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2부
III. 기주의 위치
1. 1차사료와 문헌자료의 기주
고대(古代)에 나타난 최초의 구주설(九州說)은 <尙書(상서)/禹貢(우공)>, <呂氏春秋(여씨춘추)/有始覽(유시람)>, 그리고 <淮南子(회남자)/墬形訓(지형훈)>이다. <상서/우공>의 구주는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량주(梁州), 옹주(雍州)이다. <상서>에는 ‘유주(幽州)’가 없으며 ‘기주(冀州)’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禹)는 땅을 나누고 산에 이르러 나무를 베고 높은 산과 큰 강에 제사지냈다. 기주(冀州)는 호구산(壺口山)에서 시작하여 양산(梁山)과 기산(岐山)까지 다스렸고, 태원(太原)땅을 닦고 악산(岳山) 남쪽 기슭에 이르렀으며 담회(覃懷)땅의 일을 마치고 장수(漳水)가 가로지르는 곳에 까지 이르렀다.
그곳 흙은 희고 부드러웠고 賦稅는 일 이등이 섞였고 밭은 오등 정도였다.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잘 다스려지자 대륙 호숫가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섬나라 오랑캐들은 여러 가지 옷을 바쳐왔다. 그들은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왔다.”
고 하였다. <상서>의 기주에 나타난 지명들인 태원, 호구산, 양산, 장수, 악산, 항수 등은 황하를 따라 산서성에 있는 지명들이고, 기산은 섬서성과 산서성에 있는 지명이며, 담회와 위수는 황하북부 하남성의 하내(河內)에 있는, 산서성과의 경계에 있는 지명이다.
또한 당나라의 지리서인 <元和郡縣圖志(원화군현도지)>에서도 ‘하동지방이 기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기주는 산서성 일대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상서/우공>에서 기록하고 있는 기주는 오늘날의 하북성도 요녕성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황하의 동쪽이란 의미의 하동지방인 산서성을 기주라 하였음을 지도상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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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3부
전국시대인 BC239년경에 지었다는 <呂氏春秋(여씨춘추)/有始覽(유시람)>은 구주(九州)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하와 한수(漢水) 사이로 예주(豫州)이며 주(周)국이다. 황하의 양쪽 사이로 기주(冀州)이며 진(晉)국이다. 황하와 제수(濟水) 사이로 연주(兗州)이며 위(衛)국이다. 동쪽으로 청주(靑州)이며 제(齊)국이다. 사수(泗水)가로 서주(徐州)이며 노(魯)국이다. 동남으로 양주(揚州)이며 월(越)국이다. 남방으로 형주(荊州)이며 초(楚)국이다. 서방으로 옹주(雍州)이며 진(秦)국이다. 북방으로 유주(幽州)이며 연(燕)국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하남성 낙양에서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구주를 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황하의 양쪽 사이로 기주”란 경도 110도와 위도 35도에서 황하가 꺾이는 지점으로 세로로 흐르는 황하 우측과 가로로 흐르는 황하 위쪽인 산서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산서성이 ‘ㄴ’ 자처럼 황하로 둘러싸여 황하의 양쪽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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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4부
황하의 양쪽 사이가 기주라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약 27종으로 <禹貢指南(우공지남)>, <尙書講義(상서강의)>, <夏氏尙書詳解(하씨상서상해)>, <禹貢說斷(우공설단)>, <詩地理攷(시지리고)>, <禮書綱目(예서강목)>,
<三傳析諸/穀梁析諸(삼전석제/곡량석제)>, <經典釋文(경전석문)>, <六經奧論(육경오론)>, <古經解鉤沉(고경해구침)>, <爾雅注(이아주)>, <通鑑地理通釋(통감지리통석)>, <皇王大紀(황왕대기)>, <大事記/大事記解題(대사기/대사기해제)>,
<繹史(석사)>, <畿輔通志(기보통지)>, <說苑(설원)>, <大學衍義補(대학연의보)>, <藝文類聚(예문류취)>, <帝王經世圖譜(제왕경세도보)>, <群書考索(군서고색)>, <天中記(천중기)>,
<廣博物志(광박물지)>, <御定分類字錦(어정분류자금)>, <六家詩名物疏(육가시명물소)>, <書蔡氏傳旁通(서채씨전방통)>, <爾雅注疏(이아주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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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5부
이들 문헌들은 한결같이 기주는 양쪽 황하강 사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산서성이 하동지방이며 앞의 <원화군현도지>의 기록대로 ‘하동지방이 기주’임으로 <상서/우공>의 기주와 같은 지역이고, 결국 기주지역은 산서성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황하는 경도 110도와 위도 35도로 나누어지는 곳을 흐르는 하천으로 경도 110도 좌측은 섬서성 그리고 위도 35도 아래는 하남성이 위치한다.
따라서 하북성이나 요녕성은 기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황하(黃河)와 인접하여 황하가 꺾이는 황하의 양쪽 사이가 아니며 섬서성과 하남성과 이웃한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를 쉽게하기 위하여 기주인 ‘황하의 양쪽 사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6>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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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6부
<呂氏春秋(여씨춘추)>에서 유주(幽州)라는 지역이 최초로 등장하고 있다.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유주는 북방으로 연(燕)나라 땅이라는 것이다.
낙양에서의 북방은 당연 산서, 섬서, 하남성의 황하 부근이다. 다시 말하면 기주의 일부인 산서성 남부를 유주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죽국의 상징은 수양산으로 황하가 굴곡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산이고 수양산이 위치한 지역이 바로 기주였고 유주였다. “지금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고 백이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 연(燕)에 속했다”라고 <通典(통전)>이 기록하고 있다.
전국시의 연은 북연(北燕)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북연(北燕)은 산서성 남서부 고죽국이 위치했던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북연(北燕)은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淮南子(회남자)/墬形訓(지형훈)>에는 구주를 신주(神州), 차주(次州), 융주(戎州), 엄주(弇州), 기주(冀州), 태주(台州), 제주(泲州), 박주(薄州), 양주(陽州)로 나누고 있다. 여기의 기주는 中央(중앙)이라 방위를 정하고 있다. 중앙은 황하가 ‘ㄴ’자처럼 꺾이는 곳의 섬서, 산서, 하남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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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7부
이렇게 사료마다 구주(九州)의 위치는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기주는 황하를 중심으로 산서성 지역이라는 데는 이들 세 사료가 모두 일치하고 있다.
구주를 설정한 이들 세 사료들에서는 오늘날의 하북성(직이성)이나 요녕성(봉천성)이 기주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요서(遼西)는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녕성은 요서도 유주도 기주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사기집해>, <한서>, <후한서>, <설문해자>,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괄지지>, <통전>, <상서>, <여씨춘추>, <회남자>의 모든 문헌들을 요약 정리하면 산서성 남부와 서부가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었으며, 이곳이 기주이고 유주이며 요서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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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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