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부~28부
요약하면 지금의 봉천성(요녕성)이 기주이고 유주이며 영주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인용문의 기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으로 <봉천통지>가 주장하는 내용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유주와 영주 두 지역을 다스렸다. 유주[일부는 하북성에 들어갔다], 영주[일부는 산동성에 들어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유주와 영주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유주[일부는 하북성에 들어갔다] 영주[일부는 산동성에 들어갔다]”라고 근거없는 억단을 하고 있다. 주장을 할 때는 반드시 논거를 제시하여 고증해야 함은 동서양 역사학계의 불문율이다.
김육불은 <서경/우서>의 ‘순전’과 ‘마융’, 그리고 <상서금고문주소> 등을 인용하고 있으나 유주와 영주의 위치를 밝히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내용들이다.
지리지명을 밝힐 때는 반드시 강, 하천, 산, 산맥 등을 언급하면서 위치의 타당성을 고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터무니없는 허구의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유주와 영주는 2곳의 영주와 한 곳의 유주가 있었다. “섬서성 서안 동부를 영주(A)라 하였고 경도 110도로 나뉘는 황하 동쪽인 하동(河東)이자 하북(河北)이며 기주(冀州)이고 요서(遼西)인 산서성(山西省) 남서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즉 하내(河內)를 유주와 영주로 함께 부르다가 후위, 수, 당 시기부터 동서로 구분하여 산서성 남서부를 유주로 하내를 영주(B)로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림 8>을 제시한다.

유주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약 820종으로 5,000권이 넘고, 영주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약 320종으로 1,082권이 넘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들 문헌사료들을 논리적인 증거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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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3부
둘째, 김육불은 <사기/하본기>, <사기정의>, <통전/주군현> 등을 인용하면서 “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 요서와 요동으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청주(靑州)에 관한 기록을 보면 <주례직방씨>는 “청주는 동쪽이다”라 했고, <회남자/지형훈>에는 청주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여씨춘추/유시람>에는 “청주는 동쪽으로 청주이며 제(齊)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종합하면 청주는 동쪽방향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상서/우공>에 “海垈惟靑州(해대유청주) 바다(황하)와 태산 사이가 청주”라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그림 8>의 ‘영주 B’ 지역이다. 동쪽인 청주를 나누어 영주(영주B)라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요서와 요동은 아니다. 요서는 황하를 경계로한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지역이고 요동은 산서성을 뜻한다.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 <그림 9>와 같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고구려의 요동 요서 위치에 대한 소고』를 참고하기 바라며 www.coreanhistory.com 에 게제되어 있으니 쉽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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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4부
셋째, “순이 기주 동북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는데, 즉 지금의 광녕(廣寧) 서쪽 지역이다. 청주 동북은 영주로 삼았는데, 즉 지금의 광녕 동쪽 지역이다 라고 하였다”라고 하면서 김육불은 <대명일통지>, <요동지>, <독사방여기요>, 그리고 <성경강역고> 등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역시 기주, 동북, 유주, 광녕, 청주 등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리지명의 위치를 고증하려면 반드시 1차사료인 <상서/우공>, <여씨춘추/유시람>, <회남자/지형훈>, <주례직방씨> 등를 비롯하여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그리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 등이 기록하고 있는 9주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면서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봉천통지>는 이런 귀중한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에 대해 시종일관 함구하였다.
실수일까 아니면 고의일까? 필자는 고의라고 주장한다. “광녕(廣寧)은 수무현(修武縣) 동남”으로 황하북부 하남성 즉 하내(河內)에 위치한 지명이며 광녕의 동쪽을 영주라 하고 광녕의 서쪽을 유주라 하였다.
이 광녕은 하북성이나 요녕성(봉천성)과 무관한 지리지명이다. 수무현이 하북성이나 봉천성(요녕성)에 위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광녕을 기준으로 한 동서의 유주와 영주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0>, <그림 11>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유주와 영주의 위치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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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5부
넷째, “살펴보면 지금의 봉천성(奉天省)은 순(舜)시기 유주, 영주, 두 주 지역이고, 앞의 책에서 이미 뚜렷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명일통지의 해석을 가장 분명한 것으로 여겨 정론으로 삼을 수 있다.”
동북삼성의 하나인 봉천성(요녕성)에 유주와 영주가 위치했다고 날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순(舜)시기의 기주, 유주, 영주 지역은 지금의 동북삼성과 아무련 관련이 없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대로 기주지역은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일컫는 곳이고 유주는 하내에 위치한 광녕의 서쪽으로 산서성 남부이고 영주는 광녕의 동쪽으로 ‘영주B’에 해당한 곳이다.
