 하(河)는 황하(黃河)를 뜻한다고 했으며 원래의 하북은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명 하내(河內)를 지칭하였다. 이곳 산서성 남서부에 노룡, 수양산, 유수, 영지(영제), 고죽성, 고죽국, 포판, 갈석산, 창려가 그리고 하내에 해양, 광녕 등이 있었다.
이들 지명들은 명나라 주체(朱棣) 때에 지금의 하북성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고, 손문정부 때에 직이성이던 것을 1928년에 아예 하북성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철저한 역사 왜곡의 산물이라 하겠다.
하북이라고 부르던 산서성 남서부에 있던 옛 지명들을 모두 직선거리로 약 1,843리 먼 곳으로 옮겨놓고 그곳을 하북성이라 이름하였으니 철두철미한 역사 사실의 왜곡이자 날조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능한 한 주제와 관련된 이용 가능한 모든 문헌사료 특히 1차사료를 주의깊게 읽고, 조사, 비교, 분석하여 역사적 사실의 왜곡 여부와 그 진위를 판단하는 사료 문헌 비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이00
直이성은 왕 또는 帝가 직접 다스리던 方 千里의 땅을 뜻하고 원래는 산서성 남부였으나 明 주체 때 北직이와 南직이로 구분하여 북직례는 현 北京이고 남직례는 현 南京인가요?
김태영
직이성(直隶省)은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청나라시기 만든 행정구역 관할을 뜻한 것이며 산서성 남부를 직이(直隶)라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의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내를 하북성이라 했다. 명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김태영, <浿水의 位置 硏究)(제4집) 서울: 세계출판사, 2019.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00 아하 청나라군요.
천진 앞바다를 북직례만 직례만으로 부르다가 민국 때 발해만으로 했겠지요?
김태영
문헌상으로는 淸이라 되어있으나 明의 소행입니다. 명나라가 왜곡한 지명들을 청은 그대로 따랐으며 한술 더 뜬 곳도 많아요.
<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1부
2. 유주, 요서, 고죽국
주(周) 무왕이 책사 강태공과 함께 은(殷)나라를 정벌하러 갈 때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하극상의 부당함을 항의하던 의인 백이(伯夷)와 숙제(叔弟) 두 형제의 나라 고죽국이 산서성 남서부에 있었음을 여러 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다.
<漢書(한서)/地理志(지리지)>, <後漢書(후한서)>, <說文解字(설문해자)>, <史記集解(사기집해)>, <中國古今地名大辭典(중국고금지명대사전)>, <括地志(괄지지)>의 기록을 요약 정리하면 지금의 산서성 서남부가 유주(幽州)라는 것이며, 요서군(遼西郡), 유주, 영지, 고죽성, 노룡, 유수, 영평, 평주, 고죽국(백이숙제의 나라), 수양산, 포판, 하동지방 모두는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고 백이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 연(燕)에 속했다. 진(秦)나라의 우북평과 요서 두 개의 군이다. 진(晉)나라 때는 요서군이다. 후위(後魏) 역시 요서군이라 했다. 수(隋)나라 초에 평주라 했다. 수양제가 주를 폐지하고 다시 평주라 하였다”고 <通典(통전)>이 말해주고 있다.
이들 지명들은 모두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한 개의 지명이라도 누락이 될 경우 ‘수양산이 있는 고죽국’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산서성’밖에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산서성이 유주이며 요서이고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수양산인 오늘날의 ‘중조산(中條山)’과 유수(濡水)라는 지금의 속수이다. 지금의 하북성에는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인 현재의 중조산과 유수가 없다.
요약정리하면 유주에 속하는 영지(令支)에 있는 고죽성(孤竹城)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고죽국으로 산서성 남서부 황하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영제시(永濟市)이며, 영평, 평주, 노룡, 우북평, 요서, 유주, 갈석 모두 산서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이들 지명들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3>, <그림 4>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