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장성을 쌓을 때는 적으로부터 강토를 보호하기 위한 이유에서 이다. 그러나 이들 선행 연구자들 어느 누구도 돌궐 가한, 돌궐 가한의 주거지인 유림, 고구려의 사신과 수양제의 만남, 힐리가한과 당나라 관계, 고구려의 도성(都城)이 위치한 핵심강역 등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해야만 했던 위태로운 상황 설명이 전혀 없다.
돌궐가한의 주거지인 유림과 압록수라 부르던 고구려의 요수의 위치만 정확하게 밝혔더라면 요녕반도에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위치했다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사학계의 통설은 ‘요녕반도에 천리장성이라는 상상의 선을 그어놓고 천리장성 우측에 부여성, 신성, 현도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 비사성, 박작성, 오골성, 국내성, 평양성 등을 임의대로 설정하였다.’ 요서인 하북성 북경에서 당나라가 침입하자 천리장성으로 대치된 한반도를 포함한 일부 지역만이 마치 고구려의 강토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당나라의 재상인 두우가 지은 <제도사>에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6,000리라 하였고 <新元史(신원사)>에서는 “고구려의 강토가 1만리”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서 6,000리면 한반도에서 서쪽으로 감숙성 중간 지점까지이고 1만리라면 한반도에서 감숙성 끝 돈황까지의 넓은 영토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하북성은 유주(幽州)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주장을 하려면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문헌사료들을 읽지 않고 처음부터 잘못 추정, 비정, 추측된 선행연구자들의 논문에 근거하여 재탕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 논문들은 문학창작으로서의 가치가 부여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사적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논문은 될 수 없음을 밝힌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입각하여 논술된 역사논문은 명백한 논거가 제시되기 때문에 설(說)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설(說)이란 글자 그대로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설은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역사적 고증도 아닌 개인 의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살펴본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관련된 기존 연구성과들은 모두 각자의 “∼설”로 이루어진 논리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에 역사논문으로서 논평의 가치가 없다. 지금부터 고구려의 핵심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함께 추적해 보도록 하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7부
II. 고구려의 영토
“고려의 본래 이름은 고구려이다. 우(禹)가 구주(九州)로 나눌 때에 기주(冀州)땅에 속했고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漢)나라의 현토군이다. 요동에 있었는데 부여의 별종으로 평양성에 도읍했다. 한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항상 직공하면서도 자주 변방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수양제는 두[네] 번이나 출병하였고 당 태종은 친히 정벌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라고 <宋史(송사)>가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우(禹)가 구주를 나눌 때 기주땅에 속했으며 주나라 때는 기자의 나라였고 요동에 있었는데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수양제 양광이 네 번 그리고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국내성, 안시성, 환도성 등 황도(皇都)가 위치한 핵심 강역을 고증할 수 있는 지리지명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기주의 위치이고 다른 하나는 고죽국의 위치이다.
이 두 지역의 위치를 1차사료와 문헌자료인 <상서/우공>, <여씨춘추/유시람>, <회남자/지형훈>과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을 면밀히 조사, 검토해보면 기주와 고죽국이 산서성에 위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산서성이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사료들을 순서대로 분석해보도록 하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