<봉천통지>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와 완전히 다른 견해로 고의적인 역사 왜곡, 조작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의 주장은 억설(臆說)이며 억측(臆測)이고 억단(臆斷)이다. 이들은 허구의 소설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황하,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영주A, 영주B,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 수무, 광녕, 광녕 서쪽 유주, 광녕 동쪽 영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에 나타내면 대략 다음 <그림 1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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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6부
<동북통사>의 저자이자 <봉천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김육불(金毓黻:1887-1962)에 대해서 알아보자.
김육불은 만주 요동사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자이며 1916년 북경대학 문과를 졸업했고, 여러 가지 저술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처음으로 중국역사상 ‘고구려는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의견을 도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육불의 글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書經(서경)>에는 “조십유이주 봉십유이산(肇十有二州 封十有二山) 새로 12주를 마련하고 12산을 봉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본문에서 처럼 “연혁1, 통부1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연(燕), 진(秦), 한(漢), 후한(後漢)] 우, 하, 상 모두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지역을 다스렸다. 유주[일부는 하북성에 들어갔다], 영주[일부는 산동성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물론 김육불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손성연(孫星衍)의 <尙書今古文注疏(상서금고문주소)>에도 “일부는 하북성에, 일부는 산동성에”란 내용도 없다.
산서성과 산서성 남서부에 있었던 기주(冀州), 유주(幽州)가 마치 하북성에 있었던 것처럼 왜곡(歪曲)하고 날조(捏造)한 것으로, 이 내용은 김육불의 개인 의견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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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7부
둘째, 순(舜)에 의해 12주가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지역들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하였고 우(禹)에 이르러 12주가 아닌 9주를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융(馬融)의 <馬季長集(마계장집)>에도 “9주로 나누어진 후에 12주가 나누어졌다. 공씨의 주와 부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이 12주를 마련했다”는 것은 후대의 가필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순이 먼저 12주로 나눈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가 9주를 나누는 과정에서 선임자가 만들어준 12주 중에서 누락된 3주의 행방과, 그에 따른 정당한 이유를 밝히지 못한 점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기사이다.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다.
셋째, 본문에서 “살펴보면 지금의 봉천성(奉天省)은 순(舜) 시기 유주, 영주, 두 주 지역이고, 앞의 책에서 이미 뚜렷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명일통지의 해석을 가장 분명한 것으로 여겨 정론으로 삼을 수 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본문에서 “유주의 일부는 하북성에 들어가고 영주의 일부는 산동성에 들어갔다”고 해놓고 갑자기 봉천성이 유주이고 영주라 말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를 펴고 있다.
이것은 객관성과 논리성이 없는 김육불 개인의 견해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봉천성은 순(舜) 시기 유주, 영주, 두 지역”이란 기사에 있어 설득력 있는 1차사료나 문헌자료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료나 문헌자료 제시 등 고증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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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8부
넷째, 김육불이 “순(舜)은 연(燕)[북연], 제(齊) 지방이 너무 멀어 연(燕)을 나누어 유주를 두었으며, 제(齊)를 나누어 영주로 삼았다”라고 마융(馬融)의 말을 인용한 손성연(孫星衍)의 <尙書今古文注疏(상서금고문주소)>의 글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通典(통전)>에 기록된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순은 기주의 북쪽이 넓어 나누어 병주로 하고, 연은 유주로, 제는 영주로 나누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과 제의 지방이 너무 멀어”가 아니고 “기주의 북쪽이 넓어서”이다. “기주의 북쪽이 넓다”는 말과 “연과 제의 지방이 너무 멀다”는 표현은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연[북연], 제는 하남성에서 본 황하 이북의 산서성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의 동북삼성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순(舜)은 하우(夏禹) 때의 임금이니 기원전 2000년경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국시기인 기원전 400년경의 연나라와 제나라 지방이 너무 멀어 연을 나누어 유주를, 제를 나누어 영주로 삼았을까.
1600년 앞을 내다보면서 당시 실존하지도 않은 연(燕)[북연]과 제(齊)를 서술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혀 논리성과 설득력이 없는 허구의 소설이다.
김육불은 연(燕)[북연]과 제(齊)가 하북성과 요녕성까지를 점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연(燕)[북연]은 유주(幽州)인 그리고 하북(河北)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었던 나라이다. 김육불의 기사는 엄연한 ‘원전 문헌’의 왜곡과 날조로 역사학자로서의 양식을 벗어난 행위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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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